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 가루가 허옇게 흩날리고 있었다.
기브아 연무장 한가운데, 밀 포대 서른여섯 개가 찢어진 채 내장을 쏟고 있었다. 베냐민 지파 공용 창고에서 끌고 온 것들이다. 사흘 전까지 그 밀은 분명히 창고 안에 있었고, 어제까지 분명히 없었고, 오늘 아침 사울 장군의 심복 에셀의 헛간 뒤편에서 발견되었다. 두 달치 식량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연무장으로 몰려든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사울은 연무장 한가운데 서 있었다. 키가 컸다. 어깨에서 위로 한 뼘은 더 솟은 사내. 베냐민 지파에서 가장 큰 사내라는 말이 허풍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그는 군중 위로 머리 하나가 더 튀어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알고 있었다 — 자신의 키가, 어깨가, 턱선이 말보다 먼저 군중에게 도달한다는 것을.
"에셀은 내 사람이다."
사울이 입을 열었다. 연무장이 조용해졌다. 조용해진 것이 아니라, 조용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침묵을 강제하는 무게가 있었다.
"내 사람이다. 내가 먹이고, 내가 재우고, 내가 칼을 쥐어준 사람이다.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겠다."
군중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에셀의 이름은 이미 기브아 전역에 횡령범으로 퍼져 있었다. 사울이 에셀을 두둔하러 나왔다는 소문도 함께. 사람들은 분노와 기대가 뒤섞인 얼굴로 장군을 올려다보았다.
사울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밀가루가 군화 밑에서 뭉개졌다.
"그런데 묻겠다. 에셀이 밀을 훔쳤다 — 좋다. 그러면 이 밀은 누구의 것이냐?"
사울의 검지가 찢어진 포대를 가리켰다.
"베냐민 지파의 것이다. 그러면 베냐민 지파는 누가 지키느냐?"
침묵.
"내가 지킨다."
사울의 오른손이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엄지가 바깥으로 나오는 주먹이 아니었다. 사울 특유의 주먹. 엄지가 검지와 중지 사이에 단단히 물린, 때리기 위해 태어난 주먹.
"에셀이 잘못했으면 내가 벌을 준다. 내 사람은 내가 다스린다. 장로들이? 재판관이? 아니, 나다. 왜냐. 이 지파를 블레셋 칼날 앞에 세우는 건 장로들의 지팡이가 아니라 내 주먹이니까."
그리고 사울은 어퍼컷을 날렸다.
허공에.
주먹이 턱 높이에서 바람을 갈랐다. 아무도 맞지 않았다. 그러나 앞줄에 선 사람들이 일제히 반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것은 위협이 아니라 선언이었다 — 이 주먹의 사정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은 내 관할이라는.
* * *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
사울의 목소리가 연무장 돌담에 부딪혀 돌아왔다. 그는 팔을 벌려 군중 전체를 끌어안는 시늉을 했다. 연극이었다. 그러나 훌륭한 연극이었다.
"에셀에게 충성하지 않는다. 장로에게 충성하지 않는다. 사무엘 선지자에게도 충성하지 않는다. 나는 이 땅에 충성한다. 이 지파의 밀밭에, 이 지파의 아이들에게, 이 지파의 내일에 충성한다."
군중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분노가 풀리는 것이 아니라, 분노의 방향이 바뀌고 있었다. 에셀을 향하던 시선이, 어느새 사울의 주먹을 향하고 있었다.
"에셀이 밀을 가져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에셀이 왜 밀을 가져갔는지, 그 연유를 아는 자가 여기 있느냐?"
사울이 뜸을 들였다. 이 남자는 뜸을 들이는 법을 알았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군중은 초조해지고, 초조해질수록 다음에 나올 말을 더 갈망하게 된다는 것을.
"에셀은 내 명을 받아 국경 초소 병사들에게 줄 식량을 빼돌린 것이다. 공식 경로로는 석 달을 기다려야 할 보급을, 석 달 동안 굶주린 병사들을 위해, 내 사람이 내 명령으로 가져간 것이다."
거짓이었다.
에셀은 밀을 블레셋 상인에게 되팔아 은 서른 세겔을 챙겼고, 그 은의 절반이 사울의 장인 아히마아스의 장부에 적혀 있었다. 그러나 그 장부는 기브아가 아닌 먼 곳, 아히마아스의 본가 금고 안에 잠들어 있었고, 이 연무장에서 그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사울 자신과, 아내 아히노암과, 에셀 세 명뿐이었다.
사울의 어퍼컷은 정확하게 한 가지를 때렸다 — 진실을.
"국경의 병사들이 굶고 있는 동안, 장로들은 회의실에서 무엇을 했느냐? 서기관의 먹물이 마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절차를. 관례를. 관행을. 그래서 에셀이 움직인 것이다. 그래서 내가 에셀에게 명한 것이다."
사울이 다시 주먹을 쥐었다.
"법이 사람을 지키지 못할 때, 사람이 법을 비틀어야 한다.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 — 나는 옳은 일에 충성한다."
환호가 터졌다. 연무장이 진동했다. 밀가루가 다시 한 번 허옇게 피어올랐다. 사울은 환호 속에서 입꼬리를 올렸다. 천천히. 그의 미소는 항상 천천히 올라갔다. 그래야 진중해 보인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 * *
요나단은 연무장 뒤편, 무기고 처마 밑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열세 살이었다. 아직 아버지의 군화를 신기엔 발이 작았고, 아버지의 칼을 차기엔 허리가 가늘었다. 그러나 눈은 이미 아버지의 것과 닮아 있었다 — 사물의 윤곽보다 사물 뒤편의 그림자를 먼저 보는 눈.
요나단은 아버지를 사랑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아버지가 연무장에서 어퍼컷을 날릴 때, 군중이 한 발짝 물러날 때, 그 물러남 속에 두려움과 경외가 뒤섞여 있을 때 — 요나단의 가슴은 뜨거워졌다. 저것이 내 아버지다. 저 주먹이 베냐민을 지킨다. 저 목소리가 블레셋의 전차보다 크다.
그런데.
요나단은 지난밤을 기억하고 있었다.
자정 무렵, 오줌이 마려워 일어났을 때, 아버지의 방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과 목소리를 들었다. 어머니 아히노암의 목소리가 먼저였다.
"에셀이 입을 열기 전에 막아야 해요. 내일 연무장에서 판을 뒤집지 않으면 아버지 장부가 터져요."
아버지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알아. 내가 처리한다. 백성들은 단순해. 주먹 한 방이면 잊어버린다."
"주먹이 아니라 이야기를 쳐요. 국경 병사 핑계를 대면 돼요. 어차피 확인할 사람 없잖아요."
"그건 좀……"
"뭐가 좀이야. 당신 장인어른 은이 걸린 문제예요. 에셀 하나 살리면 장인어른이 열 배로 갚아요."
아버지가 침묵했다. 그 침묵은 고민의 침묵이 아니었다. 이미 결정이 난 뒤, 결정을 내리는 시늉을 하는 침묵이었다.
"……알겠어. 내일 연무장에서 끝낸다."
요나단은 그때 방으로 돌아갔다. 오줌은 더 이상 마렵지 않았다.
* * *
지금, 아버지가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고 외칠 때, 요나단은 처마 밑에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버지의 손은 주먹을 쥐면 돌덩이가 되었다. 요나단의 손은 아직 물렁물렁한 소년의 손이었다. 그러나 그 손으로도 느낄 수 있는 것이 있었다 — 아버지의 말이 어딘가에서 비틀어지고 있다는 미세한 진동.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
멋진 말이었다. 온 연무장을 들끓게 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요나단은 지난밤 들은 말과 오늘 낮에 들은 말을 나란히 놓을 수 있는 나이였다. 나란히 놓으면 사이에 틈이 보였다. 그 틈에서 이상한 냄새가 났다.
'에셀에게 충성하지 않는다'고 아버지는 말했다. 그런데 에셀을 지키고 있었다. '장로에게 충성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장로의 법을 비틀고 있었다. '옳은 일에 충성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지난밤에 옳고 그름은 한 번도 화제에 오르지 않았다. 화제에 오른 것은 장인의 은과 에셀의 입, 그리고 백성의 단순함뿐이었다.
요나단은 아직 이것을 언어로 정리할 수 없었다. 열세 살의 어휘로는 '위선'이라는 단어에 닿기 어려웠다. 그러나 느낌은 분명했다. 아버지의 어퍼컷이 진실을 때리고 있다는 느낌.
다만 — 누구의 진실을?
* * *
연무장에서 돌아오는 길, 사울 장군의 어깨 위로 석양이 내려앉고 있었다. 군중은 흩어졌고, 에셀은 풀려났고, 밀가루는 바람에 날려 연무장 돌바닥의 틈새로 스며들고 있었다. 아무도 밀 서른여섯 포대의 행방을 다시 묻지 않았다.
사울은 걸으며 오른손을 펴고 쥐기를 반복했다. 습관이었다. 어퍼컷을 날린 뒤에는 늘 이렇게 손을 풀었다. 허공을 때린 것인데도, 관절이 뻐근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혹은 착각이 아닐 수도 있었다. 진실을 때리는 데에도 힘이 드는 법이니까.
뒤를 따르는 요나단을 사울은 돌아보지 않았다. 아들이 처마 밑에 앉아 있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열세 살짜리의 시선 따위가 거슬릴 나이는 아니었다. 아직은.
"아버지."
요나단이 불렀다. 사울이 멈추지 않았다. 요나단도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의 등 뒤에서, 아버지의 보폭에 맞춰 걸으며, 소년은 물었다.
"에셀 아저씨가 정말로 국경 초소에 밀을 보낸 거예요?"
사울의 발걸음이 찰나 느려졌다. 찰나였다. 열 걸음에 한 걸음이 반 박자 늦은 정도. 그러나 요나단은 그 반 박자를 놓치지 않았다.
"그렇다."
"그러면 국경 초소 병사들한테 가서 확인하면 되겠네요. 밀을 받았는지."
사울이 걸음을 멈췄다. 이번에는 확실히 멈췄다. 돌아서지는 않았다. 석양을 등지고 선 아버지의 실루엣은 거대했고, 요나단은 그 그림자 안에 서 있었다.
"요나단."
"예."
"넌 영리한 아이다."
칭찬이 아니었다. 요나단은 알았다. 아버지의 목소리에서 칭찬의 온도가 빠져 있었다. 남아 있는 것은 계산이었다. 이 아이가 얼마나 알고 있는가를 가늠하는, 차가운 계산.
"영리한 아이는 묻지 않아도 될 것을 묻지 않는 법이다."
사울이 다시 걸었다. 요나단은 뒤따르지 않았다. 아버지의 등이 석양 속으로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소년은 자신의 두 손을 펴 보았다. 아직 작고, 물렁물렁한, 주먹을 쥐어도 돌덩이가 되지 않는 손.
그 손 위로 밀가루가 내려앉고 있었다. 연무장에서 날아온 것인지, 바람이 가져온 것인지 알 수 없는, 허옇고 미세한 가루.
요나단은 손바닥을 오므렸다. 가루가 손금 사이로 빠져나갔다.
진실도 이런 것일까, 하고 소년은 생각했다.
쥐려고 하면 빠져나가는 것.
아버지의 주먹 사이로도, 이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