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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나의 힘

-어릴 적 가난은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다

by 네모

지금 생각하면, 그게 바로 '모욕감'이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우영우가 떠올리려 애썼던 '뿌듯함'이란 단어와는 정반대쯤 떨어진 위치에 놓인 바로 그 단어. 모욕감, 수치심.


나는 지방의 소도시에서 태어났다. 엄마 말씀에 따르면 당시에는 아주 잠깐 아버지의 직업이 공무원이기도 하셨단다. 요즘으로 치면 '한국농어촌공사'의 출장소쯤이 아니었을까 싶다. 징수관련 사건에 연루되어 그만두셨다는데...암튼 그때부터였나보다. 본격적인 가난이 시작된 게. 어릴 적 내가 기억하는 풍경은 어느 주택의 출입문이 보이는 쪽에 단칸방에 살았다. 부엌은 신발을 신고 내려갔다 올라갔다 해야 하는 6,70년대 한옥 구조였던 것 같다. 출입문도 나무문. 게다가 개집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내가 개를 무서워하진 않았었던 것 같다. 흔히 '누렁이'라 불리는 똥강아지가 있었던 것 같은데...나와 남동생은 자주 그 강아지를 쓰다듬곤 했었다. 아직도 뭔가 그 누렁이의 냄새와 촉감이 느껴지는 걸 보면.

또 조금 자라서는 맨드라미가 가득 핀 꽃밭이 있는 마당 깊은 집에 살았던 기억도 있다. 그러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도청소재지가 있는 지역으로 이사했다. 당시는 서슬퍼런 군인들이 정권을 잡고 있던 시절이었다. 내가 사는 집은 '축대'-토사(土砂)가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쌓아올린 벽-라고 불리는 요즘의 옹벽같은 곳의 아래에 위치한 허름한 주택 단칸방에 세들어 살았다. 비가 많이 오는 날에는 천장에서 물이 새 방에 세수대야를 받쳐두어야 했다. 1980년대에도 이런 풍경이 있다고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 집에서의 일년여쯤 이후 축대 위 고급 주택들이 즐비한 그곳, 도지사 관사가 있다는 그 곳의 한 현역 군인이 주인인 집으로 이사했다. 마치 영화 <<기생충>>의 송강호 배우 가족이 살던 반지하에서 이선균 저택으로 들어간 것처럼, 내겐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 온 그 순간이 너무 좋았다. 대문도 철문. 화단과 사자 화강암 조각상도 있었던...그 사자상에 올라가려면 주인집의 허락을 얻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평생 잊을 수 없는 모욕, 치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주인집에는 나와 동갑내기 여자애가 큰 딸이었고, 갓난 아기인 남동생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교육열이 투철한 엄마 때문인지 어려운 형편에 우리 남매는 유치원도 다니지 못했다. 그래서 학교에 가는 일이 너무 좋았다. 한글을 처음 배우고 나서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처럼 너무 신기했다. 활자만 있으면 읽어대는 통에 가끔 곤란한 질문을 부모님께 마구 물어대곤 했지만. 이런 내게 교과서를 매일 읽고 또 읽고 하는 일은 신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주인집 딸인 그 아이는 아니었나보다. 그 아이와 책을 읽을 일이 있었는데 글자를 더듬더듬 자주 틀리게 읽었다. 어린마음에 집에 와서 엄마에게 제법 큰소리로 "엄마, ㅇㅇ이는 책을 잘 못 읽고 자꾸 더듬더듬해"정도로 흉을 봤던 것 같다. 잠깐의 우쭐은 딱 거기까지였다.

저녁을 먹고 있는 난 내게 그 아이의 엄마, 즉 주인집 아주머니가 우리 집으로 와서는 잠깐 나에게 와보라고 했다. 그리고는 "네가 ㅇㅇ이에게 책을 못 읽는다는 말을 했느냐?"며, 고개를 끄덕이는 내게 자기 딸이 저녁도 안 먹겠다고 하면 울고 있으니 가서 사과하고 달래라는 것이었다. 일단 들어갔다. 그리고 그 아이의 방에 가니 벽을 보며 울먹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식식거리고 있는 거였을수도. 끔찍했던 기억이라 마치 필름사진처럼 그 장면에서 멈추어 있었다. 그리고는 결국 그 애가 계속 벽을 보며 있으니 주인집 아주머니는 내게 무릎을 꿇라고 했다. 어린마음에도 그 상황이 수치스러웠는지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이내 아주머니의 "뭐해? 제대로 무릎꿇고 사과해야지!"하는 말에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고 어느 새 손바닥을 비비고 있었다. "ㅇㅇ야,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너 글씨 잘 못 읽는다는 말 안 할게. 미안해..."라며 연신 빌었던 것 같다. 이날의 기억은 나에게 지금까지도 '가난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이후에도 나의 십대는 월세와 전세를 전전했다. 대학 3학년이 되어서야 소형 아파트를 겨우 장만해서 이사를 할 수 있었다. 그것도 엄마의 불굴의 '허리띠 졸라매기'로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법학과에 진학한 나는 이기적이고 무모하게도 사법시험을 보겠다고 선언한다. 내 집의 가난은 눈감은채 세상의 약자를 구하는 일에 힘을 보태려 인권변호사가 될 거라며. 지금 생각하면 철없고 어쩌면 위선적이기까지 한 생각이었다. 내 집 먼저 살려 놓고 공부든 뭐든 해야했다. 그게 가난한 집 맏이 특히 장녀의 바람직한 역할이었다. 그런 철없음에 신이 벌이라도 내린걸까? 나름 열심히 했다. 목과 허리의 디스크 질환까지 얻을만큼 하루 열 시간 이상 한 평 남짓한 고시원 책상에 앉아서 공부만 했는데...두 번의 사법시험에서 1차도 붙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현명한 엄마는 스스로 포기하지 않을 내게 집안 형편을 들이대며 "그만하면 됐다"며 나를 고시원에서 탈출시켰다.


어쨌든 누구나 할 수 있어도 아무나 도전하지는 않는다는 사법고시에 응시할만큼 은근 끈기가 있었던 내게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전문직 종사자가 되어야 했고, 인문계열 학과에서 전문직종이란 법조인이지 않는가. 굳이 변명하자면 그래서 더욱 열심히 살기 위해 고시에 도전을 했는데 그 시간은 결과적으로는 내 스스로를 과대평가해서 생긴 허송세월이었다. 졸업을 앞두고 과조교의 지역 인재 채용 기회가 있으니 면접이라도 보고 오라던 조언을 무시한 쓸데없는 아집. 그렇게라도 운 좋아서 그 금융업체에서 인턴 기간을 거치면서 근로소득을 맛 보았다면 아마 고시공부는 바로 접었을 텐데...

이제와 '라떼는 말이야'를 외치면 무엇하랴. 다 부질없는 일이다.


그러나 아주 그 시절 고시공부를 한 것이 아주 소득없는 일은 아니다.

그 비좁은 고시원에서 면벽수행하듯 벽돌 이론서와 각종 수험서와 싸운 경험은 지금까지 살면서 웬만한 일은 버텨내는 힘을 주었다. 웬만한 핍박에는 굴하지 않는.

그리고 소위 벽돌책이라 불리는 천 페이지 내외의 두툼한 책도 끝까지 읽어낼 수 있다. 다소 어려운 책도 비교적 많은 노력을 들이지 않고 읽는 편이다. 이른바 문해력이 잘 갖춰졌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한자어 투성이의 법률용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보니 종종 지인들이 내게 계약서의 내용에 대한 설명을 묻기도 한다.

또한, 글쓰기의 고통도 잘 견뎌낼 수 있다. 창작글이 힘들어서 남이 쓴 책만 읽던 내게 과감하게 내 얘기를 쓸 수 있는 용기를 낸 것이다. 지금 이순간도 '이렇게 내 얘기를 꺼내는 게 맞나?' 자꾸 의구심이 들어

글을 다 지워야 하나 고민하긴 하지만.


이렇듯 가난은 내게 버틸 수 있는 힘, 나아가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사춘기 우리 아이때문에 속끓이는 딸을 보면 엄마는 딸인 나에게 충고를 하신다. "ㅇㅇ이가 너처럼 고생을 안했는데 뭔 철이 들겠니?"하시며. 아마 엄마의 말씀은 '헝그리 정신'을 강조하신 거다. 하지만 엄마가 이렇게 말씀하실 때마다 마음속으로는 되뇌이곤 한다. '엄마, 우리 ㅇㅇ이는 저처럼 가난해서 겪는 고통은 겪게 하고 싶지 않아요.'라고. 내가 다시 태어나면 내 나이에 맞는 고민까지만 하고 싶다. 지금처럼 너무 철든(?) 모습으로 살아가지 않도록. 가끔 유행도 따라보고, 여행도 많이 다녀보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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