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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토란 Dec 16. 2020

어른과 으른 2편

생김치와 묵은지





  ‘어른’과 ‘으른’ 으른의 사전적 의미는 그저 어른이라는 단어의 방언이다. 하지만 일상에서 쓰이는 그 두 단어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어른보다 조금 더 숙성된 느낌이랄까? 일상에서 쓰이는 으른이라는 말은 그렇다. 사골 국을 끓여 내면 보통 처음보다는 두 번째, 세 번째 우려낸 사골 국이 더 깊고 그 색 또한 뽀얗게 우려 나는 것 같은 찐 맛의 어른.     


  며칠 전 남편과 사소한 다툼이 있었다. 다툼이라기보다 나의 일방적인 감정의 쏟아냄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듯하다. 갑작스러운 건강의 적신호와 그로 인한 휴직. 그로 인한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다시 평상심을 유지했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발단은 아주 단순했다. 여느 십 대 아이들이 그러하듯이 중등 딸아이의 무절제한 스마트 폰 사용에 대한 불만을 남편은 직접 해결하지 않고 나에게 이야기했다. 평소 아이의 훈육은 거의 내가 도맡아 하는 편이고, 우리 가족 모두 그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내 상황들이 만들어 낸 꾹꾹 억지로 덮어놓았던 나쁜 감정의 불똥이 애매하게 남편을 향했다. 

  “왜 나만 아이에게 악역을 해야 되는데? 그렇게 불만이면 직접 이야기해. 나만 나쁜 엄마 만들지 말고!” 

평소 나 답지 않게 격앙된 목소리로 남편을 향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쏟아냈다. 그 순간 남편이 내 묵은 감정의 하수구가 된 것이다. 억울할 만도 한 상황인데 남편은 그저 침묵으로 그 뒤죽박죽 거친 말들은 다 받아냈다. 물론 남편의 굳게 다문 입술에서 마음(心) 위에 칼(刀)을 올려놓은 참을 인(忍) 자가 보였다. 그 표정을 보는 순간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한 차례 감정의 분출이 끝나자 집안 공기는 어색함과 불편함으로 채워졌다. 아이는 자기 방에서 나오지도 들어가지도 못한 채 슬금슬금 눈치를 보면서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그 답답한 공기를 조금이라도 벗어나고자 공간의 분리를 위해 나는 방으로 남편은 그대로 거실에 남겨졌다. 그런데 이미 나의 이성은 돌아와 있었고 후회는 해 본들 어찌 못하는 변수였고, 사과만이 남았다. 하지만 불쑥 그 말이 입 밖으로 꺼내지지가 않았다. 아이에게 어렸을 적부터 수없이 훈육하던 덕목. 사과는 ASAP로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진리가 선뜻 실천이 안 되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답은 정해져 있는데도 참 쿨하지 못한 내가 미웠다. 어색해하던 아이는 내가 염려가 되었는지 삐죽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딸아이의 얼굴을 보니 뭔가 이 감정의 실타래를 풀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에 반갑고 고마운 맘이 일었다. 딸에게 고해성사를 하면 면죄부가 되는 것처럼 난 가끔 나의 감정이나 생각을 아이에게 잘 이야기하는 편이다. 지금의 복잡한 심경을 토로하니 명쾌한 열네 살 솔로몬 딸은 이렇게 말한다.

  “사과는 빠를수록 좋으니 지금 당장 해. 말로 하기 어려우면 톡이라도 먼저 보내”

비대면의 글은 말보다 용이하다. 그리고 굳이 주저리주저리 얼굴을 보고 말하지 않아도 결혼 15년 차에 접어든 우리 부부는 척하면 척이다. 그리고 스마트 폰 톡에는 이모티콘이라는 겸연쩍음을 한방에 걷어 갈 신박한 아이템이 있었다.     

  “그런데 엄마, 아까 네가 보기에도 좀 유치하고 말 안 되는 행동이었지? 근데 그거 다 받아주는 아빠 보면 정말 아빠 인성은 갑인 것 같아”

  “응. 엄마는 어른이고 아빠는 으른이라서 그래”

  아이의 명쾌한 정의는 가뜩이나 부끄러운 내 행동에 대한 후회에 의구심을 더했다.

  “그럼 으른이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된 개념인 건가? 그럼 엄마도 으른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거지?”

  “아니, 꼭 그건 상하위 개념은 아니야. 그냥 엄마는 어른만 해”

  라며 본인도 엄마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생경했었는지 웃어넘긴다.  

   

  갓 담근 김치도 김치고, 묵은지도 김치지만 그 맛과 기호성, 요리에 재료로 쓰일 때의 결과물은 다르다. 난 생 김치 남편은 항아리에서 몇 년 숙성돼 발효의 과정을 거친 김치다. 딸이 그렇게 아빠, 엄마를 정의 내려주니 뭔가 위안이 되면서도 ‘난 묵은지는 평생 못 되려는 건가?’ 싶기도 해서 씁쓸한 마음도 아주 조금 들었다. 

     

  어른이든 으른이든 아무려면 어떠랴! 최소한 어른답지 못한 어른은 아닐 테니 그게 어딘가! 그리고 으른보다 어른이라는 말이 주는 약간의 순수함, 허용되는 폭넓은 행동의 반경이 주는 편안함. 그 정도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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