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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 자체를 바꾸어야 하는 엔타임 각성

by 잡학거사

사람이 어떤 시험을 준비하느냐에 따라 그의 하루, 한 달, 그리고 삶 전체가 재편된다.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은 게임을 내려놓고 시간표를 정비하며, 고시를 준비하는 수험생은 몇 년을 모든 것을 미루고 책과 씨름한다. 누군가는 졸음을 이기기 위해 허벅지를 찌르고, 누군가는 식욕과 유혹을 억누르기 위해 스스로를 감시한다. 이 절박함은 단순한 의지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미래가 지금의 나를 강제로 끌어당기는 힘”이다. 그래서 시험이 어려울수록, 사람의 사고방식과 일상, 관계, 목표, 감정의 방향까지 모두 바뀌어 간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인생에서 가장 난도가 높고, 가장 결정적이며, 가장 범위가 넓은 “시대적 시험”, 즉 마지막 시대의 분별과 각성의 시험 앞에서 사람들은 이상하리만큼 긴장을 풀고 살아간다. 입시는 실패해도 재도전할 수 있고, 고시는 떨어져도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를 흐르는 영적·역사적 변화의 지층을 읽지 못하면, 그것은 단순한 시험 실패가 아니라 삶 전체의 방향을 읽지 못하는 치명적 오류가 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오래된 사고방식, 세상적 성공의 기준, 명예의 프레임, 비교와 경쟁의 코드 속에 머물러 있다. 이것은 마치 시험 범위와 방향, 경향이 완전히 바뀌었는데도 공자왈 맹자왈.. 철지난 복받는 창세기적 구식 교재만 붙들고 힘쓰는 것과 같다고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본질에서는 계속 오답을 낼 수밖에 없음 자명하므로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단지 “조금 더 열심히 살자”가 아니라, 아예 코드 자체를 바꾸는 각성을 필요로 합니다. 사고의 구조, 가치의 기준, 목적의 방향, 판단의 토대가 완전히 다시 조립되어야 한다. 입시생이 단순히 공부량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문제 접근법을 바꾸고, 고시생이 기출 분석을 통해 틀린 사고방식을 완전히 버리듯, 영적 현실에서도 “삶 전체의 구조 조정”이 일어나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사람은 계속 자신이 열심히 하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다른 시험지를 풀고 있는 셈이다. 세상적 성공을 기준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영적 분별의 시험에서 절대로 점수를 얻을 수 없다.


세상은 명예·성과·연봉·지위·경쟁·인정욕을 기준으로 사람의 가치를 매기지만, 이 구조 속에 오래 머물면 사람은 “내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잃게 된다. 그러면 판단 기준은 흐려지고, 선택 기준은 뒤섞이며, 결국 시대의 변화가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져도 해석은 커녕 뭐가 뭔지도 모르며 접근자체도 할 수 장골병신으로 전락되어 버린다. 성공이 목표가 된 사람은 변화의 흐름을 "내 이익에 영향을 주느냐"로만 판단하기 때문에 시대적 메시지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이런 상태에서 아무리 지식이 늘어도, 경험이 많아도, 종교적 활동을 많이 해도 코드가 잘못된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없다. 따라서 첫 번째 전환은 자신의 내면에게 이렇게 질문하는 데서 시작된다. “나는 무엇을 위해 깨어 있으려 하는가?” “내가 붙잡아온 성공의 기준은, 과연 시대의 시험 범위와 맞는가?” “명예에 매인 사고로는, 보이지 않는 흐름을 읽을 수 있는가?” 이 질문은 매우 단순하지만, 정직하게 답하려 하면 내면은 큰 충격을 받는다.


사람의 사고체계가 흔들릴 때, 이전까지 확고하다고 믿었던 기준들이 하나씩 무너지고 새로운 기준이 자리 잡기 시작한다. 입시생이 여러 번의 실패 끝에 문제풀이법 자체를 바꾸듯, 고시생이 합격자와 비교하며 완전히 다른 공부법이 필요함을 깨닫듯, 영적 현실에서도 옛 자아가 쌓아 온 기준들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각성의 순간이 온다. 두 번째로 필요한 것은 피와 살을 녹여 내는 인고의 과정이다. 사람은 변화의 문턱 앞에서 대부분 멈춤에는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다. 입시에서는 책상 앞에서의 인내가 필요하고, 고시에서는 사회적 외로움과 긴 절제가 필요하다. 영적 각성의 길에서도 동일하게, 내 안의 교만, 두려움, 인정욕, 통제욕, 편견, 상처를 직면하고 녹여내는 과정은 결코 쉽거나 편안치 않다. 그러나 이 과정을 피하면, 사람은 절대로 깊은 분별에 들어갈 수 없으며, 겉으로는 조용한 하루 같지만, 내부에서는 “옛 자아 vs. 새 자아”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No Pain No Gain~ 이 싸움 없이 각성을 얻는 사람은 없다. 허벅지를 찌르며 잠을 쫓는 고시생처럼, 영적 각성을 원하는 사람은 “자신의 고집을 찌르고, 자신의 집착을 찌르고, 자신의 편견을 찌르는” 고통을 감수해 내야 할 것입니다. 자신 안의 불순물이 태워지는 이 시간은 불편하지만, 그 과정을 통과한 사람만이 진짜로 우주를 보는 눈을 갖는다. “나를 비워야 비로소 보인다”는 말은 단순한 격언이 아니라, 실제 변화의 원리다. 자신의 교회(세상)에서 보고 들은 것들로 자신의 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면 진정 새로운 것이 들어올 자리는 결코 없을 것으로 그래서 결국은 무소유처럼 내려놓고 비우는 사람들이 엔타임 시대의 영원의 생명에 직결된 메시지를 가장 먼저 듣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중요한 것은 “코드 전환을 일상에서 실제 행동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입시에서도 공부법의 전환은 책상 위에서가 아니라 문제 풀이 손의 습관에서 시작된다. 영적 전환도 마찬가지로, 삶의 작은 선택에서 현실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이익보다 진실을 선택하고, 인정보다 올바름을 선택하며, 편안함보다 성장의 불편함을 선택할 때, 기존의 세상 코드가 조금씩 힘을 잃고 새로운 하늘의 코드가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불안 때문에 움켜쥐던 것들을 내려놓고, 사람의 말보다 진리를 기준으로 선택하며, 비교 대신 자신만의 길을 정렬하는 순간들 속에서 사고체계 전체가 재편된다. 수험생이 매일 단권화를 진행하며 실력을 쌓듯이, 영적 전환의 길도 이 작은 실천들의 축적 위에서 완성된다. 마지막으로, 진짜 전환은 삶 전체의 방향을 재배치하는 결단에서 완성된다. 입시를 위해 친구들과의 시간을 줄이고, 고시를 위해 몇 년의 인생을 반납했던 것처럼, 각성의 길을 걷는 사람은 더 깊은 차원의 내려놓음을 경험한다. 이것은 단순한 절제나 습관 조절이 아니라, “나는 이 길을 위해 내 인생의 중심을 새롭게 잡겠다”는 선택이다. 이 결단은 주변 사람에게는 이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관점에서는 이 결정이야말로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새로운 시대의 흐름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이 흐름 속에서 사람은 명예보다 진리, 경쟁보다 분별, 성공보다 사명, 안전보다 순종을 선택하게 된다. 그러면 어느 순간, 입시생이 성적이 한 번에 오르듯, 고시생이 모든 과목이 연결되어 보이듯, 영적 현실에서도 갑작스러운 “지각의 전환”이 일어난다. 세상의 움직임과 보이지 않는 흐름이 하나의 구조처럼 읽히기 시작하고, 사건의 표면 뒤에 있는 본질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것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코드를 바꾼 자에게 주어지는 인식의 열매이다. 결국 이 모든 과정은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새 시대의 시험을 풀고 싶은가? 그렇다면 먼저 옛 시대의 코드를 버려야 한다.” 세상적 성공의 코드로는 끝까지 오답만 낼 뿐이다. 그러나 내려놓고, 비우고, 자신을 태우며, 작은 선택을 재정렬하고, 삶의 중심을 재편한 사람에게는 새로운 코드가 주어진다. 그리고 그 순간,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길이 하나씩 열리게 될 것입니다.


결국 각성은 노력의 문제가 아니라. 코드를 바꾼 자만이 마지막 시험을 풀 수 있는. 승자독식의 코드를 무엇으로 삼느냐의 결정적 차이가 이기는 자의 반열에 스스로를 자리매김해 낼 수 있다는 것이며, 첨언과 사족으로 세상적 모든 것을 내려 놓고 마구 베출어 스스로의 손발을 묶으라는 것이 아닌, 뱀처럼 지혜롭게 인식의 전환으로 무엇을 우선해야함의 순번을 바꾸어 초각성과 초몰입을 이루어야함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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