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을 몇 년 하고 일이 손에 익고 익었다. 30대에 접어들면서 이제는 '무엇인가'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의 결은 좀 달랐을 수도 있지만 사실 이건 모든 직장인들이 하는 고민이기도 하다. 단계별로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이라는 관문까지 통과하고 나면 더 이상 정해진 숙제가 없다. 무엇인가를 이뤘다고 하기엔 모자라고, 은퇴를 고민하기에도 이른 나이. 열심히 앞을 보고 달렸는데, 더 이상 결승선이 없는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이는 시기기도 하다. 많은 직장인들이 업과 관련된 대학원에 가거나, 자격증을 준비한다. 자격증은 직업 관련된 것일 수도 있고, 의외로 공인중개사 시험을 많이 본다. 노후까지 생각해서 말이다. 물론 시험을 많이 본다고 했지,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는 안 했다.
나는 여전히 "진짜 삶은 환상적으로 스틱을 두드리는 드러머와 아름다운 문장을 쓰는 소설가, 미추를 꿰뚫는 예술가에게 있다" 믿던 때였다. 7~8년의 직장생활을 하며, 타인의 눈에 나는 꽤나 성실한 직장인이었지만 마음속엔 계속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과 다른 삶, 진짜 내가 머물 정류장이 있다고 믿었다.
그때 했던 고민 중 하나는 이직이었다. 직장인이 이직하는 이유는 많은 경우 돈 아니면 사람이다. 노동의 대가로서의 월급이 너무 작다고 느끼거나 혹은 같이 일하는 사람과 부대낄 때 많은 직장인들은 이직을 고민한다. 게다가 이제는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진 시대에 지금의 이 직장이 정년퇴직 때까지 나에게 곱게 월급을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때문에 많은 직장인이 사직서를 품에 안고서는 아니더라도, 불안감을 등에 지고 출근을 하곤 한다. 그럴 때 이직은 직장인이 월급을 올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회사 내에서 매년 정해진 연봉 상승률은 늘 비슷하기 때문에 BASE 금액을 올리지 않는 한 한 회사에서 드라마틱한 연봉 인상은 없다. 어차피 노동을 통해 임금을 받아 생활을 하고 노후준비를 한다면, 같은 기간 동안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이 이득이다.
비슷한 시기에 취직을 했던 대학 동기들과 비교해서 우리 회사 연봉이 그렇게 높은 편은 아니었다. 내가 만약 이직을 해서 연봉을 높인다면 선택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컨설팅 회사로 이직해서 SAP 컨설턴트가 되는 것이었다. IT 가 적성은 아니라고 하지만 SAP 기반으로 일을 하는 것은 재미있었다. 프로젝트하며 여기저기 출장을 다니며 일하는 것이 흡사 커리어우먼이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가슴에 파랑새를 품고 사는 방황하는 직장인으로서 좀 더 의미 있는 일을 찾고 싶었다. "내가 나일 수 있는 일"을 직업으로 갖고 싶었다. 자아실현은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이 아닌) 밤에 퇴근하는 그 일은 자아실현은 커녕 자아에 대해 생각조차 없어질 (지금보다)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내 고민이 무색하게 그 시장은 약간 사양 세이 기도 했다. 국내의 거의 모든 대기업은 이미 SAP 프로젝트를 끝냈기 때문에 더 이상 시장에 대형 프로젝트가 없었다. 컨설팅 펌에서는 SAP 관련하여 새로운 사람을 거의 뽑지 않았다. 사실 이 모든 것은 변명이기도 했다. 이직이 하고 싶었다면, 사양세가 아닌 기술을 공부하고 다른 곳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나는 이직을 위한 원서를 한 번도 내보지 않았다. 지금의 경력을 기반으로 넓힐 수 있는 공부를 할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다른" 일을 해보고 싶은 갈망은 있었으나 지금과 같은 방식의 직장생활이라면 변화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월급이 늘어난다고 해도, 그것은 삼겹살이 등심으로 변하는 정도의 변주일 뿐, '다른 삶'은 아니니 말이다.
그즈음 나는 개인적으로 심리학 공부에 빠져있었다. 심리학자 김태형 님이 진행하는 심리학 스터디에 자발적으로 다니기도 하고, 시장에 나온 수십 권의 심리학 책을 읽고 또 읽었었다. 심리학 책에 빠져들었던 이유는 하고 싶은 일이 없는 내가 답답했기 때문이었다. 모범생으로 해야 하는 것들을 성실하게 꾸역꾸역 해온 내가 대대견하기 보다는 한심했다. 책을 읽으며 나의 타고난 기질과 성향을 알아보고 , 자라온 환경의 영향을 분석했다. 그때의 나는 '나만' 불안하고 불행했다. 심리학 책은 불안하고 불행한 나에게 괜찮다고 니 탓이 아니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앞으로 잘살면 된다고 하면서. 서서히 나도 이러한 위로를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이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아닐까? 의미와 가치를 가지는 일말이다. 그러나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원에 가는 것은 무모하게 보였다. 흥미는 있는데 나에게 안 맞는 일일지도 모르고, 월급의 안정감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좀 사람답게 사는데 다시 돈에 쩔쩔매고 싶지 않았다. 재미있다는 이유만으로 무엇을 걸고 도전을 할 만큼 배포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좋게 표현하면 지극히 현실적이고 냉철한 사람.(그런데 현실적이고 냉철하면, 이직해서 연봉 올리고 재테크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파랑새를 쫓는 생활인이라니요.) 그러다 우연히 회사 전사 게시판에서 'OO 사이버대학교 등록금 할인'이라는 공지를 보았다. 우리 회사가 그 학교의 시스템을 유지보수하는데, 회사 특전으로 등록금을 할인해준단다. "상담심리학과"가 있는 학교였다. 대학원에 등록을 할까 하다가 일단 편입해서 학부 공부부터 하기로 했다.
이렇게 나는 셀러던트가 되었다. 평일에는 회사에서 "XX대리" 저녁과 밤에는 "OO학번 학생" 으로서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퇴근하고 책상에 앉아 강의를 듣고, 주말이면 근사한 북카페에 가서 공부를 했다. 오랜만의 공부는 재미있었다. 심리학 개론에서부터, 프로이트 심리학, 인지심리학, 상담이론까지 새로운 지식의 습득은 독자를 위해 출간된 책을 읽는 것과 달랐다.
꿈을 준비하는 직장인. 나는 그렇게 꿈에 한걸음 다가가는 것처럼 보였다.
셀러던트의 삶을 사는 동안 나는 회사에서 10년 차가 되었고, 결혼을 했고 엄마가 되었다.
타인의 돌봄을 삶에 들여놓고 나니 지금까지 내가 보던 세상과 다른 세상이 눈에 보였다.
아니, 세상을 바라보는 내 눈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