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 머무름이 끝나가는 곳에서

2022년 4월 7일, 9일 차 기록

by Rhi hyun


당초 2박 예정이었던 베네치아 일정은 3박으로 늘었다. 광장 주변에 고풍스러운 객실이 있는 호텔을 찾아낸 뒤 바로 예약했다. 이 도시에서의 마지막 날 밤은 좀 화려한 공간에서 묵고 싶었고, 1박에 70유로까진 감당할 수 있었다.


밖으로 나와서 이번엔 아침 햇살을 마주 보고 걸었다. 전날 걸었던 카나레조 구역의 동쪽을 탐험했다. 인적이 드문 거리의 건물들엔 꾸미지 않은 시간의 흔적이 있었다. 닳고 녹슨 철문과 회반죽이 뭉텅뭉텅 떨어져 나간 상처가 거리 곳곳에 남아 있었다. 사람 발길 닿지 않는 구석엔 비둘기들만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좁고 낡은 골목을 따라 북쪽으로 걷다 보니 어느 순간 바다가 나왔고, 그 너머 멀리 섬이 보였다.





오전 10시 경의 무라노행 바포레토 정류장은 관광 중심지라기 보단 어느 작은 항구 도시의 여객선 선착장에 가까웠다. 가벼운 마음으로 배에 오른 후 한쪽에 앉아서 기다렸다.


건너편에 앉은 키가 크고 마른 체격의 여행자가 눈길을 끌었다. 머리는 며칠 감지 않은 느낌으로 떡졌으며, 가벼운 검은색 바람막이를 걸치고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저예산 배낭여행자였다.

'이 사람은 얼마나 아끼면서 돌아다니는 걸까. 아마 그간 돈 실수는 절대 없었겠지...' 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관찰했다. 그는 배낭에서 바나나 하나를 꺼내더니 뱃가에 걸터앉은 채로 먹기 시작했다.

‘아... 저걸로 식사가 되는 건가. 영양 보충이 안될 텐데...’

어느 동아시아인 여행자가 자신을 안쓰럽게 쳐다보는 걸 의식했는지, 그는 내 쪽을 보며 멋쩍은 듯 가볍게 웃었다. 그 직후 남은 바나나를 한입에 털어 넣고 먹어 치웠다. 속 마음이 들킨 것 같은 느낌에 나도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수상버스는 출발한 지 10분 만에 무라노섬에 닿았다. 길게 뻗은 운하 양쪽으로 2~3층 건물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멀리 떨어진 유럽의 도시, 그중에서도 독특하다는 베네치아에서 한 번 더 벗어난 섬이었지만, 바다를 낀 선착장과 물길에 접한 좁은 길, 낮은 건물들의 조합은 꽤 낯이 익었다.

어릴 적 자주 다녔던, 외가가 있는 전라남도 완도의 섬마을이 떠올랐다. 새로운 장소가 때로는 오랜 기억과 겹쳐지고 편안함을 가져다준다. 이번 여정에서의 첫 번째 경험이었다.


본섬에 비해 나지막한 지붕 선과 평일 오전인 걸 감안하더라도 드문 관광객들, 그리고 적당한 미세먼지로 옅은 파란 하늘, 거기에 친숙한 정취까지. 특별한 감흥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바로 떠나고 싶지는 않은 장소였다.

유리공예품 가게에선 저렴하면서도 상징적인 산 마르코 사자상을 10유로 정도에 샀다. 크기는 작지만 빛을 받을 때만큼은 영롱했다.


알록달록 섬마을



운하로 이어진 길이 끝나고 다리를 건너 무라노 북섬으로 넘어갔다. 관광객은 더 줄었고 현지인만 드물게 걸어 다녔다.

부둣가 길을 걷다 보니 본섬의 웅장함과는 결이 다른, 수도원인지 작은 성당인지 모를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을 마주했다. 중정으로 이어지는 문이 열려 있길래 조심스레 들어갔다. 외벽은 군데군데 떨어져 나갔으나 안쪽의 풀과 나무는 관리한 흔적이 있었다. 둘러본 뒤 중정에서 잠깐 쉴까 싶었지만 본채의 철문이 굳게 닫혀있고 인기척도 전혀 없기에 그냥 나왔다.





마을 안쪽 길로 걸어가니 텃밭이 나오고 지킴이 개가 보였다. 개는 이방인을 보고도 짖진 않고 쫄래쫄래 다가오더니 날 물끄러미 쳐다봤다. 몇 번 쓰다듬고 다시 걸었다.

너머엔 공원이 있었다. 초원이라고 말하긴 과장인, 넓게 트인 풀밭이 펼쳐졌다.

나무는 봄맞이가 느렸지만 땅에선 풀이 돋아났고 꽃이 피어있었다. 며칠간 돌로 만든 건물과 바닥, 그리고 바닷물만 봐서였을까, 흙으로 된 초록의 땅이 반가웠다. 벤치에 앉아 한동안 땅만 쳐다봤다. 현지 주민으로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걸어 지나가면서 내 모습을 보더니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녹색의 반가움



한적한 마을을 좀 더 둘러본 뒤엔 다시 본섬으로 돌아오는 수상버스를 탔다. 전날 동행이 소개해준 밀라노 지인과 처음 연락했다.


‘안녕하세요. 어제 소개받아서 연락드려요. 지금 베네치아 여행 중인 30대 백수입니다.’

‘ㅋㅋ 안녕하세요! 얘기 전해 들었어요. 친절하고 좋은 분이라고...’

‘제가요? 그냥 돌아다니면서 돈만 쓰는 중인데... 그분이 친절했어요’

‘ㅎㅎ 베네치아는 어떠세요? 저도 몇 번 갔었는데 진짜 예쁘죠?’

‘시골 항구치곤 볼만한 데가 많네요. 나름 예쁘기도 하고...’


C와의 첫 메시지였다.



생활



본섬에 복귀 후 일정을 이어 나갔다.

체크아웃한 호텔에서 짐을 찾은 뒤, 다시 수상버스를 타고 대운하를 내려가 광장으로 이동했다.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의 좁은 골목을 통과하고 조그만 집 한 채 크기의 캄포를 지난 뒤 새 호텔을 발견했다.

분명 예약한 건 호텔인데 중세 여인숙 느낌의 정문과 간판이 나오길래 멈칫했다. 막상 들어가니 그냥 호텔이었다. 체크인 후 올라가니 이번엔 아랍 부호 취향에 맞춘 듯한 황금빛 복도가 나와 당황했다. 대체 몇 번의 손길을 거친 걸까. 예약한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다행히 그 안은 베네치아였다. 중간 크기 샹들리에 조명 아래로 다마스크 무늬 벽지가 도배된, 과하지 않게 화려한 방이 나왔다.


A에게 사진을 보내며 반응을 유도했다.

‘이 로코코 스타일 호텔을 봐. 우스꽝스럽지 않아?’

‘아늑하고 예쁜데?’

원하는 답이 나온 것에 만족하고 잠깐 눈을 붙였다.



마트료시카 호텔


깨어나니 이번에도 예상 시간을 넘겼다. 낮잠이 저녁잠으로 이어졌다. 오후 6시가 넘어 다음번 핵심 목적지인 아르세날레(베네치아 공화국 시절 국영조선소 및 병기창)로 향했다. 호텔에서 조선소까지 뛰어가듯 빠른 걸음으로 갔지만 이미 입장 가능 시간을 훌쩍 넘긴 뒤였다. ‘바다의 도시 이야기’에서 중요하게 다뤄진, 지중해의 여왕 베네치아를 만든 핵심 동력원이었건만... 늦잠 덕분에 정문과 그 앞 조각상들만 구경할 수 있었다.


신상들의 위아래로 제각각의 사자들이 있었다.

날개 달린 산 마르코 사자, 경계하는 모습의 그냥 사자, 동양의 해태상 같은 늘어진 자세의 사자, 작고 마른 사자 둘까지, 다섯 마리의 사자들이 있었다. 사자의 얼굴 모습이 위압적이지 않고 느슨하고 나른하게 만들어진 건 이후 쇠락해 가던 시대를 반영한 것일까, 창작자의 개성이었을까. 잠깐의 고민 후 검색했다.


실제론 둘 다 아니었다.

문 앞 네 사자들은 베네치아가 오스만과의 전쟁에서 이긴 후 그리스에서 가져온 것들이었다.

전쟁에서의 약탈품이 대표 랜드마크의 장식이 되어 있었다.



베네치아식 꾸밈


광장 쪽으로 돌아가는 길에 난징식당이라는 중국 식당이 있길래 들어갔다. 운하와 물길로 유명한 쑤저우나 항저우가 아니라 왜 하필 난징일까 싶었지만 일단 들어갔다. 중국어로 인사하고 면 요리를 주문하니 가게 점원들이 반가워하는 반응을 보였다. 음식은 무난했다.


다시 부둣가를 걸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석양의 햇살이 때맞춰 습기를 머금은 공기를 만나 하늘 전체를 주황빛으로 적시고 있었다. 마침 해는 광장의 종탑 옆에 잠깐 머물렀다. 베네치아에서의 마지막 날 저녁이었다.



선물



수상버스를 타고 대운하를 올라가는 도중에 C랑 다시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그럼 내일은 언제 오시는 거예요? 그때 밀라노 구경 많이 시켜드릴게요 ㅋㅋ’

동행은 이미 C에게 내가 밀라노로 간다고 전달해 둔 상태였다. 사실 이날 저녁까지 아직 밀라노행 표는 사지 않은 상태였다. 좀 더 고민했다. 암스테르담에선 날씨를 보고 즉흥적으로 선택했다가 곤경에 처했었는데... 이번엔 어찌 될까.

분명 원래 계획은 베네치아 다음에 피렌체였다.

한편으론, 여정에서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크다는 걸 절실하게 깨달은 상태기도 했다.


고민하던 사이 수상버스는 산타루치아역 정류장에서 멈췄다.

‘내일 오후 5시 30분 전후로 도착하는 걸로 예매했어요. 그때쯤 뵈어요’

메시지를 보낸 후 역에 들어가 다음날 밀라노행 열차표를 발권했다.





다시 돌아갈 때는 리알토 다리 부근에서 내려서 걸었다. 관광객 느낌으로 젤라토를 사서 먹으며 호텔로 돌아왔다. 방 안에서 1시간 넘게 C와 메시지를 주고받고, 가끔 A에게선 밀라노에 대한 정보와 조언을 구했다.


밤 11시가 넘었을 때였다. 하루가 지나면 베네치아를 떠난다는 아쉬움이 몰려왔다.

도시가 완전한 어둠과 정적에 잠긴 시간에 호텔 밖을 나서 다시 산 마르코 광장으로 향했다.





골목의 구불구불함은 여전했지만 이젠 발이 길을 알고 있었다.


어두운 회랑을 빠져나오는 순간, 광장은 그대로였다.

산 마르코 대성당도, 종탑도, 광장을 둘러싼 세 건물도, 바닥의 돌도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조밀하게 켜진 불빛은 그대로 반짝였다.


사람은 없었다.

아이들의 움직임도, 관광객의 말소리도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지나가는 몇 명의 발소리만 들렸다.

서늘한 밤공기에선 아무것도 울리지 않았다.

광장은 문 닫은 후 시장과도 같았다.


베네치아에서의 시간은 그간 머릿속에 쌓여 있던 많은 것을 얼마간 씻어내 주었다.

이젠 떠나도 될 거 같았다.


다시 호텔로 돌아와서 다음 날의 일정을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