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과 방송을 분리하자
투명한 물컵 두 개에 한 개는 깨끗한 물을 담고, 다른 컵에는 휘발유를 넣는다면 언듯 보기에 두 개의 컵은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냄새를 맡아보고 만져보면 투명한 액체라는 모양 세만 비슷할 뿐 완전히 다른 물질이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다. 이번에는 두 컵에 있는 물과 휘발유를 한 컵에 담아본다. 그리고 이 혼합물을 ‘물기름’이라고 부른다고 가정해보자. 물기름은 마실 수도 없고 차에 넣어 연료로 사용할 수도 없다. 물과 기름은 성질이 완전히 달라 섞이지 않기에 ‘물기름’이라는 개념은 성립되지 않는다.
1990년대 말게 ‘통방융합’ 또는 ‘방통융합’이라는 단어가 생겨났다. 통신과 방송이 융합한다는 것인데,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방송통신’이라는 단어로 변하다가 ‘방송통신위원회’가 시작되면서 ‘방송통신’이라는 단어가 고착화되었다. 이후 7년이 지나자 ‘방송통신’이라는 단어는 너무나 익숙한 단어가 되어 이제는 마치 원래 있었던 단어처럼 자연스레 느껴진다.
이 익숙한 방송통신이라는 단어는 앞서 설명한 ‘물기름’과 다르지 않다. 자세히 보지 않는다면 통신과 방송은 물과 기름처럼 비슷해 보인다. 두 개다 각종 전자장비를 사용하고 유선이나 전파를 이용한다. 이것이 방송과 통신이 융합되어야 할 이유일까?
원래 통신기술과 방송기술은 많은 차이가 있었다. 예전의 통신은 유선을 통해 음성신호를 주고받는 기술이 주였다. 대표적인 예가 유선 전화이다. 예전의 방송은 공중파를 통해 아날로그 TV나 라디오 신호를 보내는 기술이었다. 기술이 발전하다 보니 방송처럼 전파를 이용하는 휴대폰이나 무선 데이터 통신 기술이 생기고, 기술이 발전하다 보니 케이블을 이용하는 유선 데이터 방송과 무선데이터 방송도 생겨서 예전처럼 통신 기술과 방송 기술을 유무선 여부로 구분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렇다고 방송과 통신을 융합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 통신과 방송의 근원적인 차이는 기술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통신의 본질은 원시시대의 북소리부터 봉화나 파발마에 이르기까지 원거리의 사람들이 서로 약속된 기호나 도형, 문자 등을 통해 쌍방 간의 의사소통을 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소통방식이 마르코니가 무전을 발명하면서 전파를 이용하게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통신의 본질이 전파의 이용 여부가 아니라 쌍방향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점이다.
방송의 역사는 전파를 이용한 라디오에서 시작하여 영상을 이용하는 TV로 옮겨갔지만 매스컴이라는 개념에서 본다면 200여 년 전의 신문으로부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종이와 전파라는 차이가 있지만 신문과 방송은 단방향의 매스컴이라는 속성이 본질이다. 쌍방향과 단방향의 차이는 물과 기름처럼 본질적으로 섞일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설령 방송에서 약간의 쌍방향 인터렉티브가 구현된다고 해서 방송과 통신이 같은 개념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방송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콘텐츠이고 저널리즘이지 방송기술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통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쌍방향의 커뮤니케이션이지 저널리즘이 아니다. 방송에서 만든 콘텐츠가 통신을 타고 나간다고 통신이 방송이 될 수 없다. 그냥 통신의 수많은 콘텐츠 중 하나일 뿐이다. 이렇듯 본질적으로 다른 통신과 방송이 융합이 아니라 병합되어버리자 방송이 본연의 임무인 콘텐츠나 저널리즘보다 통신의 규칙(트래픽)을 따라가기 시작했고 각종 낚시제목으로 본질을 잃어버림으로써 위기가 시작되었다.
방송이 생존하는 방법은 통신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인 콘텐츠와 저널리즘에 집중해야 한다. 이번 ‘세월호 사건’을 보면 jTBC가 저널리즘에 충실했을 때 얼마나 빠른 시간 동안 성장할 수 있는지 증명하였다.
그저 섞어놓는 다고 융합이 아니다. 물리적, 화학적 구조적으로 결합되지 않는다면 융합이 아니라 병합일 뿐이다. 방송과 통신은 두 사업의 성격이 달라 융합할만한 사업이 아니다. ‘방송통신’이라는 단어로 본질이 다른 두 산업을 억지로 묶어놓지 말아야 방송은 방송대로 통신은 통신대로 독립적이고 조화롭게 발전해 나갈 수 있다.
통신과 방송 분리를 許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