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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냉이 Nov 01. 2016

Y2K의 추억

막연한 불안감에 용감하게 맞서기

며칠 전, 기적처럼 칼퇴근 정시퇴근을 했습니다. 집에 돌아와 간단한 집안일을 마치고, 꽤나 오래전에 사두었던 소설을 읽을 생각에 들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이것저것 스크랩을 하고 있는 제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 나는 시간이 주어져도 저녁을 즐길 능력을 잃었구나!'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밀레니엄 공포

유년기에 2000년, 이른바 '새천년'을 맞았습니다. 새로운 100년을 맞는다는 '신세기'와는 다르게 새천년은 묘하게 그럴싸한 공포를 내세우고 있었습니다. 추억의 단어 Y2K가 그것입니다. Y2K는 프로그램 메모리를 줄이기 위해 두 자리로 연도를 저장한 것이 오작동을 일으켜 전 세계에 대혼란이 일어난다는 시나리오입니다. 허무맹랑하게 느껴지는 종교적인 예언과 달리 나름 과학적(?)이라서 있어서 설득력 있게 느껴졌습니다. 컴퓨터의 오작동으로 핵전쟁이 일어난다는 둥 Y2K를 소재로 한 세기말적인 콘텐츠도 많이 등장했습니다. 


그 날이 다가오자 컵라면, 생수, 통조림 등을 사재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행여 일어날지 모르는 일에 대비해서 되도록 유통기한이 긴 비상식량을 쟁여놨습니다. 손전등과 건전지는 물론, 세계적인 비상상태에 대비해서 가스버너를 사두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대망의 새천년이 시작되던 날, 20세기의 마지막 날에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새천년을 맞았던 기억이 납니다. 두려움은 온데간데없고 사람들은 목이 터져라 환호했습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비상사태를 대비해서 평소에 <모험 도감>을 열심히 읽어두었던 저는 공부한 것을 써먹을 데가 없다는 사실에 실망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며 잠들었습니다.


Y2K의 공포와 '헤어진 후에'
지구멸망을 대비해서 열심히 읽었던 <모험도감>



지식 사재기

밀레니엄 공포는 끝났지만 여전히 생존의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신 그 범위가 개인의 생존으로 줄었습니다. 무한 경쟁사회에서 나만 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입니다. 인류는 무사한데 나만 멸망할 것 같아서 두렵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자기계발-개발에 집착하게 되나 봅니다. 


페이스북 '저장'을 열어보니...


고백건대 저는 열심히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열심히 하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어떡하면 노력 없이 돈을 벌지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무지 쉬운 길은 안 보이고 매일 밤 불안에 시달립니다.


이러다간 평생 열심히 살아야겠는데?


마음이 편치 않다 보니 소설은커녕 짧은 에세이 한 편도 집중해서 읽기 어렵습니다. 그래서인지 업무와 관련된 글을 읽거나 회사에서 풀리지 않은 일을 고민하다 저녁을 보냅니다. 결국 새벽을 맞습니다.


저의 페이스북 '저장' 란을 열어보니 2,700여 개의 링크가 저장되어 있었습니다. 뉴스피드를 보면서 나름대로 중요하거나 다시 읽어볼 만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저장해둔 것입니다. 기술적인 내용도 있고, 시사적인 것도 있고, 간간히 귀여운 동물이나 웃긴 영상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한 번만 읽고 저장만 해두거나, 읽지도 않은 채 잊혔습니다.


당장 먹지도 않을 통조림을 불안감으로 사재기하던 사람들처럼, 필요 없는 지식을 막연한 불안감으로 사재기하듯이 잔뜩 저장만 해 두고 있었습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공포였습니다.


그러다 엉뚱한 곳에서 용기를 얻었습니다.


죽지 뭐

약 2008년에 인터넷에서 유행했던 만화입니다.


K.P 작가의 '발상의 전환' 시리즈 중, <개미와 베짱이>


원작 보러 가기 : http://blog.daum.net/kpk3196/6220105


처음에 이 만화를 봤을 때 예상 못한 베짱이의 대답이 너무 웃겨서 데굴데굴 굴렀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보니 사뭇 느낌이 다릅니다. 베짱이에게서 자신감을 넘어 어떤 기백이나 용맹마저 느껴집니다.


이 만화의 베짱이를 보면 유튜브로 내가 좋아하는 밴드의 라이브를 듣거나 말랑한 소설을 읽을 때, 돈 안되는 글을 쓸 때, 여러가지 비생산적인 취미활동을 하면서 나만 경쟁에서 뒤쳐지는 것 같아서 불안했던 시간이 바보처럼 느껴집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겨울은 올 수도 안 올 수도 있습니다. 아니 언젠가는 올 것입니다. 그렇다고 겨울만 바라보며 사는 개미가 되거나 오늘만 사는 베짱이가 되기 보다는, 겨울도 대비하면서 지금의 행복도 누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는 지식 사재기를 멈추기로 했습니다. 꼭 필요한 것에만 집중하고 나머지 에너지는 비생산적인 활동에 쏟을 것입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삶을 더 풍요롭게 가꿔보겠노라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글을 씁니다. 이렇게 비생산적인 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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