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의 연속인 나의 인생의 평안을 꿈꾸며
남편은 대기업 계열사인 해운회사에서 근무했다. 남편의 해운사는 2014년 이후 경영난을 겪다가 결국 만기일이 도래한 어음을 막지 못해 2017년 파산했다. 대기업이 하루아침에 공중분해된 것이다. 3,000명이 넘는 직원들은 문자 한 통으로 전원 해고 통보를 받았다. 뉴스에서나 보던 그 부당해고를 내 남편이 당하다니, 처음에는 듣고도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퇴직금에 위로금을 얹어 받기 했지만, 아파트 대출금과 생활비를 충당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태생적으로 가난을 경험했던 나로서는 끔찍한 그 시절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대졸자이기만 하면 경력도 나이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학습지 방문교사를 시작했다. 수포자인 나에게 수학으로 특히 유명했던 그 학습지 회사는 입사 전 교육을 믿고 나에게 사원증과 배지를 선뜻 내어주었다. 회원의 대부분은 초등학생이었다. 그중에서도 초등 저학년의 비중이 높으니 수업 지도는 걱정 말라면서, 관계자는 나를 안심시켰다. 처음에는 주3일 정도만 수업했다. 그러다 점점 과목 수가 늘어나더니, 급기야 수업 구역 조정의 명분으로 중학교 2학년에 막 올라간 남학생이 배정되었다.
'아... 어쩌란 말인가. 수포자인 나에게 이차함수라니!'
첫 수업부터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는데, 다행히 별문제 없이 수업을 마쳤다. 그런데 점점 회차를 거듭할수록 방정식으로 시작해 이차함수에 다다르니 어찌어찌 버티던 나의 실력도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어느 날부터인가, 내가 수학 실력이 달린다는 것을 눈치챈 건지 하라는 숙제는 않고, 자꾸 이차함수 문제가 이해 안 된다며 설명을 더 해 달라고 졸랐다. 하루는 열심히 풀이와 씨름하고 있는 나에게 양말을 벗는 척하더니 그 양말을 내 쪽으로 던지는 게 아닌가. 순간 문제를 잘못 풀어 그 녀석에게 무신당한다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었다. 서럽기까지 했다. 아이도 놀랐는지 살짝 눈빛이 흔들렸으나 제대로 된 사과는 하지 않았다.
"어...? 선생님께 던지려던 게 아닌데..."하며 얼버무렸다.
주택구역의 방문 수업도 내게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다문화가정이었는데, 과격한 홀시어머니를 모시고 가벼운 언어장애가 있는 배우자와 살던 베트남 엄마가 남매를 두고 집을 나갔다는 속사정까지 듣게 되었다. ADHD가 있다는 아홉 살 오빠도 일곱 살 여동생도 아무리 애를 써도 실력이 좀처럼 늘지 않았다. 영어에 한자까지 신규 과목 계약을 해야 했던 날은 양심에 찔려 마음이 불편했다.
비 오는 날이었다. 발목 미세 골절로 깁스한 발을 비닐봉지로 꽁꽁 싸매고 남매의 집을 찾았다. 현관문을 열고 뒤뚱거리며 들어오는 내 모습에 할머니가 꼬라지를 내셨다.
"아니, 선생님! 그렇게 먹고 살기가 힘들어요?"
어릴 적 내가 월세 살던 주인집 동갑내기 딸에게 무릎 꿇고 빌어야 했던 그날이 떠올랐다. 글 잘 못 읽는다고 뒤에서 흉을 봤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때 그 비참했던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방문교사로 보낸 나의 몇 달은 고통스러웠다. 돌이켜보면 내가 살아낸 세상은 연륜으로도, 머리로도, 상식으로도 이해 못 할 것 천지였다. 아파트와 주택을 오가며 빈부격차와 교육 수준의 차이를 온몸으로 체감하면서 나는 나의 모자란 밑동을 들켜버린 심정이었다. 수업만 하기도 벅찼는데 매일 몇 건씩 할당량을 채우는 것도 고역이었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고 했다. 아무리 힘들었어도 방문교사 일은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다.
20대 때부터 어려운 집안의 장녀임에도 인권변호사를 꿈꾸며 사법고시를 준비했고, 그러다 IMF여파로 눈을 좀 낮춰 공시를 준비했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 부모님께 부담을 준다는 생각에 온전히 공부에 매달리지도 못했다. 결국 나는 몇 년간의 수험생활에도 합격하지 못했다. 더 이상 집에 손을 내밀 수 없어 취업했다. 영어 교재를 유선 전화로 파는 영업이 나의 첫 직장이었다. 중견 금융보험업계에서 온라인 보험을 판매하는 텔레마케터로도 일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전화로 고객을 응대하다 보니 턱 근육이 늘어나서 입을 벌릴 수 없는 황망한 증상도 앓아야 했다. 그렇게 우울했던 시절,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당시 대기업인 해운회사에 다니던 남편은 나의 키다리 아저씨(실제로 키가 180센티미터다)가 되어 줄 거라 믿었다. 말수가 심하게 적고 홀어머니에게 너무 잘하는 효자라서 썩 맘에 들어하지 않았던 부모님, 특히 엄마의 결혼 반대에도 스물여덟의 나는 도피하듯 결혼을 선택했다.
30대는 출산과 육아의 산맥이었다. 전업주부로 만 40세가 되자 믿었던 남편이 실직했다. 내 팔자도 참 기구하다 싶었다.
남편은 실업급여를 받는 8개월 동안 인생 최대의 휴식을 보냈다. 방문교사를 시작한 나의 근무 시간이 들쭉날쭉했기에 온 가족 해외여행 한 번을 못 가고 지나갔다.
신랑은 파산한 전 해운회사를 인수했다는 중견 기업의 계열사로 재취업했다. 역시 기술이 최고다. 사무직군이긴 하지만 엔지니어 출신이라 선박 관련 기술 지식이 해박하다 보니 동종 직군에 다시 취업할 수 있었다. 다만 근무지가 부산이다 보니 부득이하게 주말부부 신세가 되었다.
졸지에 제대로 맞벌이 부부가 되자, 이번에는 아이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아이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자 엄마 손을 덜 탄 티가 역력했고, 아이를 못살게 구는 친구까지 우리 가족의 빌런으로 등장했다. 온몸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자식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나는 학습지 교사를 내려놓았고, 경기도에서도 변두리로 아이와 함께 이사했다.
도심지역의 인프라를 누리다가 농촌지역으로 오니 처음에는 답답하고 힘들었다. 그러다 거주지 인근 공공도서관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자주 들러 책을 보고 그곳에서 서가지킴이 봉사도 하게 되었다. 우연히 '사서도우미' 채용공고를 보고 지원했는데, 서류심사와 면접을 통과해 도서관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문헌정보학과 학점은행제를 통해 학위를 따고 정사서 2급 자격증을 취득했다. 2018년 도서관 근무를 시작으로 2022년 잠시 쉬었다가 올해에는 다시 주말 근로자로 일하고 있다.
이제야 내 몸에 맞는 일을 찾았다. 책을 좋아하고 독서를 즐기는 내가 책을 가까이 할 수 있으니 즐거운 마음으로 일한다. 정식으로 공무원 시험을 치르고 임용된 직원이 아닌데다 주말 기간제 근로자이다 보니 고용 불안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있다. 무기계약직으로 계속 근로만 가능하면 좋겠는데, 늘 예산이 문제다.
내년에는 평일 근무하는 형태로 일하고 싶다. 간절히 원하면 하느님도 들어주시려나. 평소에 냉담하던 신앙에까지 기대어 본다.
"제발 내년에는 주간에 일하게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