사업(事/業 = 公 + 私)

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by 사각공간

일, 그러니까 事를 業으로 이루어 꾸려가는 데에 '나 홀로'는 없다. '함께' 이루는 것. 고도로 분업화되어 있다는 이 자본제資本制 또한 마찬가지. 굳이 생산/공급 그리고 소비를 입으로 옮기지 않아도 Host(비록 Show를 통하지 않고는 실감할 수 없는 반쪽짜리일지언정)는 (아니 그렇기 때문에 나머지 반쪽인) Guest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 둘이 짝하지 않는 성취란 있을 수 없다. 의도적 노력이든 비자발적 참여든 이기적 충족이든 뭐든 간에 낱낱의 개인[私]이 개입, 뭉쳐서 이루니 다름 아닌 사업事業이겠다. 그러니 예의 그 자본제에서조차 사업에 있어 공적 성질의 내포는 불가피, 필연이라는 것. 다시 이르면 모든 사업에 필히 깃들어 자리하니 다름 아닌 공공성公共性이겠다.


다만 이기利己를 구심 삼으니 공공성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을 뿐(물론 이기를 배면에 감추고 공공성을 앞세우는 경우야 두말할 것도 없겠다. 몇몇 기성 언론사가 대표적일 것). 한편 바로 그 이기로 인해 균형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고 오히려 불균형이야말로 만성慢性. 그러나 불균형이 통상적이라고 그 상태를 정상인 양 여기는 건 어불성설. 왜냐하면 불균형 상태에서 양극화는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 보이지 않아 모르는 게 아니고 알고 싶지 않으니 외면하는 것뿐. 확실한 건 누군가 화폐라는 금권을 앞세워 그 뒤에 숨을 때, 또 다른 누군가는 그렇게 숨은 누군가를 대신해 존엄을 수시로 위협당하는 전면에서 방패 됨으로써 인간 배제를 경험한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무딜 수 있음은 자신이 직접 간여한 바가 아니라 여길 수 있기 때문. 일신의 안위/자기 편의 추구 저변에 자리한 타他의 불편. 당초 누군가 불편을 감수하는 데서 비롯하는 편의의 실상은 착취. 어제에서 오늘 그리고 내일을 잇는 일상의 매순간 당장의 자기 편의를 우선하는 편에서 빚는 무책임. 이 책임 회피/방기를 은폐하는 ‘보이지 않는 손’.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아렌트가 일렀다는 ‘악惡의 평범성’ 아닐지. 가장 가까이는 ‘거울 속 악수를 모르는’ 나를 비롯하여 도처에 자리하여 있는, 소소하고 평범한 악이라니; 그야말로 hell(조선). 서로가 서로에게 수감자인 동시에 형 집행인인 이 상태야말로 끔찍 -_-;;


사적 욕망 추구, 이기의 자연 경쟁 상태가 빚는 건 적자생존適者生存이 아니고 살아 남으니 적자라는 것. 단적인 예를 들면, 친일로 불의한 선대가 모은 재물을 바탕으로 기회를 사들인 후손과 경쟁해야 한다면 그 과정이 공정하게 느껴질까? ‘기회는 평등, 과정은 공정, 결과는 정의’, 이를 정착시키려면 인위의 개입은 불가피할 것. 이를 사업에 비추어 살피면 그에 깃들게 마련인 공공성을 외려 전면에 세우는 편(고루한 표현일지 모르나 예로 들자면 윤리/도덕을 기틀로 삼을 수도 있겠고)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적어도 ‘사고思考하는’ 인간種이라면 말이다. 동종 인류의 행복을 지향하는 데에 게으른 인간이야말로 직무유기요 ‘-실격’이겠고. 이를 반성치 못한다면 실상 이미 ‘-폐업’ 상태라 일러도 과언은 아닐 듯.


그렇다고 인류애人類愛라는 것이 거창한 무엇으로 드러난다든지 또 그리 보여야 하는 따위는 아닐 게다. 악이 평범한 가운데 거할 수 있음과 마찬가지로 사랑으로 드러나는 선善 또한 얼마든지 그리하겠지. 평범이라면, 사업에 깃들게 마련인 공적 성질을 처음부터 뚜렷하게 인식하고 이의 확장을 도모하는 형태, 그러니까 보다 안정적인 상태를 장기 유지하는 사회상을 그려보는 정도? 수익 환원, 돈벌이를 앞세우면 잘 떠오르지 않는데 처음부터 빌린 바이니 사는 나날을 함께 잘 사는 데에 남김이 없도록 아끼지 말자는 식으로 접근하는 게 그리 어려운 건 아니다(원리금 상환 부담이 크지 않은 규모이거나 거치 형태로 차입이 가능하다면, 이 부채를 자산으로 매월 벌어들인 수익으로 이자 감당하면서 함께 종사하는 인원들이 급여 형태로 제몫을 취해 갈 수 있으면 되는 것. 이 자본제 하에서 내세우는 사업 성공조차 이 정도는 그리지 않나. 물론 이 차입 과정이 공정하고 합리적이지 않으니 문제 발생한다만;;). 취取하고 남겨서 제 이름을 붙이는 데에만 혈안되니 힘든 것처럼 느껴질 뿐. 처음부터 이 공공성을 전면에 거는 전제로써 사업을 전개한다는 건 실로 흐르는 물처럼 유연하고 자연스러울 거다. 마땅하게 여기니 전제함이 어렵지 않겠고, 전제하여 벌인 끝에 얻은 바를 나누는 데에도 걸림이 없고 거침이 없을 터. 당연하니 '왜'라는 의문이 끼어들 여지(제 이익을 앞세워 셈하는 욕심이 비집고 들어서는 틈이 그 여지로 비추어질 뿐이니) 또한 없겠고. 공공성을 바탕 삼으면 진취進取 곧 ‘나아가 취하려는’ 목적을 사적인 데에 두지 않고 그 너머 모두가 바라마지않는 사회상 구축/실현에 두게 마련이니 딱히 어려울 게 있나? 없지!!


사실 얻는 데에 초점을 맞추니 그렇지 뒤집으면, 합력合力하여 이룬 몫인 만큼 빌어다 쓴 바를 갚는 배분에 아끼고 자시고 할 게 있나. 무엇을 아끼겠어(아낀다고 갈무리해두는 걸 사사로이 결정한다, 할 수 있다는 건 제몫을 키우는 도둑질을 미화하는 것뿐. 명분 없고 용처 뚜렷하지 않은 사내유보 역시 거칠게 이르면, 돌려주어야 마땅한 몫을 챙겨 쟁여둔 것. 재투자로 고용 창출 등에 쓰이지 않는다? 그게 도둑질이지!). 알뜰살뜰 함께 꾸리며 살아낸 세월 그 모든 순간이야말로 값지다는 걸 잘 알겠고. 아는 이라면 오히려 길들이는데 따르게 마련인 책임의 무게를 실감하는 ‘어린 왕자’의 편에 서서 벌이는 규모의 소박함도 중하게 여기며 알차게 꾸리는 데에만 심혈 기울이겠지. 무명無明을 자각自覺케 하는 빛으로 주목받으려는 욕망이 승하면 선지자 흉내로 무대나 탐하는 것. 가리지 않고 비추는 빛과 같은 존재라면 단壇 위에 오르지 않고 물처럼 낮은 데로 흐르기만 하였음을 모르지 않으니 어디서든 겸손하겠고(거머쥐어 쌓지 않고 함께하는 여럿과 나누니 흩은 바 되어 잃을 게 없겠고, 잃을 게 없으니 부당함에 맞서는 자리에서 당당할밖에). 저잣거리 등 가리지 않고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그 단을 고르게 하는 데에 힘쓰지 않았던가. 술이부작述而不作에 여시아문如是我聞이니 값 매기는 바 없이 전하고. 받을 때에는 그를 재원으로 여럿의 필요를 충당하는 동력 삼고. 모름지기 사업이라면 이런 전개여야 바람직하지 않을지(벤처부터 스타트-업이니 뭐니 하는 말글, entrepreneur-ship이니 기타 등등 경영이고 자기개발인지 계발인지 분야에 몸담으면 꼭 그 외산外産 용어를 뿌리로 두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살피면 이쪽에 없는 것도 아닌 듯싶은데. 사실 한류韓流의 시원始原이자 본류本流라면 이런 정신유산에 있을 터, 이편에서 발굴하여 사용하는 편이 장래를 염두에 두어도 훨씬 더 유용하지 싶고).




구구절절 길게 부려놓는 이유, 입속에 맴도는 말을 글로 새기며 정리하여 마음 다지려 남겨두는 것. 다른 건 차치하고 통상의 필요 이상을 구하는 바가 목적이면 동네서점(책방)이나 아울러 독립출판 등을 사업모델로 삼을 이유 있나? 아니 왜? 굳이?? 다른 분야/업종은 레드오션이어서 나름 블루오션 개척이라 여긴다면.. 그럴 수 있겠다 싶긴 하다. 다만 그러려거든 양손에 떡을 쥐려 들지는 말아야겠지. 수익이면 수익을 추구하는 선으로 일원화해야 마땅하지 않겠냐는 것. 인문 교양의 무늬를 두르고 손익을 셈하는 궤의 한통속으로는 서점/책방을 찾는 독자는 물론이거니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 아닌지. 자타를 속여서라도 유물론적 풍요를 취하려 드는 걸 목적 삼는 이에게 책 속 활자가 가리키는 바는 무슨 소용에 닿을지를 나는 짐작조차 못하겠다. 그리고 수익 서사를 쫓으면서도 소비자로서의 독자에게 나름의 편의를 제공하는 형태라면 이미 자리해 있지 않은가. 규모의 경제를 달성한 상태에서 경제적 이득이라는 후생을 제공하며 제 수익을 도모하는 형태라면 대형/인터넷 서점 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니까 개별 독자가 기성의 출판유통시장에서 취할 수 있는 할인/마일리지 등의 경제적 이득, 사회적 후생을 포기하고 동네서점(책방)을, 독립출판물을 찾는 이유에 대한 고민 선행이 마땅하지 않겠냐는 것.


작년 지역문화재단에서 주최/진행하려던(아프리카 돼지 열병으로 무산) 동네책방 관련 동네서점주(그래도 기성과 다른 향방을 고민하여 독립을 지향한다는) 여러분이 한자리에 모였었다. 나도 귀동냥할 겸 말석이나마 끼었는데 오가는 말 듣다 일으켜진 한 생각 머릿속을 떠나질 않고 팔방으로 갈래 뻗으니 사업이란 무엇인가부터 책은, 책방/서점은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나 등등이어서.


당시 참여 서점들에 행사 당일 매출 손실 보전 명목으로 30만을 지급하여 준다는 말을 주최 측으로부터 들었을 때 나름 충격이었다. ‘팔아야 산다’를 주제(?)를 강조하던 독립서점주(일부는 그 이전 해에도 동일한 조건으로 그 돈을 챙긴 치도 있고 당해년 처음 참여하는 치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태도라면 사실 그 독립이란 개념의 오용을 넘어선 오염의 주범이나 아닌지) 얼굴들이 잊히지 않는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 대사 ‘뭘 많이 먹여야지’를 인용하던 치도 있었는데 실상은 인용과 다르게 이쪽이 얻는 형편 아닌가 싶으니~ 이게 다 뭐하자는 짓인가 싶기도 했다. 요는 시민에게 동네서점을 알리는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도 고마운 일로 하루 30만 지급(하루 업장을 비우는 만큼 매출 손실 보전 차원이랄 수 있지만 서울 중심가도 아닌 수도권 그것도 비교적 임차료 저렴한 소규모 업장에서 책을 품목으로 일평균 매출 30만 선인 곳이 있을까?!)이라면 책방/서점의 참여 취지라면 단순히 상행위와 그를 통한 수익 실현과는 다른 입지를 다지는 형태로 접근함이 바람직하지 않냐는 것. 수익에 목매는 형태를 고스란히 답습하는 한편에서 이런 지원에 기대는 것이야말로 기생에 다름 아닌 것. 적어도 책을 가까이 하다못해 전하려는 입장에 선 사람들이면 떳떳해야 하지 않나 싶다.


실상 사업 영위를 목적 삼는 데에서 비롯하는 고민 상담이니 처방 운운 거듭하는 형태나 시기별 일회성 행사를 답습하는 형태. 한계도 한계이지만 무책임하고 뻔뻔하잖나. 자성自省에 게으르고 관대한 이가 타인에게 책을 건넨다? 자신도 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바라고 요구하는 식과 매일반. 심지어 이를 바탕으로 사리私利를 취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단 얘기다!!


바른말 할 줄 아는 자본가로 무대에 서고 싶은 게 꿈이라면 차라리 그에 솔직한 편이 나을 것! 유튜버이든 버스킹 끝에 재능 뽐내는 무수한 여신/남신이든 뭐든 따르고 쫓는 건 자유이나 그에 따르는 책임을 염두에 두고, 모든 사업에 깃들게 마련인 공공성을 확장하는 형식을 먼저 고민하는 이들이 더 많이 출현하길 바라는 마음이긴 하다. 운명애運命愛의 본질을 초월超越 아닌 포월匍越에서 찾는 이라면 적어도 각오와 타협은 구분하리라 믿는다. 빠진 밑에 다른 주머니 두고 채우겠다면 그때의 동네서점(책방)이란 장독 아닌 자타 사회 전체에 독毒이 될 뿐 아닌지!!


진보와 가난이 짝해야 하냐는 건 아니나 불가피하다면 그 운명 또한 수긍하는 편에 서서 굳건하게 자리함이 진정한 운명애 아닌가 싶기도 하다. 자선이라도 하라는 말로 들릴 수 있겠는데 음.. 글쎄 뭐 나로서는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적극적인 자비량自費糧이야말로 시대가 겪는 곤란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데에 일조하지 않겠나 싶다. ‘나’부터 밀알로 썩어져야 토양이 질적으로 개선되지 않겠나. 이렇게 토대를 다지는 데에서 객관의 지평도 열리겠고 그제야 비로소 독립獨立이 가능하지 않나 싶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는 태도를 오롯하게 견지하다 스러지는 이들이 아니고서는 각자도생의 무수한 파생/분열을 극복하긴 어려워 보인다. 책방/서점/출판 아니 종교/정치 등등 말글로 이룬 상부구조 각 분야 직종과 그 종사자가 왜 어째서 달라야만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딱히 이를 말은 없다. 다만 당사자는 느끼고 알지 않나? 자신들이 상대적으로 더 누리는 자유, 더하여 고소득 등은 하부구조를 이루는 직종에 종사하는 다수 덕분이란 것을. 그러면 그에 마땅한 책임을 지는 게 합리적이지 않겠나?! 읽어보니 그렇더라. 내 생각이 아니다. 읽은 책에 기록된 바가 그러하다. 성경/불경은 물론이거니와 여타 책을 통해 내면에 모셔들인 스승들 가르침이 죄 그렇다. 이를테면 헤세의 『유리알 유희』가 그렇고, 비근한 예로는 또 『쓴맛이 사는 맛』이라는, 그러니까 쓴맛 사는 맛임을 느끼며 살아오신 채현국 선생 또한 그렇더라 일러주시니 거듭하여 옮길 뿐.


'자유롭게' 전공을 선택한 사람이 제 분야에서 교육을 받느라고 경직된 시험을 치르며 편협하고 고정된 교과 과정을 이수해야 한다면, 선택된 자의 경우에는 그가 독자적으로 연구를 시작하자마자 곧 폭넓은 자유가 주어지네.

(…) 자신이 봉사할 수 있고 봉사하는 가운데 자유로울 수 있는 자리를 찾는 거야.
그 밖에도 그는 이제 저 무서운 예속을 의미하는 직업의 '자유'에서 평생 동안 해방되는 거지.
돈이나 명성이나 지위를 좇아서 애태울 필요도 없고, 당파를 몰라도 되며, 개인과 직책 사이의 갈등, 사적인 일과 공적인 일 간의 알력 같은 것 역시 몰라도 좋고, 성공에 연연해할 필요도 없어.
자, 이제 알겠나, 우리 아들. 사람들이 자유로운 직업에 대해 말할 때 그 '자유'는 지극히 조롱의 뜻이라는 것을.

_헤르만 헤세, 『유리알 유희』 中


비겁해야만 목숨을 지킬 수 있었고 야비하게 남의 사정 안 돌봐야만 편하게 살았는데. 이 부실한 사람들, 늙어서 정신력도 시원찮은 이들을 갈등 속에 집어넣으니 저 꼴이 나는 거다.

아비들이 처음부터 썩은 놈은 아니었어. 그놈도 예전엔 아들이었는데 아비 되고 난 다음에 썩는다고….

자기 껍질부터 못 깨는 사람은 또 그런 늙은이가 된다. 저 사람들 욕할 게 아니라 저 사람들이 저 꼴밖에 될 수 없었던 걸, 바로 너희 자리에서 너희가 생각 안 하면 저렇게 된다는 걸 알아야 한다.

자기 개인 재산이란 게 어딨나? 다 이 세상 거지. 공산당 얘기가 아니다. 재산은 세상 것이다. 이 세상 것을 내가 잠시 맡아서 잘한 것뿐이다. 그럼 세상에 나눠야 해. 그건 자식한테 물려줄 게 아니다. 애초부터 내 것이 아닌데 ….

_채현국 구술, 정운현 기록, 『쓴맛이 사는 맛』 中


안다는 이들이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솔선수범率先垂範치 않으면 도대체 이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시대를 어떻게 건넌단 말인가. 거꾸로 선 꿈의 세상에서’ 직립이라면 물구나무라도 각오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붙임: head 삽입, Photo by Thomas Martinse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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