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지 않기 위해 열심히 발차기 중입니다
오랜만에 주말 아침 일찍부터 집을 나섰다. 나의 글쓰기 멘토 작가님이신 오정환 작가님의 소개로 신규 회원 가입 이후 첫 대면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신랑은 나의 개인 일정을 마치 알고 있었던 것처럼, 자신의 부산 숙소 이전을 앞두고 짐을 차에 실어두어야 한다며 나를 약속 장소에 내려주고 아이와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다. 집에 있어봤자 종일 뒹굴거릴 아들이 걱정되었나 보다. 어쩌면 벌써 어른 흉내 내고 싶어 자꾸 ‘나홀로 여행’을 꿈꾸는 아들의 마음을 배려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필 정월 대보름날 아들이 라면이나 끓여 먹을까 봐 마음이 무거웠는데 덕분에 홀가분 해졌다. 지금은 내일 또 혼자 올라 올 아들의 안전도 걱정되긴 하지만 말이다. 덕분에 이렇게 혼자만의 여유를 누릴 수 있어서 너무 좋다. 아들이 오기 전 중요한 일들을 최대한 빠르게 처리해야겠다. 밀린 서평도 쓰고, 다음에 서평할 책도 읽어야 한다.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밀린 서평 도서도 읽고 서평 초안 작성도 하다 보니 어느덧 시간은 4시가 넘어가고 점점 5시에 가까워졌다. 평소 좋지 않던 왼쪽 귀가 먹먹했다. 혼자만의 시간을 오랜만에 즐기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하나둘 삼삼오오 미라클 단체대화방에 입장하는 알림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딩동, 딩동…" 줌 접속을 할까 말까 잠깐 망설였지만, 입에서 하품이 터졌고, 눈은 자꾸 감겼다. 오늘 발표자 효림님과 리더 통쌤께 죄송했지만, 나의 청력을 잃을까 두려워 잠을 청했다. 이내 잠들었다가 5시간쯤 자고도 억지로 눈을 떴다. 오늘 아이의 교복을 찾으러 터미널 근처에 있는 교복 판매점에 다녀와야 했기에. 어제 아빠 따라 부산에 내려갔던 아들도 시간에 맞춰 터미널로 오기로 했다. 1시쯤 도착한 아들을 만나 교복을 찾고, 나온 김에 아들과 오랜만에 돈가츠도 먹고 평소에 노래를 부르던 탕후루도 사 주었다. 아들과 매일 오늘처럼 잠시라도 다정하면 좋을 텐데. 아니다. 매일 평화롭다면 이 시간의 소중함을 모르겠지. 그냥 이 순간에 감사하자.
도대체 정상인 날은 언제?
오늘은 이상했다. 분명 다른 날과 같은 시간-아니 오히려 평소보다 좀 더 이른 시간이었다-에 잠들었었는데 새벽 5시 기상 모임에 늦지 않게 접속했으니, 출발은 좋았다. 그런데 줌 접속 후 몇 분 만에, 누가 내 몸에 수면 약물을 넣은 것처럼 정신을 차릴 수 없이 졸음이 쏟아졌다. 눈꺼풀이 자꾸 감겼다. 열심히 발표하시는 드림북 님의 '감사'에 대한 좋은 강연에도 불구하고 주체할 수 없는 졸음을 쫓아내기 힘들었다. '잠깐 화면 끄고 소파에 기대어 자 버릴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러다 리더 통쌤이 나를 지명하여 강의 한 꼭지를 맡으라고 하자, 잠이 확 달아났다. 동시에 나도 모르게 인상이 구겨졌다. 이 반응에 통쌤이 "똥 씹은 표정 해도 소용없어."라고 하셨다. 아마 나의 멍한 정신과 점차 퇴색하는 목표 의식을 상기시켜 나의 중심을 깨워주려는 것이리라. 내가 살면서 이렇게 끊임없이 나의 존재감을 느끼도록 끌어주려는 누군가가 있을까. 감사한 일이다. 내가 스스로 행함을 꺼리는 것을 알고 자꾸 앎을 행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도록 이끌어 주시니 말이다.
지금까지의 나의 삶을 돌아보았다. 그동안 나는 새해가 될 때마다 늘 목표도 세우고 잘 지키겠다고 다짐도 해왔다. 그러나 매 순간 내가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요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내가 짜낼 수 있는 마지막 임계점까지 정말 모든 힘을 다 썼을까? 지난 주말 오전의 독서 모임을 마치고 오후에는 글쓰기 정기 모임이 있었다. 글쓰기 모임이 독서 모임보다는 먼저 결성된 조직이다. 도서관 평일 비정규직 채용 공고에 응시해 서류전형-면접전형까지 치르고 난 후였고, 모인 문우(文友)들의 향후 계획을 각자 밝히는 자리였다. 언제나처럼 나의 비루한 신세 한탄을 듣고 난 오 작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뭐 이렇게 핑계가 많아. 진짜로 공무원 시험 볼 생각 있으면 아직 몇 달 남았으니까, 글쓰기고 뭐고 다 내려놓고 지금부터 정신 바짝 차리고 공무원 시험 봐~”라고. 그 조직의 리더를 맡고 있는 오 작가님께서도 우스갯소리로 강조하신 거지만, 그날 내겐 그 말씀이 폐부를 찌르는 소위 폭격의 위력을 지닌 한방이었다. 난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제가 두뇌 회전 팍팍 되는 이십 대랑 어떻게 경쟁해요?”라고 대답했다.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이 정신상태. 이것이 그동안 나를 자꾸 수면 아래로 가라앉도록 만들었다. 언제쯤 정상 모드에 돌입할 것인가.
이제 다시 시작해 보자. 새봄맞이 심신 재무장! 지난주 서류 합격, 압박 면접을 무사히 통과하고, 오늘 내가 작년 주말 일 년 동안 근무했던 공공도서관 평일 비정규직 근로에 합격했다고 연락이 왔다. 오전 내내 휴대폰을 평소보다 더 자주 들여다보았다. 사서 자격증 소지자로 가산점을 확보한 나이지만 혹시나 동일 조건이면 나이에서 밀릴까 봐 합격 통보 문자를 받기 전까지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오전 11시 49분. 드디어 "OO 도서관 사서 도우미 채용에 지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종 합격하셨음을 알려드립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문자가 도착했다. 오후에는 해당 도서관 채용 담당 주무관이 직접 전화해서 합격 소식을 재차 전해주었다. "선생님, 문자 받으셨죠? 축하드려요. 3월 4일에 뵙겠습니다."라며. 그러니 이제 규칙적이지 않을 수 없고, 낮잠도 잘 수 없다. 절로 피곤해서 불규칙한 수면 습관도 고칠 수 있겠지?
포기는 배추 셀 때나 쓰는 것!
에잇, 또 하루 만에 무너졌다. 어제의 굳은 결심. 새벽 기상, 새벽 독서 다 불참했다. 눈은 떴으나 몸은 침대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어제 집에 있는 스태퍼를 20분 정도 한 게 문제였나? 허리가 묵직한 것이 애써 온 힘을 다해 일으킨 나의 몸뚱아리는 발바닥까지 저릿했다. 작년 12월 악화한 디스크 증세로 그나마 하던 걷기 운동도 하지 못하다 보니 우리 외동이 임신했을 때 몸무게를 찍고야 말았다. 그래서 일요일엔 실내 자전거, 월요일엔 열심히 걷고, 어젯밤엔 거실에 있는 스태퍼까지 하고 잤더니 수면시간은 조금 당겨졌지만 결국 허리가 또 말썽이다. 칫! 그렇다고 내가 이번에도 포기할 줄 알고? 기어이 외출했다. 어떻게든 걸을 일을 만들어 보려고. 그리고 이렇게 병원비 대신 도심에 나와 은행 볼일 보고 카페에 앉아 글도 쓰고 있다. 자꾸 가라앉지 말자. 아직 수면 위로 완전히 떠오르지도 않았으니. 조금만 더 힘찬 발차기로 수면 위로 떠오르자.
여고 동창을 만났다. 정확하게는 초, 중, 고 모두 같은 학교를 나온 동창이자 절친이다. 그 애는 아직 미혼이다. 그간 비혼주의자로 알고 있었는데, 어제 만나보니 또 그건 아닌 것도 같고.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처럼 사람의 마음은 참 알 수가 없다. 절친이긴 하지만 그 애는 미혼 직장인이고 나는 전업주부라서 서로 관심사도 다르고 운용할 수 있는 시간도 달라서 서로 연락도 자주 하지 못했다. 이번 만남으로 9년 만에 얼굴 보는 거였는데 서로 한눈에 알아볼 만큼 어색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야! 넌 정말 하나도 안 변했다.”라며 연신 미소를 띤 채 근황 이야기를 이어갔다. 올해 1월부터 무급 휴직 일 년을 신청하고 자기 계발에 힘쓰고 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고 서두를 꺼내더니 나의 계속된 추궁에도 즉답을 피하던 친구는 헤어지기 전 조심스럽게 현재 열심히 도전하는 새로운 일은 ‘연기’라고 했다. 원래 방송국 PD를 꿈꾸던 친구였는데 본업은 그와는 별로 상관없는 직종에서 일을 하고 있어서 그냥 안정된 삶을 추구한다고만 생각했었고, 그런 그녀가 부러웠었다. 시어머니, 남편, 아이 사이에서 희생과 봉사를 강요당하는 인생을 살고 있는 나와는 달리 본인의 의지에 따라 언제든 삶의 방향을 바꿀 수도 있고 주체적으로 살 수 있으니까. 그런 그녀가 삶의 의미가 없어서 새로운 일을 시작했고, 그 일로 가슴이 뛸 만큼 기뻐서 계속 잘 맞으면 지금 다니는 직장을 그만두고 연기일을 진심으로 업을 삼아 볼 계획이라니. 용기가 부럽기도 하고 비정규직을 연연하는 나로서는 걱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연기하는 일이 자신을 요즘 살게 하는 이유라고, 연기 레슨을 받으며 더 좋은 발성을 위해 따로 돈을 내고 지도받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내게 “일단 시도해 보는 게 중요해. 처음에는 정말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도 일단 해보고 나면 진짜 내가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거든.”이라는 말을 건넸다.
그렇다. 물은 100°C가 되어야 끓는다. 아무리 99.9°C여도 끓지 않는데, 내가 늘 그런 식으로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 같다. 그 남은 0.1만큼의 온도를 높이지 못해 사법시험도, 공인노무사 시험도, 공무원 시험도 합격에 이르지 못했다. 대입에 떨어질 게 뻔한 서울대에 무모하게 지원해 놓고 “나 수능 봤는데 서울대 떨어졌잖아.”와 똑같은 말이다. 아무리 어려운 시험도 어차피 도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1차라도 붙는 성의는 보였어야 했고, 안정된 생활을 위해 최대한 몰입하여 될 때까지 노력했어야 했다. 열심히만 한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다. 열심히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성과를 내는 것은 소수이다. 내가 그 소수의 집단에 속하려면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결국 해내는 사람들의 법칙』을 쓴 앨런 피즈와 바바라 피즈 부부는 ‘RAS(Reticular Activating System, 망상활성계)에 특정 아이디어나 목표를 설정해 두고 긍정적 사고를 이어가면서 바라는 것을 구하고, 구하고, 구하자’라고 강조한다. 목표를 분명히 세웠다면 행동으로 옮기고, 긍정 확언을 입으로 말하다 보면 끌어당김의 법칙인 RAS가 작용한다는 것. 그러니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포기는 배추 셀 때만 쓰자.
*이 글은 2024년 2월 24~28일에 걸쳐 한 단락씩 작성한 글을 잘 버무려 2/29일에 한편으로 완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