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을 입었다는 예수를 업고 말[言]은 세간의 부박한 결 사이를 파고든다. 그런데 어째서, 한낱 백 년 살이 주제에 고작 제 일가의 삼대를 걱정(이게 주접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하는 따위의 성공 정도로 변질되는가. 대속代贖, 그야말로 만인의 목숨을 대신하여 사지死地로 걸어 들어간 그는 어디 가고 엉뚱한 놈들이 금의환향 쇼를 벌이는가 말이다. 참말로 알쏭달쏭.
'내' 죄 사赦함 받으려거든 먼저 '우리가 우리에게'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지은 죄를 사'하라는 조건. 이를 명시한 그이의 본의를 구하려 쫓다 보면 마주하게 되는 바 외려, '우리'로 엮인 이 무리의 상태야말로 죄로 결속되어 있다는 증거이지 싶다. 그렇다면 이미 죄로 결속된 우리로 자승자박인 가운데 서로 간 죄를 사한다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미션 아닌지. 삶과 유리된 채로 추상된 조건/계명과 인간은 무관일 수밖에 없지 않나. 바로 이 때문에 生을 걸지 않을 수 없는 것. 먼저 자신을 던짐으로 해서, 대속을 실천함으로써 만이 윤리의 육화肉化를 이룰 수 있으니. 무관한 조건이 육화된 윤리로 인간史에 개입될 수 있게 되는 것. 하여 그제까지 절망으로 점철된 그 인간사에 비로소 생명의 길이 열린 것. 그러니까 사내는 제 죽음으로써 이 대승大乘의 길[道] 닦은 바이니 이야말로 '사즉생死卽生'.
그래 사즉생. 이는 제 생명을 판돈으로 사지死地에서 벌이는 도박판과는 차원이 다르다. 죽음을 실감하는 고위험 순간을 스릴로 즐기는 속에서 역으로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변태와는 급이 다르단 얘기. 당대에 추수, 제 이름 아래 두려는 욕망. 수확물 소유에 열 올리는 수준으로 사즉생을 입에 올린다는 자체가 어불성설.
그러니까 사즉생에서의 '즉卽'을 어림하는 도량이 모르긴 몰라도 천양지차 아닐지. 제 죽음 뒤에 올 삶. 자기 사후에도 이어질/계속되는 자신 이외의 삶/생명에 대한 사랑이 전제되지 않고는 불가능하지 않은가. 죽음으로써 깨어날 호접지몽의 제 운명을 너끈히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데에서 비롯함이 사즉생 아닌지.
이 세계가 인간에게 가하는 모멸과 치욕은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고 회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세계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서 밥을 먹고 숨을 쉰다는 것은 이가 갈리는 일이지만 마침내 협잡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나는 세상의 모멸과 치욕을 살아 있는 몸으로 감당해내면서 이 알 수 없는 무의미와 끝까지 싸우는 한 사내의 운명에 관하여 말하고 싶었다.
희망을 말하지 않고 희망을 세우지 않고 가짜 희망에 기대지 않고 희망 없는 세계를 희망 없이 돌파하는 그 사내의 슬픔과 고난 속에서 경험되지 않은 새로운 희망의 싹이 돋아나기를 나는 바랐다. (…) 절망을 절망으로 긍정하면서 절망 앞에서 중언부언하지 않는 그 비극적 단순성
_김훈, 『칼의 노래』서문, 생각의나무
'절망을 절망으로 긍정', 최소 이런 정도의 태도로 살아내는 한에서 만이 그 운명애運命愛/amor-fati라는 표현에 걸맞은 삶 아닐지. 재밌는 건 이를 의식하면서부터는 각오와 의지는 물러서고 소명이 앞장서게 되는 듯싶다. 육신에 거하는, 개체의 각오/의지로는 집단의 유물론을 넘어설 수가 없지. 아무렴. 이 한계를 직시하는 데서 운명 수긍과 동시에 소명으로 시프트-업 이루니,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야말로 다름 아닌 '다이몬'의 육성처럼 내면에 울려 퍼지듯 하는 게 아닐까. 자, 그렇다면 수확물 소유에 집착하는 경쟁이 빚는 허명虛名 쫓으며 전하느니 이 세상이라면, 그 중심에서 외치는 사랑이래봐야 역시 실체 없는 허상. 따라서 그러거나 말거나 중심이든 변방이든 사랑'하는' 데에 힘을 쏟는 편이야말로 '진짜' 아닌가. 그렇지! 내가 낸데, 어?! 내가 나로 있으니 그곳이 어디든 다름 아닌 중심!! 마침내!!
삼대 아니 천년 후대 아니 자손만대 혈연 비롯한 기득권 계보를 수성守城 하려는 '주인'이 도처到處에! 그러니 압류 당한 미래 대신 절망의 레거시를 이고 지느라 수고하는 이들이 난처難處일 밖에. 따라서 정처定處를 구하려면, 기성의 토대를 갈아엎고 새로이 가꾸려는 대등한 '주인'으로 맞설밖에 다른 도리 없는 것. '배 부른 돼지'를 기르는 '노예의 도덕'. 일신의 안녕 추구로는 탈영토 불가. 대승 역사의 진일보를 위해선 앙시엥의 균형을 무너뜨려야만 하는 것. 이족으로 보행 시에도 정지 상태의 균형을 무너뜨리며 무게 중심을 옮기는 변증 과정이 필수이듯. 기성을 지탱하는 오른쪽 레짐의 무릎이 꺾여야 할 것. 이러려면 내 왼편 무릎부터 접는 게 필수 아닐까. 그러니까 이편에서의 사즉생으로 겨우 일보 전진하게 되느니 사람의 역사 아닌가 싶다.
원균은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고 아무도 말리지 못할 무서운 적의를 지닌 사내였다. 그 사내는 모든 전투가 자기 자신을 위한 전투이기를 바랐다. 그는 전투의 결과에 얻을 것이 있다고 믿었다.
_김훈, 같은 책
그러니 '자기 자신을 위한 전투'로 저렇게 모양 빠지는 일 없도록 해야겠지. 남 목숨 귀한 줄 모르고 왜 지놈이 이득을 구하냐 말이지. 나 원 별 -_-;;
삶은 집중 속에 있는 것도 아니었고, 분산 속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모르기는 하되 삶은 그 전환 속에 있을 것이었다.
보편적 죽음이 개별적 죽음을 설명하거나 위로하자는 못한다. 인간은 보편적 죽음 속에서, 그 보편성과는 사소한 관련도 없이 혼자서 죽는 것이다. 모든 죽음은 끝끝내 개별적이다. 다들 죽지만 다들 혼자서 저 자신의 죽음을 죽어야 하는 것이다.
닥쳐올 싸움은 지나간 모든 싸움과 전혀 다른 낯선 싸움이었다. 싸움은 싸울수록 경험되지 않았고, 지나간 모든 싸움은 닥쳐올 모든 싸움 앞에서 무효였다.
_김훈, 같은 책
내가 맞닥뜨릴 죽음은 나의 것으로 사사로울밖에. 소승小乘의 거처이자 원願의 처소인 나에 '집중'하든 발원發願으로 '분산' 대승大乘으로 옮기든 '다들 혼자서' 끊임없이 '전환'하는 속에서 균형 무너뜨리는 변증 또한 영구적으로 이니 진일보 거듭하겠지. 그러니 나 역시 매번 새로워 '낯선 싸움' 거듭하다 가면 그만.
너의 참혹한 육박이 없었더면,
적이여! 어찌 우리들의 가슴속에 사는 청춘의 정신이 불탔겠는가?
오오! 사랑스럽기 한이 없는 나의 필생의 동무
적이여! 정말 너는 우리들의 용기다.
너의 적을 사랑하라!
복음서는 나의 광영이다.
_임화,詩 「적敵」中
정말이지 '적이여! 정말 너는 우리들의 용기'. 이 원수,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