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기록하는 다양한 시선
1. 기록의 재정의를 위한 여정
‘기록’은 단순히 과거를 보존하는 행위가 아니다. 오늘날 기록은 현재의 삶을 이해하고, 미래의 자산을 만드는 능동적인 과정이다. 문서나 유물만이 아니라, 평범한 사물과 일상, 그리고 공동체의 기억까지도 기록의 대상이 된다. 이번 종로문화재단 도시기록 프로젝트 세 명의 멘토, 안근철·소동호·곽은비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도시를 기록하면서도 공통적으로 “기록은 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과정”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2. 안근철 아키비스트 : 도시 경관에서 사물로, 스케일의 확장
안근철 멘토님은 기록관리학이란 걸 처음 알게 된 때부터 내가 하고픈 기록을 지향하고 있었다. 다른 강의도 들었지만 이번 프로젝트로 10회기로 소수인원으로 함께 하는 것이기에 더욱 반가웠다.
안근철 멘토는 도시 기록의 대상을 경관 → 도시 조직(필지·길) → 건축물 → 내부 공간 → 사물·문서로 확장한다. 한 지점을 5년마다 촬영해 장기적 변화를 기록하거나, 건물의 입면과 간판, 유리문 문구, 작업장의 기계와 도구, 심지어는 사장님이 직접 그린 도면까지 기록의 대상으로 삼는다. 기록은 단순히 형태를 남기는 것을 넘어, 사람·공간·사물이 상호작용하며 쌓아온 흔적을 담는다. 공간은 사람이 순응하거나 개조하면서 ‘장소’가 되고, 그 과정에서 의미가 부여된다. 기록자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기록의 구성이 달라진다는 점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도시의 변화를 다각도로 포착하는 것을 제시하며 거대한 도시한 흐름 뿐 아니라 살아 숨쉬는 작은 흔적까지 기록의 가치로 인정하고 있었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 사람과 공간, 사물이 상호작용하며 만들어내는 이야기와 시간의 흔적을 포착하는데 중점을 둔다.
3. 소동호 디자이너 : 길거리 의자로 읽는 도시
소동호 멘토님은 ‘서울의 길거리 의자들’ 아카이빙 프로젝트를 통해, 평범한 의자를 기록의 대상으로 삼았다. 모든 의자가 아니라, 오직 “나에게 말을 거는 듯한” 의자만 기록한다. 일부러 찾아다니지 않고, 일상 속 우연한 마주침을 소중히 여긴다. 늘 휴대하는 아이폰으로 우연히 만난 의자를 촬영하고, SNS에 기록을 쌓는다. 길 위의 의자들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버내큘러 디자인(Vernacular Design), 즉 대중의 필요와 삶의 지혜에서 탄생한 기능적 디자인이다. 낡은 스펀지 의자, 주차 관리원의 이동식 의자, 비를 막기 위해 우산을 고정한 의자는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철학을 그대로 보여준다. 소동호 디자이너의 기록은 결국 도시가 얼마나 불친절한 공간인지를 드러내는 동시에, 사람들이 스스로 공간을 개조하며 살아가는 방식을 보여준다. 평범한 사물 속에서 발견하는 특별함, 그리고 그 사물에 깃든 삶의 흔적을 통해 일상의 미학과 도시의 본질을 탐구하는 기록의 가치를 보여준다.
4. 곽은비 로컬 아키비스트: 개인의 기억에서 지역사로
곽은비 멘토님은 자신의 개인적 기억을 지역사로 확장한다. 영상을 전공하고 지역의 사라져가는 기록을 직접 남기고 콘텐츠화하는 전문가이다. 인천 학익동 재개발 단지 기록, 학창 시절 체육복을 입고 마지막 등하굣길을 촬영한 프로젝트, 아버지의 성냥 수집품 아카이브, 배다리 헌책방 거리의 블로그 글과 사진을 담은 Zine 제작까지. “노인 한 명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는 말처럼, 사라질 수 있는 기억을 붙잡는다. 그리고 그것을 딱딱한 보고서가 아닌 Zine, 전시, 투어 프로그램, SNS로 풀어내며 대중과 소통한다. 개인의 기억은 곧 지역의 역사로 확장되고, 기록은 공동체의 자산이 된다.
5. 기록의 진화와 확장: 교차하는 시선들
세 멘토의 작업을 종합하면, 기록은 다음과 같은 교차점을 가진다.
- 관찰과 시선: 안근철은 공간 속 사람의 흔적을, 소동호는 의자에서 기능적 지혜를, 곽은비는 개인의 추억에서 지역사를 포착한다.
-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애착: 재개발로 변하는 동네, 사라지는 상점과 도구, 기억 속 풍경이 기록의 공통된 동기다.
- 콘텐츠화와 소통: 기록은 보존을 넘어 전시·출판·SNS·투어로 확장되며, 대중과 만나는 살아있는 문화가 된다.
6. 나의 시선에서: 어떤 도시를 기록할까
세 사람의 시선을 따라가며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어떤 도시를 기록하고 싶은가?
재개발·재건축 현장의 남겨진 흔적들.
오래된 슈퍼, 세탁소, 동네 서점 같은 생활 기반.
“당신에게 이 동네는 어떤 의미인가요?”라는 질문을 담는 구술 기록.
아파트 단지의 창문들
매일 지나는 이동 경로에 쌓이는 기억.
복지관, 마을회관, 도서관 같은 돌봄의 장소.
작은 발견들이 쌓이면 하나의 주제가 되고, 꾸준한 기록은 결국 나만의 아카이브가 된다. 중요한 것은 완벽한 답을 갖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왜 기록하려 하는가라는 질문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7. 결론: 기록은 일상의 수집에서 시작된다
기록의 개념은 대상, 방법, 주체 측면에서 다층적으로 확장되고 있다.
기록은 거창한 기술이 아니라 용기에서 시작된다. 사소한 기억과 추억도 지역사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기록은 곧 수집이고, 수집은 오래된 인간의 욕망이자 낭만이다.도시 기록은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을 이해하고, 공동체의 기억을 이어가며, 정체성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오늘날 우리는 기록할 수 있는 수많은 도구와 매체를 가지고 있다. 전문가의 거창한 작업 뿐 아니라 스마트폰으로 찍는 현장, 일기자엥 끄적이는 문장 하나, 짧은 메모 등 소중한 기록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단순히 시간을 붙잡아 두는 것을 넘어 우리 주변의 환경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공동체의 역사를 이어가며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데 기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