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질서 속의 질서, 종로 도시기록 프로젝트 후기

by 학이지지

1. 동묘의 혼란

처음 마주한 동묘는 혼란 그 자체였다. 거대한 옷 무덤, 정체 모를 기계 부품들, 그리고 그 사이를 메우는 수많은 인파. 내가 과연 이 거대한 무질서를 기록하고 분류할 수 있을까? 압도적인 풍경 앞에서 나는 기록할 추진력을 잃은 채 서성이는 방관자와 같았다. 카메라를 드는 것조차 조심스러웠고, 펜을 쥔 손은 머뭇거렸다.


하지만 '동묘팀'이라는 이름으로 뭉친 동료들과 함께하며 시선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무작정 걷고 관찰하며 동묘를 관통하는 키워드를 찾아냈다. 겉보기엔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물건들(무질서) 속에도 상인들만의 치열한 생존 논리(상품의 진열)가 존재했다.


2. 함께한 사람들


같은 공간을 거닐었지만, 팀구성원들이 포착한 순간들은 나에게 새로운 눈을 뜨게 해주었다. 특히 서희정 선생님의 활동은 인터뷰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은 울림을 주었다. 거친 삶의 현장에 있는 상인들은 낯선 이의 접근에 본능적으로 방어벽을 세운다. 하지만 서희정 선생님에게는 그 단단한 빗장을 푸는 힘이 있었다. 선생님의 인터뷰는 정보를 캐내는 취조가 아니라, 상대의 삶을 존중하고 경청하는 대화였다. 사소한 안부, 물건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따뜻한 눈빛, 그리고 묵묵히 들어주는 태도. 그 부드러운 접근 방식 앞에서 상인들은 무장해제되었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미미 선생님의 에피소드 또한 잊을 수 없다. 한 상인이 미미 선생님에게 불쑥 건넨 것은 다름 아닌 '옛날 공중전화 카드'였다. 지금은 사용할 수도 없는, 누군가에게는 그저 예쁜 쓰레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화폐 교환의 가치를 넘어선 '마음의 증표'였다. 경계의 대상이 아닌, 자신의 추억을 나누어도 좋을 소통의 대상으로 받아들였다는 신호였기에 우리에게 큰 추억이 되었다. 미미 선생님이 받아 든 공중전화 카드는 동묘라는 공간이 물건만 거래되는 곳이 아니라, 기억과 정이 오가는 사람 냄새나는 곳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무엇보다 미미 선생님이 알려준 다양한 산책 방법을 참고하며 지루한 일상들도 채울 수 있었다.


잡스 선생님의 기록은 동일 앵글, 동일 시간대라는 원칙으로 기록하며 동묘 공간의 가변성을 보여주었다. 평일에는 주차장이거나 닫힌 셔터였던 공간이 주말이 되면 노점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시각화한 점이 돋보였다. 동묘시장은 사람의 활동에 따라 수축하고 팽창하는 살아있는 유기체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반면 최은영 선생님의 글은 소음 가득한 시장 한복판에서 마주한 '고요한 쉼표' 같았다. 최은영 선생님은 특유의 차분함으로 서정적인 순간들을 길어 올렸다. 자극적인 소재를 좇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오래 들여다보고 정성껏 묘사하는 힘을 알 수 있었다.


다른 분들에 비하면 왠지 나의 기록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안근철 멘토님이 독려해 주시고 방향을 잡아주셔서 좀 더 힘을 낼 수 있었다. 10회기의 시간이 생각보다 짧게 느껴졌고 함께 한 분들을 잘 알지 못하지만 좋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라는 것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광장시장을 기록한 B팀 선생님들과 공유회를 하면서 새로운 시각, 숨겨져 있는 이야기들을 알 수 있었고 자주 가던 광장시장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덕분에 서울을 여행하듯 다닐 수 있었다.


3. 기록의 확장: 낡고 평범한 것들의 가치를 위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 속도전 속에서 기록의 대상은 확장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문화유산이라 하면 화려한 궁궐이나 오래된 사찰만을 떠올린다. 하지만 우리가 익숙하게 지내왔던 허름하고 평범한 삶의 공간들—근대 건축물, 매캐한 냄새가 배어 있는 철공소, 좁은 쪽방촌, 그리고 동묘의 좌판들—역시 우리가 치열하게 살아온 흔적이자 소중한 유산이다. 이들은 개발의 논리에 밀려 가장 먼저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기에, 지금 당장 기록해야 할 시급한 대상이기도 하다. ​

이번 종로 도시기록 프로젝트가 특별했던 이유는 바로 기록 주체의 다양성에 있었다. 특정 기술이나 전문가의 시각에만 국한되지 않고,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렌즈로 도시의 다층적인 이야기를 포착했다. 도시 기록은 그 공간에서 일어난 인간의 경험과 상호작용을 포착하는 예술적 방법론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구체적인 사람이나 일화보다 '공간' 그 자체가 더 강렬한 기억으로 남기도 한다. 같은 장소라도 각자에게 다른 기억으로 남을 수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시대를 관통하는 주된 정서가 흐른다. 그렇기에 우리는 매일 변화하는 도시를, 그리고 그 화려한 풍경 너머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목소리를 기록해야 한다. 이것이 곧 우리 지역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기억을 구조화하여 미래 설계의 자산으로 남기는 유일한 길이다. 사라져 가는 도시를 붙잡는 힘은 결국 기록에서 나온다.


4. 새롭게 알게 된 점


이번 활동을 통해 나는 '유산'의 의미를 다시 정립하게 되었다. 박물관 유리관 속에 전시된 깨끗한 유물만이 역사가 아니다. 기름때 묻은 장갑, 투박하게 진열된 중고 물품, 그리고 상인들의 거친 손마디 속에 진짜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동묘와 청계천 일대가 품고 있는 가치는 '혼재'와 '연결'에 있었다. 조선 시대의 도시 조직 위에 근대의 건축물이 서 있고, 그 안에서 현대의 기술자들이 미래를 위한 시제품을 만든다. 그리고 그 부산물들은 동묘로 흘러와 또 다른 쓰레기 혹은 보물이 된다. 서희정 선생님이 상인의 마음을 열었듯, 기록 활동가인 우리의 역할은 이 거칠어 보이는 산업 현장 속에 숨겨진 '사람의 이야기'를 발굴하는 것이다.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좀 더 알아본 부분은 '산업유산'과 '산업고고학'이다. 진학 전 안근철 멘토님의 인터뷰로 알게 된 개념이긴 했다. 이전까지 나에게 산업유산이란 거대한 붉은 벽돌 공장이나 폐광산처럼 압도적인 규모의 구조물만을 의미했다. 하지만 동묘와 을지로, 청계천을 거닐며 마주한 것은 건물이라는 거창한 '점'이 아닌, 그 안에서 치열하게 돌아가는 생태계라는 '선'과 '면'의 유산이었다. ​좁은 골목을 메운 공구 상가와 정밀 부품을 깎는 작은 공장들은 개별적으로는 평범하고 낡아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만들어낸 '도심 제조업 시스템'은 그 자체로 대체 불가능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이곳에는 한국의 근대화를 이끈 기술의 진화 과정과, 다품종 소량 생산이 가능한 유연한 협업 네트워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과정에서 배운 '산업고고학'은 땅속의 유물을 파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곁에 남겨진 기술과 노동의 흔적을 해독하는 과정이었다. 동묘 바닥에 깔린 녹슨 기계 부품 하나, 을지로 기술자의 손에 들린 오래된 공구 하나가 모두 고고학적 탐구의 대상이 되었다. 겉보기엔 무질서해 보여 '치워야 할 대상'으로 취급받던 것들이, 실은 우리가 보존하고 연구해야 할 소중한 기술 문화재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산업유산은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삶과 기술이 맞물려 돌아가는 생생한 현장이었다.


5. 마치며: 무질서 속에서 찾아낸 따뜻한 질서


동묘의 무질서에서 시작된 나의 여정은 결국 여전히 '사람'으로 귀결되었다. 처음엔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혼란스러운 풍경이, 동료들의 시선을 통해 따뜻한 삶의 질서로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두려움으로 가득한 나였기에 선뜻 다가가지 못해 이번에는 관찰에만 집중했지만, 나에게는 정말 큰 도전이었다.


나의 내면은 동묘와 닮아 있다. 정돈을 갈망하면서도 끊임없이 일을 벌이는 나. 하지만 동묘가 그 무질서 속에서도 산업의 맥락을 잇고 사람을 품듯, 나 또한 나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연결되고 있음을 느꼈다.


서희정 선생님의 경청이 상인의 입을 열게 하고, 낡은 전화카드가 미미 선생님과 상인을 이어주었듯, 기록은 과거와 현재, 사람과 사람을 잇는 가장 강력한 도구다. 나는 이제 방관자가 아닌 기록자로 계속해서 귀를 기울이고 싶다. 사라져 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곳에서 치열하게 살아 숨 쉬는 가치들을 활자 위에 꾹꾹 눌러 담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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