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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D 문화 브로셔 Dec 26. 2019

공포심에 영혼을 잃어버린 속물들

영화 속물들

일부러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사건들이나 전개되는 방식이 꽤나 진부하다. 이미 어디선가 한 번쯤 본듯한 느낌이 계속 들었다. 극 내용에 나오는 대로 패스티쉬를 이용한 꼴라쥬 영화인가 싶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부하게 반복되는 이야기일지라도 다시금 되뇌게 하는 부분이 분명 있긴 했던 영화였다. 전체적인 구조나 틀이 꽤나 짜임새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분 부분 비어있는듯한 느낌에 뭔가 아쉬움이 남는 영화였다. 기본적으로는 스토리 라인 중심이라기보다는 캐릭터 중심의 전개로 보인다. 여주인공과 그 친구의 사연 얘기는 반전이라고 할 수는 있겠으나 이미 어디서 본듯한 내용이라 새롭지는 않다. 미술관의 부정이나 그에 대항하는 직원들의 모습은 너무 일차원적으로 그려져 있어서 실소가 나오긴 했다.      


팝아트에 대한 조소적인 시각은 내 취향과 비슷해서 꽤나 통쾌했다. 물론 감독이 그렇다고 팝아트에 대한 반대적 입장인 것도 아닌듯하다. 예술 전반에 대한 조소로 봐야 되지 않을까 싶긴 하다. 표절을 문제 삼은 작가의 작품 자체가 고호의 작품을 패러디한 작품이다. 표절의 경계가 대체 어디냐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던 게다. 원 작가의 작품을 그대로 그려놓고 제목을 표절로 적었다면 그 원 작가의 작품 자체가 표절이라는 얘기 아니겠는가. 그보다도 여주인공 자신은 전혀 그림을 잘 그릴 능력은 없고 공장처럼 다른 사람을 시켜서 다른 작품을 똑같이 그리도록 하고 그것을 작품이라고 내거는 것이 문제 제기의 본질이다. 당연히 조영남 사건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조영남이 아이디어만 내놓고 조수가 만들어서 내놓은 작품이 조영남의 것이냐의 문제였다. 현대 미술계에서 공장처럼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은 대작 논쟁을 만들어낼 거리조차 안 된다. 예술에서 표절은 이제 도덕적인 논점이 아니다. 표절은 그저 법적으로 저작권료를 지급하느냐 마느냐의 경제적인 문제이다. 작가가 직접 만든 작품만이 예술인지의 논쟁도 이미 끝난 지 오래다. 영화에 나온 대사에 나온 뒤샹이 이미 끝내버린 논쟁이다. 현대 미술에서의 미학적 전개가 아직 대중적으로 널리 전파가 되지 않은 탓에 아직 르네상스적 미학적 사고로 판단하는 대중들이 존재할 뿐이다. 내가 팝아트에 대해 분개하는 것은 팝아트의 근본적인 대중 근접적인 미학에도 불구하고 작가들의 자신의 지위에 대한 사고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모순이다. 팝아트는 고급 예술과 대중예술의 벽을 허문 일이고, 대중들의 예술적 작품과 전문 예술인의 작품이 서로 예술적인 고하를 매길 수 없다는 메시지를 던져준 사조이다. 그럼에도 팝아트 작가는 여전히 기존의 전문예술인의 특수한 지위를 누리려고 한다. 팝아트의 형식만 취하고 그 원래 정신은 내다 버린 것이다. 그래서 팝아트 작가는 어쩌면 이 영화의 여주인공처럼 근본정신은 사라지고 그 속물적인 욕망만 채우려는 인물과 딱 맞아떨어지는 캐릭터가 아닌가 싶다. 그 점에서 이 영화가 주는 통쾌함이 있었다.     


다시 여주인공의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여주인공은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만큼 그 힘든 시절에서 벗어나고픈 욕망이 강력했을 것이다. 그 욕망의 강렬함만큼 다시금 그 시절과 같이 어려운 상황으로 빠져드는 것에 대한 공포심 또한 매우 강렬하다. 그래서 어떠한 고귀한 다른 가치는 따질 여유가 없다. 그녀에게 중심이 되는 것은 그러한 공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인간의 제일 욕구가 안전 욕구인데 그렇게 공포심이 강렬할 때 그러한 공포에서 벗어나는 것이 제일의 욕구가 되는 법이다. 영화 제목처럼 그렇게 속물적인 욕망이 정말로 강렬한 사람이란 단순히 속물적인 사람의 속성이 있다기보다는 물질적인 것을 통한 고통을 처절하게 체험함으로써 그것에 대한 공포심이 강력하게 각인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래서 어려서 가난하게 힘들게 살았던 사람은 그러한 가난을 처절하게 미워하고 멀리 하려 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처절하게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기울임에 따라 물질적인 성공을 이뤄내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세칭 성공한 사람들 중 누군가는 어려서 힘들게 자라옴에 따라 가난한 상태에 대한 공포심이 극심했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자신의 물질적 손해가 발생하는 일을 용납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다른 가치들을 추구하기에는 그러한 우선되는 물질 상실에 대한 공포가 그를 사로잡았는지도 모르겠다. 공포가 극심하면 불필요한 정도로 그 대상에 대해 조심하게 되고, 그 대상과 비슷한 무엇인가만 보아도 멀리하고 없애려 할지도 모르겠다. 속담에 자라에 놀란 가슴 솥뚜껑만 보아도 놀란다고 하지 않았던가.     


대한민국에서 공포에 사로잡힌 대표적인 케이스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레드 콤플렉스가 아닐까 싶다. 전쟁을 통한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심은 내면 깊숙이 박혀있게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비슷한 그 무엇인가만 나와도 경기를 일으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는 그 전쟁의 상황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공포심은 그 전쟁과 동일시되는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심으로 연결되고 그 공포심은 사회주의 비슷한 그 무엇이라도 철저하게 배격하게 될 수밖에 없는 심리를 만든다. 여주인공이 모든 삶의 모습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자신의 지위가 떨어지는 것에 대한 극심한 공포심은 그 여자의 삶을 휘감고 돈다. 그 공포에서 벗어나는 것 이외에 그녀에게 다른 삶의 목적이나 양태는 존재할 여지가 없다. 그렇게나 강력한 공포가 수많은 레드 컴프렉스에 퍼져있다. 그리고 그러한 과도한 경계심과 배격은 불합리하게 사회의 발전과 변화에 가로막이 되고 있다. 그녀가 소설가로 변신한 것이 그녀의 인생에 구원이 될 수 있을까? 그녀가 아직 그 공포심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물론 구원이 될 수 없다. 빨갱이 처단에서 종북세력 처단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바뀐 것은 없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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