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D 문화 브로셔 Sep 21. 2022

대학살의 신 리뷰

소통을 잃은 인간들의 치졸함

인간이 얼마나 사소한 것에 크게 집착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얼마나 치졸해질 수 있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인간을 작게 만드는지, 감정을 극복해내지 못하면 인간이 얼마나 왜소해지는지를 보여준다. 인간의 이성이 집단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커다란 잘못을 만들어내는 부작용이 있다면, 인간 개인에게는 감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삶을 부끄럽게 만드는지를 보여준다. 이성이라는 것이 그나마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줄 수 있다. 이성이 만들어낸 교양과 문화적 경지는 인간을 고귀하게 지켜준다. 그러한 이성을 놓치는 순간 인간은 동물만도 못한 치졸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소통에 대한 맹신도 이 영화는 아스라히 깨뜨려버린다. 만나서 이야기해야 한다는 얘기도, 소통이 부족하다는 얘기도 결국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점점 서로의 골은 깊어져가며 관계가 점점 망가져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 비판하고 있다.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보자는 것도, 솔직해지면 솔직해질수록 감정의 골만 깊어져간다. 결국 소통의 끝은 파탄이었다. 이것이 소통의 부족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더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더 소통했다면 해결될 수 있었을까? 근본적으로 대립할 수 밖에 없었던 양쪽 부부의 상황과 차이는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서로를 해치는 칼이 될 수 밖에 없으리라.

소통이 안 되서 그렇다고 생각하고 소통을 더 해야 된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에는 파시즘적인 강제주의가 숨어있다. 마치 설득을 더 했어야 한다고 얘기하는 것과 같다. 소통을 더 하라고 하든 설득을 더 하라고 하든 그 기반에는 자신이 옳다라는 확신이 깔려있다. 소통을 더 하면 옳은 것이 밝혀질 것이라는 확신이 깔려있다. 그냥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주는 것은 소통으로 되는 일은 아니다. 소통은 있는 것을 조정하거나 왜곡하는 단계로 작동할 확률이 높다. 소통을 의견을 듣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합의가 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자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합의가 되야 소통이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 바로 그들이 전체주의자요 파시스트다.


어쩌면 인간의 존엄성은 적절한 관계에서 조절했을 때 지켜질 수 있다. 적절한 숨김과 가리움의 불소통은 우리를 평화로 이끌 수도 있다. 인간들은 본연적으로 서로 차이를 갖고 있다. 그러한 차이들은 드러날수록 감정적으로 거리감을 만들어낸다. 솔직하게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고, 그것을 인정하며 그러한 차이 속에서 서로 융합되고 평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현실은 매우 치졸하며, 차이를 증오하고 배격하는 마음가짐들이 산처럼 널리 펼쳐져있다. 그러한 현실 속에서 이상적으로 차이를 드러내고 인정하자고 해봐야 그런 시도를 한 사람은 쓸데없는 불안과 불편함을 일으키는 사람으로 배격될 뿐이다. 차이를 드러낸 후에 인정하는 단계로 들어서기 전에 이미 대화는 종결되고, 그것을 시도한 사람은 차이를 드러내서 불편함만 야기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상호 인정의 소통과 정답을 찾으려는 소통은 정반대의 길을 걷기 마련이다. 그 두가지 소통은 철학적 기반이 완전히 반대되는 것에 기반하고 있다. 다원주의와 일원주의가 서로 맞서고 있으며, 다원주의자들간의 소통과 일원주의자들간의 소통은 가능할 수 있으나 다원주의자와 일원주의자의 소통은 불가능하다. 세계에는 그야말로 다양한 사람들이 있으며, 그 다양함만큼이나 다양한 생각과 철학들이 존재한다. 그것을 확실하게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소통은 우연에 기댈 수 밖에 없으며, 그러한 우연에 대한 경험은 자신의 신념이 부정확함에도 강화하게 만든다.     


세계가 언어로 이루어져있다면 실제 세계에서 차지하는 중요성과 언어적 강도와의 관계가 있다. 실제 세계에서의 중요성과 언어적 강도가 항상 서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언어적 강도는 질적인 면보다 양적인 면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 많이 이야기되는 것은 더 중요한 것처럼 착각을 일으키기 쉽다는 것이다. 많이 이야기되고, 강하게 이야기된다고 진리에 가까운 것도 아니고,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다만 인간은 언어의 세계 속에서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각자의 언어 경험으로 축적된 착각 속에서 타인의 생각과 언어를 규정하고 그러한 규정 위에서 자신의 발화가 펼쳐지게 된다. 그러한 발화들은 서로 맞닿을수가 없다.    

  

단순한 말싸움처럼 보이는 이 영화는 세계의 소통 불가능성 그리고 언어가 항상 부조리함에 머물 수 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인간이란 그러한 불명확하고도 다름의 바다 위에서 흔들리며 겨우 떠있음으로 삶을 이어가는 것이다. 인간은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바다 위에서 굳건하게 서있고자 노력하면 바다로 빠져들기 쉬우니 헛된 꿈을 꾸지는 말아야 할 일이다.     

작가의 이전글 애비규환 리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