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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오페이퍼 Nov 14. 2023

모녀, 비극이고 희극인 관계

<사나운 애착>을 읽고


"내가 오늘 하루 종일 네 딸을 보니까 이렇더라. (중략)그러니까 이렇게 키우지 말고 저렇게 키워. 내가 너를 키워봐서 알잖아? 건성으로 듣지 말고 제발 잘 들어봐"

"엄마. 내가 알아서 할게. 내 딸은 내가 알아서 키워 "

"그래도 내가 생각하기에 이런 건 부모로서 안 좋은 태도니까 어쩌고 저쩌고..."

"엄마, 엄마 딸을 키울 때 그렇게 키워보지 그랬어. 손녀를 통해 엄마의 후회를 만회하려고 하지 말아 줘"


어쩌다 조카와 딸을 하루 봐줬던 엄마는 내게 아이에 대해 조언해 줄 말이 너무 많아 보였다.  아이를 데리러 가서 함께 먹던 저녁 식사자리에서도, 다음날 아침 9시에도 엄마 머릿속에는 온통 나에게 하고 싶은 말들로 넘쳐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엄마가 나에게 애타게 "하고 싶어 하는 그 말들"은 자신의 과거를, 후회를, 삶을 디폴트로 하고 있었다. 엄마의 언어는 언제나 자신에게 향해있어 들을수록 외로워진다. 


아이를 낳고 엄마에게 맡기지 않았다. 조카들을 돌봐주고 있어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도 했지만 가능했어도 아마 부탁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아이를 맡기는 순간, 나의 작은 직사각형(책을 읽으면 나옵니다.)이 바스러져 버릴 것이라는 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서른이 훌쩍 넘은 시점에도 나는 엄마라는 마취제를 들이마시고 취했고 밀실처럼 사람을 숨 막히게 하는 엄마의 존재감, 엄마라는 실체, 숨통을 틀어쥐는 고통받는 여성성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123쪽)  작가가 느꼈던 그 감정은 나에게 들러붙어 있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나는 내내 답을 찾고 싶었다. 이 벗어날 수 없음이 어쩔 수 없는 것인지, 나의 선택이었던 것인지에 대해서. 웃긴 표현이지만 내가 이 모양 이 꼴인 것에 대해 책임 소재를  찾고 싶었다. (내 삶에 대한 불만, 그것에 대한 책임을 엄마에게 돌리고 싶었다.) 그래야 내 삶을 설명하고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러나  애초에 질문이 틀렸다. 어쩔 수 없음도 그렇다고 온전히 나의 선택도 아니었다. 그냥 그 시절 나는 그렇게 살았던 것뿐이다. 그래서 더 이상 과거를 들여다보고 실타래를 풀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대신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엄마를 대하는 내 태도말이다.  "엄마의 그 말은 엄마의 의도와 관계없이 나에게 깊은 상처가 되니까 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라든가 "엄마 내가 알아서 할게"와 같은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침전되어 있는 죄책감을 더 깊이 감추어둔다. 그렇게 묻어버리면 사라지기도 한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사나운 애착> 은 사놓은지 한참 되었었는데,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하재영작가의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를 읽고 나니 좀 지치는 기분이어서 '엄마와 딸' 이야기를 읽고 싶지 않았다.  작가는 자신에게 엄마라는 역할로만 기억되고 관계를 맺었던  "엄마"를 인터뷰하고 그  삶을 다시 재구성하여 책을 썼다. 책을 쓰는 과정을 통해 작가는 '역할을 수행하되 자신의 삶이라는 감각을 잃지 않았던' 엄마를 발견한다. 엄마와의 인터뷰를 통해, 모든 인간의 삶이 그렇듯 엄마의 삶 역시 시대라는 조건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 와중에 희생의 프레임에 자신을 가두지 않은, 피해의식으로 자신을 채우지 않았던 엄마를 만난 딸(작가)은 그 과정을 통해 죄책감이 아니라 고마움으로 엄마와의 관계를 재정립한다. 엄마의 삶을,  엄마가 택한 태도들로 재정의하며 엄마 스스로조차 '참 별거 없네'라고 해버릴 수 있었던 시간들을 '이 정도면 나 잘 살았네'로 해석할 수 있게 한 것으로도 그 모녀에게 충분히 가치가 있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내가 엄마를 인터뷰하는 상상을 해봤다. 엄마에게서 내가 그동안 들었왔던, 이제는 외울 지경인 그 이야기들과 다른 결의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을까? 다른 해석을 하고 그래서 관계가 달라질 수 있을까? 아마도 나는 비슷한 얘기를 듣고 또 들을 것이고,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지지 못한다며 나 자신을 탓하고 있을 뻔한 상황이 떠올랐다. 


어느 날 이 책을 선물하고 싶다는 지인의 연락에 이미 있다고 답을 보내고 책을 폈다. 그리고 단숨에 읽었다. 나는 이 책이 마음에 든다. 왜냐하면 이 책은 끝끝내 실패하기 때문이다. 모녀는 함께 수없이 많은 산책을 해도,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균형점을 찾아낼 수 없어 결국은 외롭다.  일시적이기 때문에 임시방편에 불과한 화해의 지점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 과정이 반복되지만 끝내 합을 이루는 순간은 없다. 


책의 마지막에 나오는 모녀의 대화를 길게 인용해 보면 이렇다. (315쪽~318쪽) 



녀 : 이런 날 나한테도 사랑이 있으면 참 좋겠네. 

모 : 그럼 너 이제야 나한테 약간의 동정심이라도 들겠구나?

녀 : 뭐? 방금 머라고 했어?

모 : 이제야 네 아버지 돌아가시고 엄마 인생이 어땠는지 이해가 가겠다고. 그 모든 세월이 어땠는지 말이야. 사랑 없다고 괴로워하는 걸 보니 너도 이제 이해하지 않겠나 싶어서.

녀 : 왜 그 딴 소리는 하고 난리야? 왜 지금 그런 말을 하냐고? 또 사랑 타령이야? 아직도 사랑 운운이냐고. 나는 죽을 때까지 엄마한테 사랑 타령만 듣고 있어야 돼? 엄마한테 내 인생은 안 중요해?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 맞아. 그래, 나는 성공 못했지. 사랑도 못 이뤘고, 일도 변변찮고. 세상이 말하는 번듯한 인생 못살고 있어. 맞아, 사실이야. 남들처럼 과감하게 선택도 못했고, 끈기 있게 버티지도 못했고, 휘청거리기만 했어. 화가 났고 질투가 났거든. 그건 내가 닿을 수 없는 세상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나만의 생각이 있었다는 걸로는 아무런 인정도 못 받는 거야? 나도 내 삶을 살려고 나름대로 노력했다고. 그건 안 쳐준다는 이거야, 엄만? 말해봐, 아무것도 아니란 거야?

모 : 아니야, 아니다. 엄마 이야기야. 그때는 그랬다고. 뜻있어서 한 말 아니야. 넌 당연히 잘 살았지. 그건 세상이 다 알아줘, 그렇게 성내지 마라. 세게 말하려던 것뿐이니까. 엄마가 잘못 말했다. 이제 너한테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너 정말 모르겠니? 엄마한테는 사랑밖에 없었잖아. 내가 뭘 가져봤겠니. 아무것도 없었어. 아무것도. 달리 뭘 가질 수 있었겠니? 네가 인생 얘기하는 거 다 옳지. 다 맞는 말이야. 너한테는 일이 있었잖아, 너만의 일이 있잖아. 너는 여행도 많이 했고. 세상에나, 여행이라니! 넌 지구 반 바퀴를 돌아봤지. 난 여행은 꿈도 못 꿔봤는데! 나한테는 네 아빠 사랑밖에 없었어. 인생 살면서 누릴 게 그것밖에 없었다고. 그래서 그 사랑을 사랑했다. 아니면 뭘 어쩔 수 있었겠니?

녀 : 아니 그렇게 말한다고 달라지지 않아. 아빠 죽었을 때 엄마 겨우 마흔여섯이었어. 충분히 제대로 된 삶을 다시 살 수 있었다고. 엄마보다 훨씬 못 사는 사람들, 조건이 나쁜 사람들도 그렇게 했어. 엄만 그냥 아빠의 사랑이라는 개념 안에 머물고 싶어 했던 거잖아. 그게 미친 짓이었다고! 엄마는 30년을 사랑이라는 개념 안에서 살았다니까. 엄마도 삶이라는 걸 살 수 있었어. 



딸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틈엔가 그 흐름을 스틸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슬쩍 끼워 넣는 엄마라니.  엄마 입장에서는 황당하게 화를 내는 딸.   "나에게도 사랑이 있으면 참 좋겠네.' 라며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한 말이지만, 딸의 입장에서는 여러 가지 생각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을 수밖에 없는 말이다.  일과 사랑을 서로의 회피처로 삼는지도 모른 채 그렇게 살다가, 이제는 사랑에 관심도 없지만 그럼에도 일만 남은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위로받고 싶어 하는 딸에게  "이제야 네가 나를 이해하겠구나!" 라니.  딸을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이 엄마의 머릿속에는 없다. 자신은 항상 너무 슬프고 힘든 삶을 산 사람이니까. 딸에게 이해받을 수 있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급습하는 엄마의 대답이,  '너는 나를 이해해야 해.'를 기본값으로 한 우리 엄마를 보는 것 같았다.  엄마에게 내 마음을 얘기하다가 멈추고,  급 경청의 모드로 들어가서 말문을 닫고 위로로 끝나는 그 패턴. 대부분의 경우 나는 엄마의 마음을 받아주다가, 나에게도 이해받고 싶음의 요구가 있음을 포기하기 못할 때 또는 소멸에의 위협이 거세게 압박 들어와 숨조차 쉬기 힘들어질 때,  미친년처럼 돌아버렸다.  그래서 엄마는 가끔 나에게 '내가 너에게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그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라고 항변하곤 했다.  작년 어느 날 나는 결국 엄마에게 선언했다. 더 이상 나에게 과거에 얼마나 불행했는지를 설명하는 건 그만두어달라고. 그리하여 지금은 소강상태인데, 사실 이게 언제까지 유지될지 모르겠다. 나는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이 거리감이 엄마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일 수 있으니 말이다.  지구상의 대다수의 엄마와 딸 관계는 이 인정투쟁(?)의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정상일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보는 내 삶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엄마에게  내 존재자체로 인정받고 싶었다. 엄마는 가끔 "너는 좋겠다. 네가 부럽다."라는 말을 하는데, 그 말이 실은 좀 서운하다. 좋게 생각하자면 '네가 나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라는 내 삶에 대한 인정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그보다는  본인이 얼마나 불행한지 거리낌 없이 털어놓아도 받아주어야 한다는 압박으로 다가온다.  뭘 못해줘서 미안하다라던가, 그래도 이만큼 자라줘서 고맙다던가라는 엄마의 표현들은,  스스로의 삶에서 그나마 나은 부분으로 평가할 수 있는 삶의 결과물로서 나를 바라보는 것 같다.  난 엄마가 나를 볼 때 미안함, 고마움과 같은 감정 너머에  '네가 거기 있구나. 네 삶을 고군분투하며 살아가고 있구나'라는 그런 시선을 주길 바랐다.  그러나 타인의 삶을 마음으로 둘러볼 수 있는 건 여유에서 나오는 감정이란 생각이 들고 나니 모두가 가능한 건 아니지 싶었다. 내 삶을 해석하는데 모든 에너지를 다 쓰고도 모자란 사람에게 타인의 존재를 존재로 봐달라는 말은 가 닿을 수 없다.  이제는 엄마와의 관계에서 더 이상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과 그것이 충족되지 않아 생기는 원망은 내 삶을 너무나 쉽게 피해자서사에 가둬버린다. 게다가 엄마가 자기 자신의 삶에 매몰되어 있는 거처럼 나 역시 엄마 입장에선 그런 딸로 보일 것이다.  서로를 이해할 수 없어도 온전히 외면할 수 없다는 점에서  모녀관계는 희극이면서 비극이다. 나중에 내 딸이 20~30년쯤 후에 이 책을 읽으면서 나와 같은 입장의, 비슷한 결의 글을 쓰고 있을 것 같다. 그때 가서 변명해지고 싶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사는 게 목표다. 


책에서 인상 싶었던 문장들을 아래에 따로 메모했다. 


(25쪽) 엄마는 여기가 아닌 다른 세상, 진짜 세상이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가끔은 당신이 그 세상을 원한다고 생각했다. 아주 열렬하고 절실하게, 엄마는 집안일에 열중하다가도 갑자기 모든 동작을 일제히 멈추고, 한없이 길게 느껴지는 몇 분 동안 싱크대를, 바닥을, 스토브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세상이 어디 있는데? 어떻게 가야 하는데? 그게 대체 뭔데?


(71쪽) 이런 날씨 참 좋아! 어떤 예측 없이 내 안에서 막연한 기대감이란 녀석이 오래가지 못한다. 그대로 곧장 또렷하게 올라오지 않고 무엇 대문인지 중간에 모양을 바꿔 다시 안으로 방향을 틀더니 시들시들해지다 명을 다해버린다. 우울하게도 내게는 참으로 익숙한 과정이다.


(122쪽~123쪽) 몇 년 동안 나는 이 꿈에 해석 같은 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빠를 문밖에서 기를 쓰고 안으로 끌어오려 했던 이유가 죄책감이나 엄마를 향한 경쟁심 때문이 아니라 엄마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어서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엄마로 뒤덮여 있었다. 엄마는 어디에나 있다. 내 위아래에 있고 내 바깥에 있고 나를 뒤집어봐도 있다. 엄마의 영향력은 마치 피부조직의 막처럼 내 콧구멍에, 내 눈꺼풀에, 내 입술에 들러붙어 있다. 숨을 쉴 때마다 엄마를 내 안에 들였다. 나는 엄마라는 마취제를 들이마시고 취했고 풍요로우면서도 밀실처럼 사람을 숨 막히게 하는 엄마의 존재감, 엄마라는 실체, 숨통을 틀어쥐는 고통받는 여성성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159쪽~161쪽) 그 공간이란 뭘까, 내 이마 한복판에서 시작돼 가랑이에서 끝나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 공간은 내 몸만큼 넓기도 하고 화살구멍만큼 좁아지기도 한다. 생각이 자유롭게 흐르는 날이면, 그리고 더 깊이 생각할수록 명확해지는 날이면 감사하게도 이 공간은 무한히, 아름다운 날씨처럼 확장된다. 그러나 불안과 자기 연민이 치고 들어오는 날이면 쪼그라든다. 얼마나 삽시간에 쪼그라드는지! 이 공간이 넓어져 완전히 자리를 잡으면 나는 그 안의 공기를 맛보고 또 느낀다. 나는 숨을 고르며 천천히 호흡한다. 마음은 평화롭고 기대감에 차서 사는 게 즐겁고 어떤 영향력이나 위협에서도 놓여난다. 그 어떤 것도 나를 건드릴 수 없을지니. 나는 안전하다. 나는 자유롭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 생각과의 전쟁에서 지면 경계선은 좁아지고 공기는 오염되고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다. 사방이 수증기와 안개뿐이다. 숨쉬기가 어려어 진다.  (중략) 하지만 엄마는 알아듣지 못한다. 내가 지금 비꼬고 있는 줄도 모른다. 지금 나를 나자빠지게 했다는 것도 전혀 모른다. 내가 엄마의 불안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엄마의 우울함에 완패해 버렸다는 사실을 조금도 알지 못한다. 어떻게 알겠는가? 엄마는 내가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데. 엄마에게 말할까. 그건 죽음과도 같다고, 내가 여기 있는 걸 엄마가 모른다는 게, 절망과 혼란만이 가득한 눈으로 그저 멍하니 날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이, 서른일곱 살 먹은 이 여자아일 못 본다는 게 슬퍼서 죽고 싶어 진다고 말을 할까? 엄마는 또다시 언성을 높이겠지. "넌 날 이해 못 해. 여태껏 한 번도 이해한 적이 없어!"


(176쪽) 엄마는 내게 더 고차원적인 인생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사실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는 게 당신이 최선을 다해 얻어낸 고차원적 인생이었다. 우리는 모두 생긴 대로, 자기 욕구에 따라 살뿐이다. 네티는 유혹하고 싶어 했고, 엄마는 고통받고 싶어 했다. 나는 책을 읽고 싶었다. 우리 셋 중 어느 누구도 스스로를 잘 다스리고 절제하여 이상적이고 정상적인 여자의 삶을 성공적으로 추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실 우리 셋 중 어느 누구도 그 삶을 성취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적인 여자의 삶이라는 개념은 우리를 절대 놓아주지 않고 매년 다달이, 날마다 우리를 더 깊은 갈등과 혼란 속으로 밀어 넣을 뿐이었다. 삶에 대한 확신이 약하면 약할수록 자기 방식이 옳다고 독단을 부리게 된다. 우리는 각자 자기가 특별하다고, 다르다고, 더 숭고한 목적에 헌신할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서로를 분리시키면서 연민도 함께 거둔다. 남몰래 다른 사람에 겟 마음에 들지 않는 특성을 수집하기 시작하고 그들과 자신을 더욱 열심히 분리하면서 마치 나와 너의 이 차이가 구원이라고 되는 줄로 착각한다. '하나님 가 삼합니다. 나는 안 저러니 다행이야.' 타인을 보며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혼잣말하지 않는가. 그러나 이렇게 판단을 한 댓 자 삶이 개선되는 것 아니다. 우리는 환상에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분노에서도 자유로워지지 못한다. 단단한 껍질 아래에서 노여움에 차 조용히 부글부글 끓고 있을 뿐이다. 이 억제되지 못한 노여움이 우리를 고갈시키고 죽이기도 한다.


(194쪽~196쪽) 엄마는 당신이 이 생애에서 얻고 싶은 것, 당신에게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 그것을 얻지 못했고, 그렇다고 느끼는 것 자체를 의무로 여기며 불행이라는 먹구름 밑으로 사라져 버럈다. 그 시커먼 구름 밑에서 무력하게, 툭 건드리면 깨질 것처럼, 동정과 연민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으로 남아 있기로 한다. 누군가 엄마의 그 지독한 우울함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겐 폭력이 된다고 하자 엄마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엄마의 입과 눈은 상처와 분노로 번들거렸다. "어쩔 수가 없단 말이야. 내 기분이 이런 걸 어쩌란 말이니. 나는 내 기분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어." 하지만 내삼 당신의 우울한 상태를 예민한 감성, 강렬한 정서, 숭고한 영혼의 표시라고 여긴다. 당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고, 인간에겐 최소한 상호관계가 필요하며 그 최저 수준 밑으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생경하기만 할 뿐이다. 엄마는 당신의 악착스러운 불행이 어떤 면에서 상대방에 대한 비하이고 판단이라는 사실을 읽지 못한다.  (중략) 반면 나는 모든 것을 원한다. 무엇이 됐건 원한다. 나는 엄마에게 가끔 발을 구르며 화를 내고 따진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나도 내면은 공허하고 나른하며 집에 있으면서 점점 더 나른해지고 멍청해진다. 


(250쪽) "비난이나 칭찬 없이, 수용이나 반발 없이 사물을 관찰할 수 있어야 해" 이러한 문장들도 정신의 일시적 즐거움을 느꼈을지언정, 그는 이를 더 심오한 사고로 발전시키지도 생활과 연결시키지도 못한 채 제한적인 의미만 지지하게 탐구하다 말았다. 그의 지성은 주요 교차역까지 다다르지 못하고, 절단된 철로의 끝과 끝만 왔다 갔다 하면서 운행을 흉내 내는 한 칸짜리 기차 같았다.  


(272쪽) 일어나서 일기를 썼다. "사랑이란 수동적인 감정이 이끄는 기능이며 만족스러운 확신보다는 이상에 의지한다. 사랑이란 우리가 태어났을 때의 원초적인 자세라 할 수 있다. 반면 일이란 적극적이고 표현적인 삶의 기능이며 아무런 결과를 내지 않는다 해도 행동하는 자아가 존재했었다는 사실만은 여전히 남는다. 상상했던 삶에 대한 접근을 부정당할 때 사람은 더 크고 깊게 사랑을 추구할 수 있다."


(297쪽) 왜요? 그가 물었다. 나도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왜 그 어둡고 좁은 공간을 떠나지 못하지? 나는 엄마 얼굴이 그 안에서 떠올랐다. 보드랍고 여리고 똑똑하지만 슬퍼 보이는 얼굴을 한 엄마가 몸을 내 쪽으로 기대고 있었다.


(300쪽) 그날 저녁 내내 슬프고 고요하고 무거운 무언가가 줄곧 엄마에게 내려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오늘 밤 엄마는 무척이나 어여쁘게 보인다....(중략) 하지만 지난 세월은 엄마를 엄마만의 세계로 끌고 가고 눈에는 다시 그 혼란이 찾아온다. 엄마를 놓아주지 않는 저 끈질 간 삶이라는 혼란.


(309쪽) "그래 맘대로 하든지." 나 하는 짓이 어찌나 마음에 안 드는지 목소리까지 떨린다. 엄마의 오만, 엄마의 경멸, 엄마에게서 결코 떨어지지 않을 기질, 절대적으로 엄마 곁에 머물러 있을 것들. 언어의 상징이요 존재의 숙어로 이것들이야말로 엄마의 자아를 완성한다고 믿는다. 타인을 경멸하고 무시하는 건 불쾌한 일에서 헤어나는 엄마만의 방식, 당신과 타인을 분리하는 방법, 옳고 그름을 하는 법, 당신의 주장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방식이다. 그 순간 엄마의 삶이 이해되면서 묵직한 돌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만 같다. 


(311쪽) 엄마와 나는 더 이상 얼굴을 가까이 맞대로 있지 않는다. 드디어 어느 정도의 거리감이 영구히 성취되었다. 나는 우리 둘 사이의 거리를 흡족하게 엿본다. 약간의 공간이 나에게 이따금 찾아오는 일용한 기쁨을 가져다준다. 내가 나로 시작해서 나로 끝날 것이라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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