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8일, 10일 차 기록
산타 루치아역에 들어가 오후 2시 무렵 열차를 탔다. 떠나온 도시에 대한 미련과 곧 있으면 만날 새 도시와 사람에 대한 기대가 섞여서인지 창밖 풍광은 평범하게 느껴졌다. C와의 메시지에 집중했다.
‘저 이제 열차 탔어요. 5시 반~6시 사이 도착할 듯해요.’
‘와 이제 오시는구나. 저녁 같이 드실래요?’
‘네네 그러죠 내린 뒤 어디로 갈까요?’
‘생각 좀 해보고 도착하실 때쯤 알려드릴게요 ㅋㅋ’
베네치아에도 밀라노에서도 유학생과의 저녁이었다.
베로나에서 내린 뒤 다시 밀라노행 열차로 환승했다. 내 자리 옆엔 아프리카계 승객 세 명이 마주 보고 앉아있었다. 창밖을 보고 핸드폰을 볼 뿐 그 사람들에게 시선을 다시 두진 않았다.
잠깐의 시간이 지난 뒤 제복을 입은 덩치 큰 사람들이 들어왔다. 검표원인가 싶었는데 경찰이었다. 경찰이 왜 열차에 탄 걸까 신고라도 들어왔나 싶어서 궁금증이 일었으나 바로 내 쪽으로 걸어오길래 호기심은 긴장으로 바뀌었다.
다행히 두 명의 경찰은 나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옆의 아프리카계 승객들을 상대로 무언가 질문을 했고, 승객들은 어떤 서류를 보여주고 대답했다. 경찰은 신중하게 살펴보고 몇 마디 더 하더니 떠났다.
이민자 관련으로 보인 조사가 끝난 뒤, 승객들은 등을 의자 등받이에 깊게 묻으며 긴 숨을 쉬었고 나 역시 잠깐 참았던 숨이 나왔다.
유럽에서의 열차 이동은 언제나 무언가를 동반했다.
옅은 파란 하늘 아래 때론 이질적이기도, 때론 익숙하기도 한 창밖 풍광을 보며 남은 이동시간을 보냈다.
오후 5시 30분쯤 열차는 밀라노에 들어섰다.
‘저 이제 곧 있으면 첸트랄레역에서 내려요. 내린 뒤 어디로 갈까요?’
‘내리고 그냥 계셔도 돼요 ㅎㅎ’
‘??’
식사하기로 해놓고 역에 그냥 있으라는 게 무슨 말일까.
10분쯤 더 지나 밀라노 첸트랄레역에 도착했다.
역의 활기와 분주함은 독일 대도시의 중앙역사와 비슷했으나 사람들의 옷차림이 달랐다. 열차들의 색상은 빨강, 파랑, 녹색, 연두까지 색색이 다양했다. 안내방송이 역사 내부에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 그중 의미까지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아텐치오네(Attenzione, 주목해 주세요)와 기본 단어 몇 개뿐이었지만 운율이 있어서 귀가 편했다.
C에게 다시 메시지를 했다.
‘저 방금 역에서 내렸어요. 계속 여기 있어요?’
‘저도 첸트랄레역 와 있어요! 출구에서 뵈어요.’
뜻밖의 마중이었다.
역사가 큰 데다 시선을 빼앗는 장식과 공간이 많은 터라 C가 말한 출구까지 가는 덴 15분이 더 걸렸다. 겨우 찾아서 나간 순간 중간 길이의 검은색 머리의 동아시아인 여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누군가 기다리고 있었던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안녕하세요. 여기까지 또 나와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저도 안에만 있기 답답해서 미리 왔어요. 사진부터 찍으실래요?”
“아... 네. 건물이나 풍경 사진은 가면서 찍으면 돼요”
“하하. 아니요! 본인 사진요! 제가 찍어드릴게요.”
성채와도 같은 큰 역사 건물이었지만, 굳이 내가 나온 기념사진까진 찍을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상대가 호의로 제안한 것이었다. 어색한 포즈로 몇 장이 찍혔다.
중앙역에서 두 블록 걸은 뒤 예약한 호텔에 체크인하고, 짐을 풀고 나왔다. 가는 길엔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간간이 부랑자나 노숙인들도 좀 보였다. 유럽 도착 첫날의 프랑크푸르트 역사 주변이 떠올랐지만, 이번엔 옆에 누군가가 있었다.
“그럼 저녁은 어디에서 드실까요? 이 주변에서?”
“뜨람 타고 좀 가면 제가 자주 가는 단골 식당 있어요. 거기까지 가실래요?”
“아네 그러죠 그럼. 근데 뜨람이 뭔가요?”
“트램요. 여기에선 뜨람이라 발음해요.”
새 도시에서 지하로 이동하기보단 지상으로 가면서 바깥을 보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아직 해가 지기 전이었고, 창밖으론 비교적 정돈된 유럽 대도시의 길가 풍경이 펼쳐졌다. 쇳소리를 내며 꽤나 덜컹거리는 트램 혹은 뜨람 안에 있는 건 낯설긴 해도, 친절한 안내자의 설명이 있었기에 괜찮은 관광 코스였다.
도착한 식당은 길가에서 보면 좁은데 들어가니 널찍했다. 가게 안 인테리어나 앉아서 먹는 사람들의 모습은 생소했지만 분위기는 익숙했다. 일부 손님들은 같은 테이블 내에서 뿐 아니라 테이블을 벗어나서도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직원 역시 이들 대부분과 안면이 있는 듯했다. 일반 관광객이나 여행자라면 지나칠, 말 그대로의 동네 식당이었다.
직원은 C와도 안면이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알아듣진 못했지만 대략 오랜만이야 반가워 이런 느낌.
“여기 어때요? 괜찮으세요?”
“분위기가 뭐랄까... 익숙하네요”
도움을 받아 메뉴판을 보며 몇 개를 골랐다. 맥주를 먼저 시키고 음식이 뒤에 나왔다.
맥주-채소류-고기-밀가루 음식의 정석적인 코스로 먹었는데, 맛보다는 대화가 먼저였다. 그녀의 전공과 그간의 유학생활, 사는 동네 이야기, 그리고 나의 여행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여행을 떠나오게 된 사정까진 말하지 않았고 프랑크푸르트에서 시작해 유럽 종단을 하며 돈을 뿌린 얘기를 조금 했다.
“와... 네덜란드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진짜 말도 안 되네요. 많이 당황하셨겠어요.”
“네... 뭐 좀 돈을 날리긴 했죠... 그래도 어떻게든 이동은 했네요”
돌이켜보면 그간의 열흘 중 일주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지금 내 눈앞엔 내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었다.
식사를 마친 뒤 지하철을 타고 밀라노 대성당, 통칭 두오모 성당이 있는 중심 지구로 이동했다. 지하철역에서 올라가자 해는 졌지만 아직 하늘엔 검푸름이 남아 있었다.
대성당은 같은 톤의 조명을 받아 깔끔하게 빛나고 있었다. 고딕 양식이 섞여 있어서 곳곳이 뾰족하긴 했지만 쾰른 성당과 비교하면 그래도 인간적이었다. 성당 앞 광장엔 에마누엘레 2세 동상이 있었는데 왕이 생각보다 키가 작은 게 인상적이었다. 그리곤 큰 규모의 갤러리아 쇼핑 거리를 걸었다.
사실 눈에 들어오는 건물이나 풍광보다는 귀에 들어오는 옆 사람의 말소리가 더 중요했던 거 같다.
한 시간 정도를 대성당 주변을 함께 걷고 구경했다.
“커피는 좋아하세요?”
그녀가 먼저 물었다.
“네 마시긴 해요. 그런데 밤에 마시면 바로 수면에 반응이 와서 저녁 이후엔 피해요.”
“아 그러시구나.. 유명한 이탈리아 스타벅스 있는데 가보시는 거 어떨까 싶어서요.”
“음.. 그럼 그냥 가보기만 할까요? 커피 말고 다른 거 시키면 되죠.”
대로를 따라 걷다 보니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통일된 건물들로 둘러싸인 교차로 건너편에 장엄하고 화려한 건물이 있었다. 설마 이게 카페고 그것도 미국 프랜차이즈인 스타벅스인 걸까 싶었다. 실제로 스타벅스였다.
들어가서 자리 먼저 찾으러 돌아다녔지만 금요일 밤 드넓은 카페 안 구석구석은 만석이었다. 마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인테리어 구경은 할 수 있었다.
다시 밀라노 두오모 대성당까지 걸었다. 밤 9시가 넘은 광장은 인적이 줄었고, 성당만 홀로 빛나고 있었다. 각자 숙소와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오늘 같이 돌아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구경 잘했어요.”
“저도 다니면서 즐거웠어요. 내일은 일정 있으세요?”
“아직 뭐 정하진 않았어요. 지도에서 보면서 대충 몇 군데 가지 않을까 싶은데.”
“그럼 저녁 이후에 홈 파티 오실래요? 내일 친한 유학생들 둘이랑 저녁에 집에서 놀기로 했거든요.”
“제가 껴도 될까요? 저야 괜찮긴 한데...”
“같은 한국인인데 어때요. 다들 반가워할 거예요. 몇 년간 저희끼리만 놀아서요. 와서 한국 얘기랑 여행 얘기 더 들려주세요.”
“네 그러면 그렇게 하죠. 연락드릴게요 다시.”
내일 하루도 C와 함께 할 수 있었다. 속은 기뻤지만 크게 티는 내지 않았다.
그리고 돌아갈 찰나였다.
무슨 생각으로 그 말을 꺼냈는지, 그 말을 꺼낸 게 잘한 건진 지금도 모르겠다.
“그럼 오늘은 집에 가서 뭐 하세요?”
“네? 그냥 좀 쉬다가 자겠죠....?”
“오늘 먼저 놀러 가 봐도 돼요? 얘기 더 하고 싶어서...”
말을 꺼내고도 순간 이건 아닌데 싶었다.
그녀도 순간 당황한 듯 보였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다가 답이 나왔다.
“그럼 그럴까요...? 간단히 와인 한 잔 하면서 얘기 더 해요.”
“네 좋아요. 제가 가는 길에 뭐 좀 사드릴게요.”
“괜찮아요. 손님이신데...”
“원래 누구 집 처음 놀러 갈 땐 선물 사서 가는 거라고 배워서요.”
뜨람을 타고 이동했다. 중심에서 벗어나 남쪽에 있는 주거지역이었다. 중간에 작은 규모의 마트에 들러서 방울토마토와 산딸기를 사 갔다.
C가 사는 건물에 도착했다. 육중한 철제 정문을 지나 계단 난간 사이에 설치된 좁은 1~2인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창밖 낮은 지붕 너머로 밤하늘이 보이는 방이 나왔다.
산딸기와 방울토마토, 그리고 치즈를 안주 삼아 와인을 마셨다. 밤에 단 둘이 있는 공간이었다. 대화는 생각보다 더 길어졌다. 지금의 일과 나중의 계획, 그리고 이곳에서 버텨온 이야기까지.
이번엔 주로 내가 들었다.
도중에 그녀가 물었다.
“다음 여행은 어디로 가실 거예요?”
“원래 베네치아 다음에 피렌체 가려고 했던 거라... 아마도 피렌체요? 그다음 로마나...”
“혹시 프라하는 계획에 있으세요?”
당연히 원래 계획엔 없었다.
애초에 알프스 북쪽으로 다시 넘어가는 건 꿈도 꾸지 않았다.
“음... 이탈리아 돌아보고 난 뒤엔 갈까도 생각했었죠.”
“그럼 나중에 같이 가실래요?! 제가 조만간 갈 거라서요.”
“아 네... 괜찮죠. 생각해 볼게요 그럼.”
처음 본 날 약속을 바로 할 순 없었기에 유보했지만...
그땐 그러고 싶었다.
그날 밤 잔 안의 와인은 꽤 빨리 비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