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 뒤돌아보게 된 도시

2022년 4월 8일, 10일 차 기록

by Rhi hyun


떠나는 날 아침은 대운하까지 산책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마침 화려한 역사 도시를 숨 쉬게 해주는 물류 현장을 목격했다. 화물트럭 대신에 화물보트가 운하변에 접안해 있었고, 그 위로 각종 물품과 커다란 바퀴 달린 수레가 실려있었다. 인부들이 물품을 하역한 뒤 수레에 실어서 다시 골목 곳곳으로 운반할 듯했다. 천 년 전이랑 크게 다를 바 없을 모습이 흥미로웠다.

현지인들이 주로 찾는 듯한 카페에 들어가 간단한 조식을 먹었다. 그 후 호텔로 돌아와 짐은 맡긴 채로 체크아웃했다. 마지막 방문지인 두칼레 궁전을 돌아보고 다시 와야 했다.



배달의 운하



익숙해진 좁다란 골목을 지나 광장을 가로질러 두칼레 궁으로 들어갔다.

입구에서 종교 성화와 조각상들이 맞이했다. 여기까진 납득했다. 베네치아가 중세 때부터 정교분리가 철저했고 종교보다 국가를 우선시한 나라였어도 일단은 가톨릭 국가였으니까.

더 들어가자 내부 공간 곳곳에서도 기독교 신성이 지배적인 건 의외였다. 대기실과 회의실 모두 위쪽 벽면에 입구와는 다른 성격의 성화가 걸려있었다.



목을 꽤나 꺾어야 한 사진
무릎 꿇은 할아버지들



베네치아만의 특징이라면, 성스러운 천사나 여신, 혹은 예수 그리스도 바로 아래 도제(베네치아 공화국 시절 국가 원수)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런 그림이 하나가 아니었다. 분명 왕국의 세습 왕들과는 다른, 공화국 지도자였음에도 그 권위를 종교에서 끌어오려 한 걸까.


가장 큰 대회의실로 들어서자 이번에도 단상 쪽 벽면을 가득 채운 압도적 크기의 유화가 나타났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중앙에 있고 수많은 천사들이 경배하는 모습이었다. 단순 종교화는 아니었다. 그림은 도제와 고위 관료들이 앉는 자리 뒤에 있었다. 단상 앞에 선 사람의 시선에서는 도제와 관료들의 존재가 바로 뒤의 천사들과 예수까지 곧장 이어지게 보이도록 치밀하게 설계된 구조였다. 도제가 앉는 좌석의 높이가 양 옆 고위직들의 좌석 높이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 것도 의도한 듯했다.

사법 재판의 공간도 같은 방식의 그림이 걸려있었다. 지도자가 아닌 고위 관료들마저도 신성과 바로 맞닿아 있었다.



국권신수설의 현장
우리도 신성하다


왕 개인도, 왕조도, 특정 가문도 아닌, 베네치아 국가 그 자체에 대한 권위와 숭배를 이끌어 내는 방식이었다. 종교를 권력에 이용하는 건 어디서나 있었다. 다만 베네치아인들처럼 이렇게 정교하고 독자적인 방식은 드물었다. 교황과 거대 제국들 사이에서 대등하게 살아남으려고 이 정도까지 했던 걸까.


‘이 사람들 정말 치열했구나’

두칼레 궁을 돌아본 뒤 하나의 감상이었다.


엄숙한 내부 공간을 내려와서 건물 밖 중정으로 나가자 다시 숨통이 트였다. 아무리 계산적인 시스템 속 사람들이라도 바깥공기는 쐬면서 일해야 했겠지 싶었다.



숨 쉬는 공간



궁을 나와 다시 광장으로 들어서니 금요일 낮 관광 중심지의 활기는 절정에 달해있었다.

대성당 입장을 위해 길게 줄 선 사람들 옆을 수북한 수염의 남성이 병맥주를 마시며 걸어갔다. 오전엔 없던 노점에서는 팔고 사는 흥정이 한창이었다. 누구는 서서 사진을 찍고, 누구는 걸으며 영상을 찍었다. 아이들은 언제나 그렇듯 뛰어다니고 있었다.

같은 공간을 저마다 다르게 느끼고 있었고 갈매기들은 끼룩거리며 날아갔다.


유럽 대표 광장 한편에선 70년대 미국 올드 팝 'Hotel California'의 피아노곡 연주가 서정적인 선율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중노년 관광객들의 향수를 자극하려 한 것이겠지만 그 선율은 30대 여행자에게도 스며들었다. 음악은 머무는 사람보다 떠나는 사람 쪽에 더 닿았다.


'You can check out any time you like, but you can never leave.'


대낮 광장의 활기를 마지막으로 느끼고 나니 발걸음이 약간 가벼워졌다. 해 질 무렵 저녁이었다면 무게가 좀 달랐겠지만.


다시 짐을 찾으러 호텔로 돌아가야 했다.

골목으로 들어서는 회랑에서 잠깐 뒤돌아봤다.

일곱 번째 산 마르코 광장이었다.



산 마르코, 안녕


떠나기 전 마지막



좁은 골목과 작은 캄포를 거쳐 호텔로 들어갔다. 체크아웃은 이미 끝낸 상태였고, 캐리어만 다시 찾아가면 되었다. 중년의 남성 프런트 직원에게 인사를 하고 나오려던 참이었다.


“이제 어디로 가시나요?”

직원이 물었다.

“밀라노로 가요. 친구가 있어서.”

친구가 될지 뭐가 될진 아직 모르지만 일단 아는 사람이긴 했다.


“먼 길 가시네요. 가기 전에 화장실이라도 이용하시는 건 어때요. 한결 편할 텐데”

“아... 그럴 수 있겠네요. 고마워요”


사실 용변이 급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말한 의도가 뭔지는 느껴졌다. 화장실로 들어간 뒤 잠깐 앉아있다가 물만 내리고 나왔다.


“그라치에(Grazie). 좋은 하루 보내세요.”

“밀라노에서도 즐겁게 여행하시길.”

다시 볼 일 없는 동아시아 관광객에게 친절한 몇 마디 말이었다.



Hotel C.


호텔을 나와 젤라토 가게에 들렀다. 전날 먹은 것보다 더 큰 사이즈의 것을 주문한 뒤 먹으며 리알토 다리로 갔다. 도착 첫날엔 다급하게 지나쳤던 랜드마크가 떠나기 직전엔 다르게 보였다. 새하얀 다리 위를 빼곡히 채운 사람들의 설렘과 웃음 띤 얼굴이 순간 부러웠다.


밀라노행 열차는 오후 2시에 출발 예정이었다.

수상버스를 타고 대운하를 거슬러 올라갔다. 한낮 운하변의 밝은색 건물들은 보여주기 위한 작품이 아닌, 사람 사는 집으로 보였다.


산타 루치아역 앞, 첫날 도착한 바로 그 청동 돔 성당 건너편에서 내렸다.

여행자의 시간은 바뀌었지만 장소는 그대로였다. 햇살을 받아 푸르게 빛나는 청동 돔도, 날아다니는 갈매기들도, 성당 계단에 걸터앉은 사람들도,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그대로였다.



10대 시절의 동경이 담긴 도시.

30대가 되어 어려운 시간을 잠시 비워 내준 곳.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그 모습을 10분 넘게 더 눈에 담은 후 돌아섰다.






처음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