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 있으라는 말의 새로운 의미

by 잡학거사

우리는 지금까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정보를 손에 쥐고 살아가는 세대다. 질문하면 즉시 답이 나오고, 망설이면 대안이 제시되며, 판단이 어려우면 누군가 대신 정리해 준다. 이 편리함은 처음에는 축복처럼 느껴졌다. 시간을 아껴 주고, 실수를 줄여 주며, 더 나은 선택을 가능하게 해 주는 도구처럼 보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이렇게 많은 도움 속에서, 나는 여전히 판단하고 있는가. 아니면 반응하고 있는가. 성경은 마지막 때의 특징을 요란한 재앙이나 극적인 표적으로만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상이 너무나 평온하게 이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겉으로 보이는 혼란이 아니라, 내부에서 조용히 일어나는 변화다. 깨어 있어야 할 이유가 사라지는 상태, 분별이 필요 없다고 느끼는 상태, 그리고 책임을 뒤로 미루는 것이 자연스러워지는 상태가 반복될 때, 성경은 그것을 위험한 징조로 묘사한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기술 환경은 인간을 더 악하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더 편안하게 만든다. 문제는 이 편안함이 인간을 죄로 유혹하기보다, 책임에서 이탈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우리는 더 이상 “틀린 선택”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선택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 간다.


판단은 여전히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판단의 무게를 실제로 지고 있는지는 점점 불분명해진다. 성경에서 가장 본질적인 질문 중 하나는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다. θ께서 아담에게 던진 첫 질문은 “네가 어디 있느냐”였다. 이것은 행동의 목록을 묻는 질문이 아니라, 존재의 위치를 묻는 질문이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판단의 자리인가, 아니면 판단을 위임한 자리인가. 책임의 자리인가, 아니면 설명 뒤에 숨은 자리인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내적 혼란은 신앙이 약해져서라기 보다, 분별의 자리를 유지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분별은 지식의 양과 비례하지 않는다. 오히려 분별은 멈출 수 있는 능력, 즉각적인 반응 대신 잠시 서 있을 수 있는 힘과 관련된다. 그러나 지금의 환경은 멈춤을 허락하지 않는다. 더 빠른 답, 더 매끄러운 설명, 더 그럴듯한 논리를 요구한다. 그 속도에 익숙해질수록,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고 책임지는 과정을 생략하게 된다. 기독교 신앙은 본래부터 통제를 위한 종교가 아니었다. θ은 인간을 로봇처럼 만들지 않으셨고, 모든 선택을 미리 결정해 주지도 않으셨다. 대신 인간에게 판단할 권한과 책임을 주셨다. 자유의 본질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능력이 아니라, 책임질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환경은 자유를 확대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실제로는 그 책임을 보이지 않게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고 있다. 우상은 언제나 노골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우상은 종종 “우리를 대신 인도해 줄 것”으로 나타난다. 금송아지는 θ을 부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불확실한 상황에서 책임을 대신 맡아 줄 대상으로 등장했다. 오늘날의 기술 역시 비슷하다. 그것은 신을 자처하지 않는다. 다만 “생각하지 않아도 되게”, “결정하지 않아도 되게”,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게” 만들어 준다. 문제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책임은 고통스럽다. 판단은 불편하다. 그래서 인간은 언제나 그것을 미루고 싶어 한다. 성경은 이 인간의 속성을 숨기지 않는다. 죄는 종종 악한 의도를 가진 행동으로만 이해되지만, 실제로는 책임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마지막 때의 위험은 사람들이 죄를 더 많이 짓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고 있다는 감각조차 흐려지는 데 있다. 통제 사회는 언제나 인간의 불안에서 출발한다. 인간이 스스로를 믿지 못할 때, 외부 통제가 강화된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이 제시하는 길은 다르다. 더 강한 규칙이나 감시가 아니라, 내부의 분별을 회복하는 것이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무엇인가를 더 하라는 명령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서 있는 자리를 떠나지 말라는 요청에 가깝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질서는 질서정연한 시스템이 아니라, 판단이 지켜지는 상태를 의미해야 한다. 질서는 인간을 억압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게 책임질 수 있도록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 기술이 판단을 대신하는 순간, 인간은 점점 자신의 자리를 잃게 된다. 엔드타임을 살아간다는 것은 공포 속에 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더 조용한 각성이 필요한 시기를 살아간다는 뜻이다. 요란한 거짓보다, 매끄러운 대체가 더 위험하다. 노골적인 악보다, 편리한 위임이 더 치명적일 수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라, 더 분명한 위치 인식이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지금 판단하고 있는가, 아니면 설명에 기대고 있는가. 나는 지금 책임을 지고 있는가, 아니면 구조 뒤에 숨어 있는가. 이 질문을 잃지 않는 것이, 기술이 넘치는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가장 현실적인 깨어 있음일지 모른다. 마지막 때를 산다는 것은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자리를 지키는 일이다. 판단의 자리, 책임의 자리, 그리고 θ 앞에 서 있는 인간의 자리. 그것이 무너질 때 문명은 아무 소리 없이 방향을 잃는다.


그러나 그 자리를 다시 인식하는 순간, 비록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더라도, 우리는 더 이상 길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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