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고독은 그 사람의 속을 아주 깊이 파고 들어서, 뿌리내려야 할 토양의 뿌리를 갉아먹고, 헤엄쳐야 할 지느러미를 병들게 한다. 헤엄을 친다. 나의 고독은 그렇게 나에게 왔다. 바다 아주 깊이, 차가운 해류에 몸을 맡기다 내 몸에 흘러들어오는 것이다.
나의 고독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면, 내 고독은 공간과 공간을 넘어 존재하는 하나의 시간대다. 나의 할머니가 어머니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건네주는 유산이자 공유하는 바다인 셈이다. 그곳의 벽지를 바르고, 봄볕이 들어오게 환기를 하고, 예쁜 찻장을 들여도 꼼짝없이 고독한 바다 안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독은 자아의 균열에서 나온다. 그렇게 틈으로 스며든다. 그렇다면 자아는 어디서 나올까? 김영하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인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관념을 만들고 거기 집착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늘 불행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아라는 것을 가지고 있고, 그 자아는 늘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두려워할 뿐 유일한 실재인 현재는 그냥 흘려보내기 때문입니다. 다가올 기계의 세상에서는 자아가 사라지고 과거와 미래도 의미를 잃습니다.” 기계의 세상에선 자기의 모든 경험이 데이터가 된다. 개인의 몸이 사라지고, 하나의 데이터로 존재하게 되기에 개인적인 경험도 사라진다. 결국 자아가 사라지고 미래와 과거가 사라진다면, 우리의 모든 경험은 개별성을 잃게 된다. 고로 고독도 사라지게 된다.
고독은 우리의 개별성으로 인해 생긴다. 모든 경험과 소망은 자아를 만들고, 각각의 자아는 특별해지고, 유일해지며 서로와 균열을 만든다. 우리의 경험은 누군가의 믿음 없이 경험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걸어 다니는 사람들 속에서 느닷없이, “저는 지느러미가 있어요”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있다. 아마 사람들은 그를 믿어주지 않을 것이고, 그 사람은 아주 고독할 것이다. 그의 자아를 만든 경험이 타인의 세계에선 실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감과 이해 바깥의 경험들은 사람을 고독하게 만든다. 먼 타지에서 느끼는 감정과, 특별한 질병을 앓는 것과 같은 경험들처럼 말이다. 모순적이게도 고독은 자아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공유하는 유일한 공유지이며, 그것이 사람들을 또다시 고독하게 만드는 시작점이 된다. 고독은 고독으로 인해 존재하고, 아마 우리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작가인 오메르 파스트는 이렇게 말한다. “요컨대 누군가 외상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면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적어도 그가 겪은 일이 실제였다고 믿어 주는 일입니다. 어떤 일이 발생했다고 믿기 어렵거나 이를 재현하기 어려울 땐 이를 다루기 위해 또 다른 도구 상자를 사용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허구라는 도구 상자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 허구를 만들어내고, 이야기를 읽고, 예술을 보는 것은, 타인의 고독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내가 한 경험을 이해해 달라고, 공감해 달라고 언어로, 이미지로, 조각으로 표현하는 것들이 우리가 보는 예술인 셈이다. 이처럼 고독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쓸모없을지도 모른다. 고독은 이미 존재하며, 우리가 그것이 쓸모 있느니 없느니 말을 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고독은 인간의 유전병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협력하여 공동체를 만들어야 살아갈 수 있는 종족 사이에, 고독을 잘 느끼는 사람만이 살아남은 것이다. 혼자 살아가기를 택한 사람보다 고독을 느끼는 사람이 생존에 유리했을 것이다. 공동체 내에서 고독을 참지 못하는 사람만이 서로를 선택하고, 지키고, 이해하며 진화하였기 때문에 없애지 못한 유전병. 그러니 우리는 애석하게도 고독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결국 내 고독은 내 인생의 동반자다. 탈출구는 없다. 아아, 그러니까 이건 백년을 넘어 지나온 고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