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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토란 Dec 16. 2020

엄마, 다시 태어나는 이름

  엄마가 된다는 건, 생각보다 많은 것을 감내해야 하는 지 그 땐 몰랐다. 

  출산 예정일을 3일 앞두고, 이제 진짜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초산은 예정일보다 좀 늦어질 수도 있다고 알고는 있었지만 나와 비슷한 시기에 임신을 한 친구는 이미 일주일 전 출산을 하고 조리원에 가 있었다. 출산이 무슨 100미터 달리기도 아닌데 순서가 무슨 소용이이냐 하겠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소위 베프였던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빨리 이 아이를 만나고 싶었다. 출산을 앞두고 휴직을 당겨 한 상태라 사실 집에 있는 시간이 무료하기도 했다. '무료'라는 단어가 그리 사치스러울지 그 땐 알지 못했다. '이제 품을 만큼 품었으니 얼굴 좀 보자!' 런닝머쉰 걷기, 엎드려 방 닦기 등등 인터넷에 떠도는 출산 앞당기는 법을 열심히 실천하면서 며칠이 지났다.

  

  2007년 11월 5일, 저녁. 헐렁한 임부복 아래로 뭔가 주르륵.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몇 달간 월경을 하지 않던 터라 뭔가 나의 생식기에서 분비되어  흐르는 느낌은 생소했고, 그 것이 양수라는 생각이 미치자 멈칫 했다. 하지만 당황하지 않고 남편에게 알렸다. 누구나 처음 겪는 일이었지만 차분한 나에 비해 남편은 어쩔 줄 몰라하며 이리저리 연락하기 바빴다. 회사에 휴가도 내야하고 어른들에게도 알려야 하니. 온 집 안에 새식구를 맞이한다는 들뜬 공기가 가득했다.  자연스럽게 출산 가방을 체크하고 간단히 샤워를 하고 큰 패드를  장착하고 병원 사거리 건너에 있는 설렁탕 집을 갔다.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들이 든든히 속을 채우 듯이 뽀얀 고기 국물에 언제 또 먹게 될지 모를 빨간 깍두기까지 야무지게 챙겨먹고 응급실로 들어갔다.

  아무리 직업이 간호사라지만 출산의 긴 여정은 내가 감당하기 너무 어려웠다. 이론과 실습과 실전은 달랐다. 모교 병원이라 아는 선후배들이 많아서 조심스러웠던 평소와 달리 그 날은 더 이상의 평정심이란 없었다. 이미 양수가 터져 버린터라 자궁 수축제가 투여되기 시작했고, 약물은 또 어찌나 빠르게 반응하는지 아이를 둘러싸고 있던 자궁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진통이라는 말은 정말 야무지게도 규칙적으로 다가왔다. 불수의적으로 움직이는 기관은 심장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나의 통제력을 이미 벗어나 비웃기라도 하듯 쉼 없이 나에게 육체의 고통이 어떤 건지 알려주고 있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평정과 수축의 사이클이 이어졌고 평정의 시간 조차도 마치 태풍의 눈 가운데 있는 것처럼 다가올 폭풍우를 위해 창문을 단단히 잠그고 집안을 재정비 하듯 나는 온 몸의 근육에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꼬박 하루가 지나고 아침이 되어도 아이가 나올 나의 문을 다 열리지 않았다. 내진만 수십 차례. 그러다 주치의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고 분만장으로 옮겨졌다. '이제 끝이 보이는구나...'  폭풍 같은 시간으로 기진맥진 한 상태지만 이제 진짜 클라이 막스가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 고통이 시간도 곧 종지부를 찍겠구나 싶으니 묘한 흥분도 일었다. 마른 수건 물기를 짜는 심정으로 힘주기를 수 차례, 아이를 위한 소아과 팀까지 대기하고 있었다. 아이가 나올 듯 말 듯 안되겠는지 같이 있던 인턴 선생님이 내 옆으로 와서 내 배 위에서 아이를 함께 밀어내 주었다. 그런데 '오 마이 갓!' 동아리 선배였다. 그 생각은 정말 3초! 출산의 고통이 심해 회음부 절개나 봉합은국소 마취 없이도 그냥 하기도 한다 했던가... 이론으로 배울 땐 '에이 설마!' 그건 너무 산모에게도 잔인한 일이 아닐까 했는데 그냥 개미가 무는 정도랄까. 딱 그만큼이었다.   

   진작에 시력 교정술을 하지 않은 것이 가장 후회되는 순간은 딱 그 때! 고도 난시였던 내게 아이는 선명히 보이진 않았지만 얼굴, 팔, 다리 너무도 건강한 모습에 눈물이 주르르 났다. 그 후 안경을 고쳐쓰고 본 아이는 너무나도 이뻤다. 처음 태어날 때 "응애" 하고 목청껏 울어 재낀 이후로 내내 눈을 감고 잠만 자는데도 너무 사랑스러웠다. 

  이후 아이와 나는 같이 성장하는 중이다. 출산의 고통은 글을 쓰기 전까지는 쉽게 복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이가 주는 기쁨은 너무 컸다. 내가 이렇게 맹목적이고 크나 큰 사랑을 받아도 되는 존재였던가 싶을 만큼 아이는 기쁨과 감사 그 자체였다. 물론 까꿍이 시절과 지금의 사춘기를 지나오면서까지 내 인격의 끝까 끝을 경험할 만큼 무수한 에피소드를 격었지만 지나고 보면 진짜 어른이 되는 과정을 아이를 통해 겪은 것 같다. 그런 과정 중에 내가 미성숙해서 아이에게 상처입히고 후회하고 반성하고 또 화내고... 하지만 단순한 쳇바퀴는 아니라고 자부한다. 조금씩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내가 조금 더 성숙해 질 수 있고 더 참을 수 있고 더 의연해 질 수 있는 것은 단지 햇수를 지나오면서 나이를 먹은 덕이 아니다. 그 중의 9할은 내가 엄마이기 때문이었다. 아이 키우기 힘들 다는 대한민국에서 엄마로 살아가기 버겁지 않나요? 질문하는 후배들에게 난 늘 명쾌하게 대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이 더 풍요롭길 원한다면 엄마가 되는 것을 추천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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