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한 거리에서 기록하는 법

by 학이지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소중함에는 무심하면서도, 멀리 있는 거대한 이상만 붙잡고 싶어지는 때가 있다. 나는 늘 그런 사람이다. 손에 잡히는 작은 일들은 쉽게 놓치면서도, ‘지금 이 순간보다 더 의미 있는 무언가’를 향해 시선을 빼앗긴다. 사회복지사가 된 것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듣는 일은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았다. 깊은 마음을 함께 견디는 데에는 체력도, 마음의 두께도 필요했다. 십 년 동안 버티며 나름의 의미를 찾았지만, 결국 어느 순간 더는 그 무게를 떠안기 어려워져서 손을 놓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전혀 다른 자리에서는 누군가의 생애를 듣고 기록하는 구술생애사 작업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올라온다. 오래 들여다보면 두 마음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나는 언제나 ‘적당한 거리’를 찾고 있었던 것 같다. 사람에게 다가가되 너무 가까워지지 않고, 멀어지되 완전히 놓지도 않는, 나만의 숨 쉴 틈을 확보하며 관계를 유지하는 방식. 그 거리는 누군가에게는 모순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내게는 무너짐을 방지하는 최소한의 안전선이다.


정돈되지 않은 방 안에서 기록관리 체계와 분류 원칙을 공부하는 내 모습은 언제 봐도 조금 우스꽝스럽다. 책상 위는 늘 쌓이고, 바닥에는 하루만 지나도 물건들이 굴러다닌다. 그 안에서 나는 기록의 표준, 일관성, 맥락, 분류체계를 공부한다. 통제 욕구는 누구보다 강하지만, 정작 그 욕구를 실현할 삶의 여유나 체력은 늘 부족하다. 어지러움을 불편해하면서도, 새로운 어지러움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사람이 바로 나다.
결국 나는 내내 모순 속에서 살아온 셈이다.


하지만 도시의 혼란스러운 풍경 앞에서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동묘시장을 찾았을 때가 그랬다. 처음엔 이 혼잡함을 어디서부터 이해해야 하는지 모르겠었다. 물건들은 쏟아져 나오듯 진열돼 있고, 사물과 사람은 서로 뒤엉켜 흐르고, 시간조차 구분되지 않는 듯한 공간.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복잡함 속에서 이상한 안도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도시의 혼란이 내 안의 혼란과 맞닿는 지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돈되지 않은 사물들, 행인의 발걸음, 상인들 사이를 오가는 이야기. 난잡해 보이면서도 나름의 규칙이 있고, 무너진 것처럼 보이면서도 묘하게 ‘흐름’이 존재하는 그 풍경 속에서 나는 내가 덜 이상하다고 느꼈다.

도시기록의 관점에서 보면 동묘는 매우 흥미로운 장소다. 동묘의 풍경은 그 과정을 가장 솔직한 형태로 드러낸다. 사물들은 고정되지 않고, 진열은 매일 달라지고, 사람들은 관계를 맺고 끊고 다시 이어간다.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나는 그 움직임 속에 자꾸 오래 머물렀다. 완결된 질서보다, 계속 생성되는 질서에 더 끌렸다.

오늘 다시 동묘를 걸었을 때, 익숙함과 낯섦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진열은 여전히 복잡했지만, 어느 순간 각이 잡혀 보였다. 처음의 혼란은 눈에 익숙해진 풍경으로 변했고, 그 익숙함은 오히려 풍경의 구조를 보이게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각이 보이는 순간 카메라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더 모호해졌다. 기록자에게 프레임을 선택하는 일은 늘 쉽지 않지만, 오늘은 특히 더 어려웠다. 경계가 흐려지니 찍고 싶은 지점도 흐려졌다.

손에 들린 카메라 대신 스쳐 지나가는 할아버지들의 얘깃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장면보다 먼저 마음을 흔들었다. 그 순간 문득 생각했다. "이 풍경을 사진으로 담아낼 수 있을까?"

도시의 온도와 관계와 흐름은 프레임 하나에 담기지 않는다. 어쩌면 오늘은 찍기보다 머무는 것이 더 정확한 기록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미숙한 기록자다.
사회복지사로서 들었던 이야기들도, 아키비스트로서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도 아직 한 곳에 고르게 담기지 않는다. 나의 언어는 흐르고, 관점은 바뀌고, 마음의 위치는 늘 흔들린다. 하지만 이 흔들림은 나를 멈추게 하지 않고, 오히려 다시 시작하도록 만든다. 나는 완벽한 결론보다 과정에서 드러나는 진실을 더 오래 붙잡는 사람이다. 그리고 도시기록은 완성보다 과정에 더 가까운 작업이라는 사실이, 내 모순을 조금은 용서할 수 있게 한다. 앞으로도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듣고, 보고, 남기고 싶다.


혼란과 질서 사이, 거리와 몰입 사이, 가까움과 멀어짐 사이에서 계속 균형을 잡으며 기록하고 싶다. 그 균형이 불안정하더라도, 그 흔들림 자체가 기록의 일부라고 믿고 싶다. 이 기록이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가 모두 이런 모순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숨이 쉬어지는 날이 있을 테니까. 도시를 기록한다는 것은 결국 도시를 핑계 삼아 나를 다시 들여다보는 일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는 내 삶의 적당한 거리를 찾고 있다. 그 거리는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내가 무너지지 않고, 계속 바라볼 수 있는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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