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 살지 못하는 저주를 푸는 법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 리뷰
2004년 영화 개봉 당시 기억
빡센 노동으로 마음이 거칠어져 있을 때였다. 밤에 코엑스 메가박스에 갔다. 몸은 그날의 노동으로 무거웠지만, 나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란 전제를 포기하고 싶지 않은 객기(?) 같은 것이 있었다.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되었다.
쉬지 않고 내리는 세찬 비 같은 직장의 템포에 길들여져 가랑비 같은 영화의 느린 템포가 낯설었다. 좁은 의자에서 몸은 물먹은 솜처럼 천근만근이었고, 눈꺼풀이 아래로 내려오면 올려보내느라 애를 썼다. 10분쯤 지났을 때 영화관을 나왔다. 수치스럽게 잠을 자는 대신 영화가 재미없다고 왜곡하고는 도망을 택했다. 영화관을 나와 술 마시러 갔을 거 같지만, 그 기억은 못 찾겠다.
2023년 12월 넷플릭스
19년 동안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나에게는 수면제 같은 영화였다. '모든 기억은 왜곡'이란 명제에 대해 생각한다. 똑같은 영화를 19년이 지나서 보니 19년 전에 왜 영화를 보기 힘들었는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일상을 살아내면 쌓일 수밖에 없는 굳은살 탓이었다.
사소한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느끼는 감각을 잃어버리고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았다. 내가 아닌 나로 사는 대가로 블링블링한 것을 소유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내 품에 있었지만, 마음은 눈이 보지 못하는 것을 갈망했다. 내가 아닌 나로 사는 것을 잘 견디지 못했고 뛰쳐나왔다. 삶의 방향 키를 120도쯤 틀었다. 나는 이를 '발광'으로 말하곤 한다. 발광 덕분에 더 좋은 차와 더 큰 집 등을 잃었다. 대신 돈으로 살 수 없는 '느끼는 감각'을 서서히 얻었다.
돌이켜 보면 그 방향 키를 잡기 전이 저주였을까, 방향 키를 돌린 순간이 저주였을까. 아무튼 저주가 아니었다면 나는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않았을 것이다. 소피가 노파가 되는 저주에 걸리지 않았다면 가업으로 물려받을 모자 가게에 머물렀을 것처럼.
영화 이야기
영화 이야기를 쓸데없는 주변부로 시작하는 이유는 인물들이 자기답게 살지 못한 저주에 걸렸지만, 자기답게 살려는 사람들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모두 저주에 걸린다. 하울, 소피, 하울의 심장인 불 캘시퍼, 순무 허수아비도. 이들은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저주에 걸렸다.
하울은 국왕의 참전하라는 명령이 마뜩잖지만, 자신의 성을 지키느라 매일 싸운다. 전쟁하기 싫은데 매일 싸우며 자신을 소진한다. 어린 소피는 영문도 모른 채 황야의 마녀의 저주로 노파가 되어 집을 떠나 하울의 성에 살게 된다.
저주란 무엇인가?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 수 없는 것이다. 원하는 환경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에서 산다. 환경의 거침과 부드러움을 구별하는 기준은 원하는 것인가 아닌가에 있다. 내가 원한다면 어떤 환경이라도 푹신한 소파 같을 것이다. 반대로 원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이 보기에 아무리 좋은 환경도 언제 의자 다리가 부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딱딱한 나무 의자 같다.
소피가 저주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처음에는 수동적이다. 하울의 성을 만나서 노파간 된 저주에 안착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우리의 모습이다. 이를테면 원하는 직장에 들어갔을지라도 일하다 보면 나를 내려놓아야 할 때가 많다. 이럴 때 우리는 대체로 가면을 쓰고 수동적이 된다. 처음에 어색했던 가면이 익숙해지면 진짜 내 모습이 점점 기억이 안 난다. 가면을 쓴 모습이 진짜 내 모습이 되어간다. 이 모습이 저주가 아닐까.
다행히도 저주를 푸는 시기가 누구에나 온다(고 믿는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를 외치는 때가 한 번씩 온다. 서른에 올 수도 있고, 마흔에 올 수도 있고, 정년퇴직 후에 올 수도 있다. 사람마다 저주를 자각하는 시기가 다르지만 확실한 건 반드시 자각의 시기가 온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이 시기가 일찍 왔을 뿐이다. 무언가를 보고 경험했을 때 느끼지 못하는 거친 사람이 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일단 자각하면 소피와 하울처럼 모험을 떠날 수 있다. 모험을 하는 사람은 그 순간에 몰입해서 모험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모험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처럼 그들을 지켜보는 구경꾼이다.
하울이 순응하려 할 때, 저주에 굴복하려 할 때, 뜻밖에 소피는 반기를 든다 소피는 마법을 배운 적 없지만 가장 큰 마법을 부린다. 판이 바뀔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이 희망이 하울에 대한 사랑에서 나왔든, 노파가 되어 잃을 게 없기 때문이든, 마법사가 수련해서 습득한 기술보다 더 힘이 세다.
저주에 걸린 소피의 힘의 근원은 작은 것을 돌보는 따뜻한 심장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물리적으로 따뜻한 심장은 숨을 쉬는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 사람을 다치지 않게 하는 것,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에 No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다. 저주를 푸는 것은 팔딱이는 따뜻한 심장을 가진 사람만이 해낼 수 있다.
소피는 마법이 할 수 없는 것을 해내는 구원자가 된다. 옳다고 믿는 힘, 한 사람에게서 선을 보고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힘이 해피엔딩으로 이끈다. 저주에 걸렸지만 나를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저주를 푸는 힘이고 해피엔딩이라고 말하는 영화다.
인생을 해피엔딩으로 바꾸는 것이 어렵고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아는 터라 이 영화는 동화로여진다. 하지만 동화의 결말은 터무니없어도 어린 시절 그랬듯이, 가슴에 작은 불씨를 남긴다. 이 불씨를 꺼버릴지 마른 장작을 가져다가 활활 타게 만들지는, 내 손에 달려있다. 마법이 인간을 이길 수 없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