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능은 어디에 있는가

AI가 되살린 질문 : 똑똑함은 개인의 자산인가, 관계의 결과인가

by Nomadist

0. 스스로 문제 푸는 능력


"아빠, 이거 뭐야?"


엄마가 내 준 더하기, 빼기 숙제를 하다가 답을 못 찾고 헤매던 딸이 저에게 묻습니다.


"딸, 그건 스스로 풀어야지."


엄마 몰래 힌트라도 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스스로 생각해서 푸는 능력을 길러주고 싶었습니다.




1. 항해사의 머리가 아니라, 함교 전체가 생각한다


분산 인지: 지능은 폐쇄된 시스템이 아니다


인지과학자 에드윈 허친스는 1990년대 미 해군 팔라우호의 함교를 연구하며 중요한 발견을 합니다. 배가 항구에 들어올 때, 그 복잡한 항해 계산을 수행하는 것은 개별 항해사의 두뇌가 아니었습니다. 나침반을 읽는 사람, 해도를 펼치는 사람, 계산을 하는 사람, 그들 사이를 오가는 정보, 그들이 사용하는 도구들 -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인지 시스템으로 작동했죠.

허친스는 이를 '분산 인지(Distributed Cognition)'라고 불렀습니다. 지능은 개인의 두뇌라는 폐쇄된 시스템 안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람과 도구, 환경 사이의 접점에 분산되어 실재합니다. 함교라는 시스템 전체가 '압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서 피어나는 생각들


프랑스 철학자 질베르 시몽동은 한 발 더 나아갑니다. "나"라는 개인은 처음부터 완성된 채 존재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는 개체화 과정의 결과라는 거죠. 시몽동이 주목한 것은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끊임없이 생성되는 '상호개체적(transindividual)' 관계였습니다.

누군가와 깊은 대화를 나눌 때, 혼자서는 결코 떠올리지 못했을 생각이 튀어나온 경험이 있을 겁니다. 그 통찰은 내 것도, 상대방의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두 사람 '사이'에서 생겨난 것이죠. 재즈 뮤지션들의 즉흥 연주처럼, 지능은 관계 속에서 함께 사유하는 과정 속에서 계속해서 생성됩니다.




2. AI와의 협력이 드러낸 진실


개인 능력과 협력 능력은 별개다


2025년 발표된 논문 'Quantifying Human AI Synergy'는 이러한 철학적 통찰을 실증적으로 뒷받침해 줍니다. 연구진은 667명이 AI와 협력하여 문제를 푸는 과정을 분석했습니다.

연구 결과, 혼자서 문제를 잘 푸는 능력과 AI와 협력하여 문제를 잘 푸는 능력은 별개였습니다. 개인 능력의 뛰어남과 협력 능력의 뛰어남은 서로 다른 차원의 능력입니다.


관점 취하기: 상대를 읽는 만큼 지능은 확장된다


연구는 협력 능력이 높은 사람들의 공통점도 밝혀냈습니다. 그들은 상대방의 관점을 추론하고 거기에 맞춰 자신의 행동을 조정하는 '관점 취하기(perspective-taking)'에 뛰어났습니다.

이 협업 지능은 고정된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상대의 맥락을 읽어내는 순간마다 유연하게 변동하는 동적인 과정이었습니다. 지능은 고정된 개인의 속성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입니다.




3. 지능의 새로운 형태: 유동하는 능력


어제는 똑똑했던 내가 오늘은 아닐 수도 있는 이유


연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관점 취하기 능력이 사람마다 다를 뿐만 아니라, 같은 사람 안에서도 순간순간 변동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한 사용자가 첫 번째 질문에서는 AI의 맥락을 깊이 이해하려 노력했다가, 두 번째 질문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피곤하거나, 급하거나, 혹은 질문이 덜 중요하게 느껴지면 협력 지능이 일시적으로 낮아집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미세한 변동이 즉각적으로 결과에 반영된다는 겁니다. 사용자가 AI의 관점을 고려하는 순간의 노력을 놓치지 않고, AI는 더 나은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반대로 사용자가 AI에 대한 고려 없이 일방적으로 질문을 던질 때, AI의 응답 품질은 떨어졌습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지능 개념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잠깐 노력한다고 해서 IQ가 실시간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학업 능력도 상대적으로 고정적이죠. 하지만 협력 지능은 순간의 맥락, 노력, 주의에 따라 실시간으로 변동하는 과정입니다.


AI, 나의 인지 상태를 비추는 거울


사용자의 순간적인 인지 상태 변화가 AI의 응답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AI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인지 상태를 증폭하는 거울이라는 의미입니다.

계산기는 내가 피곤하든 말든 같은 답을 줍니다. 하지만 AI는 다릅니다. 내가 더 세심하게 질문하면 더 정확한 답을 주고, 성급하게 던진 질문에는 피상적인 답을 내놓습니다. AI는 나의 협력 의지, 맥락 이해 노력, 관점 취하기 능력을 실시간으로 반영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심오합니다. AI와의 협력에서 성과는 AI의 성능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 순간 사용자가 얼마나 협력적 인지 상태에 있는지가 결정합니다. 마치 거울이 나의 모습을 비추듯, AI는 나의 인지적 태도를 증폭해서 되돌려줍니다.


거울을 보며 자세 고쳐 잡기


여기서 흥미로운 역설이 발생합니다. 인간-인간 협력에서는 양쪽 모두 상대방의 관점을 추론하고 이해하려 노력합니다. 하지만 인간-AI 협력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사용자는 AI의 작동 방식을 추론합니다. "이 AI는 구체적인 예시를 주면 더 잘 이해하겠군", "내 배경을 먼저 설명해야 맥락에 맞는 답을 주겠지". 반면 AI는 사용자의 마음을 추론하지 않습니다. 사용자가 제공한 정보를 처리할 뿐, 왜 그렇게 말했는지, 무엇을 기대하는지를 추론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협력이 성립합니다. 아니, 오히려 이 비대칭성이 새로운 형태의 지능을 만들어냅니다. 사용자가 일방적으로 AI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고 그에 맞춰 조정하는 과정에서, 혼자서는 도달할 수 없었던 통찰에 이릅니다.

이것은 허친스의 함교에서도, 시몽동의 상호개체성에서도 다루지 않았던 새로운 현상입니다. 한쪽만 상대를 추론하는 비대칭적 관계에서도 시너지가 발생하는 협력. 이것이야말로 AI 시대가 드러낸 지능의 새로운 형태입니다.




4.시험지가 아니라 대화 속에서


벤치마크의 함정


AI 개발자들이 최근 인식하기 시작한 문제가 있습니다. 현재 AI를 평가하는 주요 방식인 벤치마크는 AI가 혼자 얼마나 정확하게 문제를 푸는지를 측정합니다. 미리 정해진 질문에 정답을 맞히는 능력이죠.

문제는 이런 정적인 테스트에 최적화된 AI 모델들이 실제 협력 상황에서는 제한적인 능력을 보인다는 겁니다. 실제 사용 환경에서 중요한 것은 사용자와 함께 얼마나 효과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지인데, 이 두 가지는 다른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연구자들은 이제 새로운 기준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단순히 정답을 얼마나 많이 아는가가 아니라, 사람과 얼마나 잘 협력할 수 있는가를 측정해야 한다는 겁니다.

사람의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고의 아이디어는 샤워를 하다가, 산책을 하다가, 누군가와 수다를 떨다가 떠오릅니다. 환경과 상호작용할 때, 타인과 대화할 때 통찰이 찾아옵니다. AI 시대는 역설적이게도 이 오래된 진실을 새삼 상기시킵니다.




AI 네이티브의 똑똑함


엄마가 잠깐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딸은 AI 스피커에게 달려갑니다.


"헤이 카카X, 이거, 답이 뭐야?"


역시 AI 네이티브의 접근법은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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