꺾인 마음으로도 계속 쓰고 싶은 사람에게
『연구자가 세상에 말을 건네는 방법』 후기
– 꺾인 마음으로도 계속 쓰고 싶은 사람에게
처음엔 그냥 글쓰기 실용서 정도로 생각했다. 연구자 글쓰기라니까, 논문 잘 쓰는 법이나 좀 나와 있겠지 싶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이 책은 글을 쓰고, 공부하고, 연구하고, 운동하고, 살아낸 한 사람이 세상에 던지는 진심 어린 말들이었다. 그 말들이 나한테는 좀 아프고, 좀 따뜻하고, 좀 불편하게 다가왔다. 내 얘기 같기도 하고, 아니면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의 얘기 같기도 하고.
책의 첫 문장부터 묘하게 나를 멈춰 세웠다.
“모든 걸음은 발 헛디딤이다.”
이 말이 그냥 멋진 문장이 아니었다. 진짜 그렇다고 생각했다. 나도 여러 번 발을 헛디뎠고, 지금도 어디로 가는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이 책은 그 헛디딤을 실패로 보지 않았다. 계속 비틀거리면서도 앞으로 가는 사람의 이야기였다.
특히 세미나 이야기할 때, 진짜 공감 많이 했다. “나를 키운 건 8할이 세미나였다”는 말, 농담 같지만 진심이다. 나도 그렇다. 매주 읽고 발제하고 토론하고, 그 과정에서 겨우겨우 살아남는다. 글을 쓰기 위해서 읽고, 읽은 걸 정리하기 위해 또 쓰고. 그 끝에 남는 건 사실 ‘잘 썼다’보다 ‘어떻게든 썼다’가 더 맞을 때가 많다. 이 책에서 말하는 ‘강제와 자율성 사이의 세미나’는, 나한테도 그런 배움의 장이었다. 좋아서 한 것도 맞고, 어쩔 수 없이 한 것도 맞다. 그게 대학원생의 삶 아닐까.
그리고 이 책에서 내가 제일 오래 붙잡았던 건, 연구자가 세계와 관계 맺는 태도에 대한 질문이었다. 연구는 결국 타인에게 말을 거는 일이니까. 글을 쓴다는 건 그 사람의 머리와 마음과 관점을 잠시 빌리는 일이니까. 읽고 쓰는 일이 단순히 자기계발의 도구가 아니라, 세상의 구조를 분석하고, 그 구조 안의 ‘나’를 바라보고, 결국은 바꾸기 위한 시도일 수 있다는 점. 나도 그렇게 믿고 싶다.
그리고 ‘운동’이라는 단어. 솔직히 아직도 좀 어렵고 조심스럽지만, 책에서 말하듯이 ‘나 하나만 잘 버티면 되는 게 아니라, 함께 더 나은 구조를 만들기 위한 개입’이라는 말엔 고개가 끄덕여졌다. 대학원생노조 이야기를 읽으며 좀 먹먹해졌고, 연구자의 죽음을 ‘애도할 수 있느냐’는 물음은 오래 마음에 남았다. 그 죽음들이 슬픈 건 당연한데, 애도조차 허용되지 않는 구조가 더 슬펐다. 우리 삶의 문제는 ‘경과적인 신분’이라 불리는 존재들이 제대로 이름을 갖지 못한 채 사라지는 데 있다는 말, 잊지 못할 것 같다.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은 확실히 2부다. 하지만 오늘은 1부에 중점을 둬본다.
이 책은 내가 어떤 연구자가 되고 싶은지,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왜 계속 쓰고 싶은지를 다시 묻게 만들었다. 꺾인 마음으로도 쓴다는 것. 잘 쓰지 못해도, 이해받지 못해도, 그럼에도 계속 쓰겠다는 것.
그게 이 책이 내게 남긴 가장 진한 문장이자 다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