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을 넘어서는 말의 용기
『니는 딸이니까 니한테만 말하지』 북토크 후기 – 침묵을 넘어서는 말의 용기
2025년 7월 30일, 수요일
어지럼증 때문에 하루 종일 누워 있다가 겨우 몸을 일으켜 마포 여성동행센터에 다녀왔다. 『니는 딸이니까 니한테만 말하지』 북토크에 참석했는데, 가기 전까지 안 좋은 생각들이 맴돌았다. 그럴 때마다 엄마를 떠올리곤 한다. 나는 그동안 엄마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으려 하지 않았고, 엄마도 내게 자신의 속마음을 말한 적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최근 집에 다녀오면서, 엄마 또한 한 사람의 딸임을 새삼 깨달았다. 엄마의 엄마, 즉 나의 외할머니 이야기도 듣게 되면서 언젠가는 엄마의 이야기를 온전히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다. 동생과 나는 엄마와 같으면서도 같지 않다. 같은 엄마라도 우리 각자에게는 다른 엄마였던 셈이다. 최근 본 드라마 <미지의 서울>도 이런 모녀 관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서, 이 책이 더 궁금해졌었다. 아직 읽지는 못했지만, 조만간 꼭 읽어봐야겠다. SNS를 보면 딸 키우는 엄마와 아들 키우는 엄마의 '웃픈' 이야기가 많다. 엄마가 다쳤을 때 아들은 무심한데 딸은 걱정한다는 식의 내용들. 확실히 딸들은 엄마를 통해 자신을 확인하고, 엄마를 향해 있는 경향이 있다. 자신을 느끼는 과정에서 엄마와의 동일시가 강하게 일어나, 엄마와 딸의 감정이 하나로 융합되어 내 감정인지 엄마 감정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정서적 샴쌍둥이라는 표현이 정말 딱 맞아 떨어진다.
1. 모녀 간의 애증과 침묵
북토크에서 다뤄진 이야기는 이런 모녀 관계의 복잡한 감정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니는 딸이니까 니한테만 말하지』는 90년대생 딸 셋이 각자 엄마를 인터뷰하여 기록한 책이라고 했다. 딸의 시선으로 본 엄마의 속마음이 가감 없이 담겨있다니, 벌써부터 가슴이 먹먹해진다. 책 속 딸들은 엄마를 이해하려 애쓰면서도, 내면 깊숙이 자리한 인정 욕구를 드러낸다. 특히 책의 기획자인 김은화 작가의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엄마의 삶을 책으로 써주며 인정받고 싶어 했지만, 정작 엄마는 딸보다는 오빠의 성공을 더 자랑스러워했다는 대목. 어린 시절부터 "왜 나는 엄마에게 1순위가 아닐까" 하는 서운함이 있었고, 책 출간 후 엄마가 "출판사 해서 돈도 안 되는데 뭘 자랑스럽냐"고 말했을 때 크게 상처받아 대판 싸우기까지 했다는 고백. 결국 작가 자신도 엄마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책을 쓰게 된 것이었다니, 세상의 많은 딸들이 비슷한 '인정 투쟁'을 하며 살아왔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사회심리학적으로 이러한 모녀 갈등이 나쁜 것이 아니라, 강한 애착 관계에서 오는 필연적인 긴장이라는 설명도 공감이 갔다. 엄마와 딸은 너무 가깝고 닮았기에 기대도 실망도 큰 법이다. 정신분석 상담가의 말처럼, 여성은 타인의 빈 곳을 채우는 방식으로 존재를 실현하려 하고, 엄마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딸은 그런 엄마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 그래서 엄마에게 인정받지 못할 때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것처럼 아프고, 엄마가 힘들어하면 나 또한 괴로운 것이리라. 드라마 <미지의 서울> 속 미지와 미래 자매의 이야기도 그랬다. 하지만 이러한 애증 속에서도 결국 애착이 있기에 서로를 완전히 놓지 못하고 다시 돌아오는 것이 모녀의 질긴 인연이라는 말에 위로를 받았다.
2. 침묵을 깨는 용기, 그리고 새로운 시작
모녀 관계의 또 다른 핵심은 오랜 침묵과 그 침묵을 깨는 순간이었다. 북토크는 단순한 책 소개를 넘어, 모녀 구술생애사의 실제 사례와 심리적 여정을 생생하게 나누는 시간이었다. 이 책이 구술생애사 워크숍의 결과물이라는 점이 놀라웠다. 딸이 엄마의 삶을 인터뷰하고 기록하는 과정을 통해 사적 기억을 공적 서사로 확장시킨 시도라니, 정말 귀하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니는 딸이니까 니한테만 말하지"라는 제목 문장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딸이 엄마의 정서적 짐을 고스란히 떠안는 존재로 여겨져 왔음을 보여준다. 그 안에는 여성들이 감당해 온 말하지 못한 서사와 돌봄의 대물림, 가정 내 침묵 구조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작가들은 "엄마는 오랜 세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딸에게 털어놓고, 딸은 그 이야기의 첫 번째 청자가 된다"고 설명했다. 이 말이 가장 크게 와닿았다.
북토크 내내 모녀 관계가 침묵과 돌봄의 구조 속에서 어떻게 얽히고 풀리는지 깊이 들여다봤다. 책 속 딸들이 엄마의 삶을 기록하면서 결국 자신을 마주 보게 되었다는 고백은, 나에게도 큰 울림을 주었다. 엄마를 기록하는 것이 곧 ‘딸 자신’을 이해하는 일이라는 말. 작가들이 처음으로 엄마를 하나의 '개인'으로 보기 시작했다고 말했을 때, 나도 언젠가 엄마를 그렇게 바라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엄마는 한글을 몰라 사인을 못 하다가 책이 출간되고서야 “딸이 내 얘기를 책으로 내줬다”며 자랑하기 시작했고, 딸에게는 그 한 마디가 오랜 시간의 보상처럼 느껴졌다는 이야기는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복잡한 감정들, 가족 간에 서로를 돌보며 말하지 못했던 순간들, 그리고 그 돌봄이 다음 세대에게 '자연스럽게' 전가되는 방식에 대한 고민들이 오갔다. 딸들이 "나는 엄마를 도망가지도, 함께 있지도 못한 채 바라보고 있다"고 표현하며 연대와 족쇄 사이에서 갈등하는 감정을 털어놓은 것은 나만의 감정이 아니었다. 북토크 후반부, "엄마는 나랑 정말 다른 사람이구나"를 깨닫는 순간에 집중된 이야기들은 고통인 동시에 새로운 이해의 출발점이었다. 사회심리학적으로도 딸이 엄마와 감정적 동일시에서 벗어나 차이를 인지하는 과정이 자립과 성장의 핵심이라는 점이 명확해졌다. 참여자들은 엄마의 삶을 기록하는 일이 단순히 과거를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나를 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을 고민하게 만드는 실존적 질문이 되었다고 말했다.
이 구술 작업이 단순히 개인의 이야기를 넘어, 침묵 속에 존재하던 여성들의 역사를 공적인 언어로 변환해 내는 일이라는 점이 거듭 강조되었다. 가정폭력, 무시된 노동, 교육의 단절, 감정의 억압 등은 각자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우리 사회 모두의 현실이다. 특히 딸이 기록한 엄마의 삶을 통해 '엄마도 여성이고, 주체였으며, 자기만의 세계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고백은 현장에 있던 많은 이들의 깊은 공감을 이끌어냈다.
북토크의 마지막은 말로 표현되지 않았던 것들이 비로소 말이 되어 나오는 과정을 함께 목격한 감동으로 마무리되었다. "처음으로 엄마와 같은 이야기를 웃으며 할 수 있었다"는 말과 "우리 엄마도 언젠가는 이런 말을 해줄까" 하는 희망의 말들이 오갔다. 이 자리에서 나눈 이야기들은 말과 기록, 기억과 해석, 이해와 오해의 경계를 오가며 관계의 새로운 문을 열어주었다.
『니는 딸이니까 니한테만 말하지』는 그저 엄마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 아니다. 그것은 엄마의 침묵을 딸의 질문으로 바꾸는 책이고, 말해지지 않았던 여성의 서사를 '들으려는 귀'를 가진 이들이 함께 써 내려간 연대의 문서다. 이 책과 북토크는 우리 사회에서 '엄마'라는 말 아래 감춰져 왔던 이야기들이 더 이상 침묵에 머무르지 않도록, 말하고 기록하며 관계를 다시 쌓아가는 용기를 보여준다.
북토크를 마치며, 많은 이들이 "엄마는 왜 그렇게밖에 살 수 없었을까?"라는 같은 물음을 안고 돌아갔다. 이 질문은 단순한 과거 되짚기가 아니다. 그것은 딸로서, 여성으로서, 다음 세대를 살아갈 사람으로서 지금의 나를, 그리고 앞으로의 우리를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질문이야말로 우리가 계속해서 구술하고 기록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여성, 모녀, 가족, 가부장제, 돌봄… 정말 해야 할 이야기들이 많다. 엄마에게서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는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딸이다. 모녀 구술생애사 작업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테지만, 기회가 있다면 꼭 해보고 싶다. 모녀 관계가 개인적 차원을 넘어 사회구조적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중요한 주제임을 확인시켜주며,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이 겪는 공통의 경험을 역사화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작업이 될 테니 말이다. 오늘 북토크에 오길 정말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