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재조립한 문화, 증발하는 맥락
유튜브 영상을 넘기다 한국 문화를 소개하는 한 쇼츠에서 손가락을 멈췄습니다. 한복을 입은 가족이 제사상 앞에 모여 앉아 있는데, 병풍도 아니고 한자 족자가 걸려 있었습니다.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제사상이 아니라, 어색한 자세로 서로에게 절을 하는 와중에 할아버지는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고 있습니다. 한국식 인사라며 합장하는 할머니, 그리고 '지국크선' 비슷하게 쓰인 뜻 모를 간판까지...
AI에게 '한국 전통 문화', '제사', '한복' 같은 키워드만 제시하고 검증도 없이 만들어진 결과물일 겁니다. 한국을 묘사하지만 묘하게 한국이 아닌 장면들, 문화적 맥락에서 벗어난 조합들이 '한국 문화'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AI는 인터넷에 흩어진 수십억 개의 이미지와 텍스트를 학습해 확률이 높은 패턴의 한국 문화 이미지를 만들어 냅니다. 한복이 많이 등장하면 한복을, 절하는 장면이 빈번하면 절을, 한자가 자주 나타나면 한자를 조합하겠죠.
하지만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것이 빠집니다. 문화는 단순히 '얼마나 자주 등장하느냐'는 숫자가 아닙니다. 제사에 족자가 아니라 병풍이 어울리는 이유, 한국식 인사에서 합장이 일반적이지 않은 이유는 데이터베이스에 저장할 수 있는 '사실'이 아니라 오랜 시간 형성된 '문법'의 문제입니다.
시간, 공간, 신체성, 사회적 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문화의 두터운 맥락은 통계적 평균으로는 포착되지 않습니다.
문화인류학자 클리포드 기어츠는 문화를 '의미의 그물망'이라고 불렀습니다. 문화는 단순히 행위나 사물의 집합이 아니라, 그것들이 특정 맥락 속에서 의미를 가지는 복잡한 이해의 체계라는 것이죠.
'절'이라는 행위는 누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설날 아침 어른에게 세배하는 절과 장례식에서 고인에게 올리는 절은 같은 몸짓이지만 다른 행위입니다. 결혼식에서 신랑신부가 하는 절은 또 다릅니다.
AI는 이 미묘한 차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신체적 경험이 없고, 시간의 흐름을 살아내지 못하며, 사회적 관계 속에서 학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AI에게 '절'은 그저 '특정한 각도로 상체를 숙이는 자세'일 뿐이죠. 절의 각도는 물리적 수치가 아니라 관계의 깊이입니다. 데이터의 빈도와 확률만으로 재구성된 한국 문화는 실제 한국인이 살아가는 문화의 생명력과는 거리가 멉니다.
미국 빅테크 기업의 AI가 만드는 이미지들은 '서구의 시선'을 반영합니다. 온라인에 존재하는 '한국 문화' 이미지도 상당수가 서구인 관점에서 촬영하고 공유한 것이 높은 비중을 차지할 겁니다. 그들의 카메라는 종종 이국적이고 전통적인 요소를 강조합니다. 한복, 갓, 절, 한자로 가득한 풍경 같은 것들 말이죠.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에서 서구가 어떻게 동양을 '다른' 것, '낯선' 것, '전근대적인' 것으로 규정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했는지 비판했습니다. AI는 이런 역사적 편향을 데이터로부터 학습하고, 다시 재생산합니다. 2024년 연구자 리다 카드리와 동료들은 텍스트-이미지 AI 모델이 남아시아를 묘사할 때 먼지 쌓인 도시와 빈곤의 이미지로 고착시키고, 시간적으로 정체된 과거의 모습을 반복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한국 문화도 마찬가지입니다. AI가 만든 한국은 현대 도시의 모습이 아니라, 서구인들의 상상 속 '한국'에 가깝죠. 문화의 맥락이 증발한 자리에 '타자가 바라보는 우리'의 통계적 요약본이 들어간 겁니다.
2024년경부터 'slop'이라는 단어가 널리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가축 먹이‘를 뜻하던 단어가 이제는 'AI가 대량 생성한 저품질 콘텐츠'를 가리키게 되었죠.
'지국크선' 비슷한 간판 글자처럼, 껍데기만 모방하고 의미는 없는 콘텐츠가 범람하고 있습니다. 맥락 없이 쏟아지는 'AI 슬롭(slop)'은 이미 우리 곁의 디지털 세상을 야금야금 잠식하고 있습니다. SEO 기업 그래파이트의 2025년 분석에 따르면, 영어로 된 웹 콘텐츠의 절반 이상이 AI가 생성한 글이라고 합니다. 유튜브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채널 100개 중 9개가 AI 콘텐츠로 채워져 있고요.
SF 잡지 클락스월드는 AI가 만든 소설 투고가 홍수처럼 쏟아지자 아예 투고 접수를 중단했습니다. 위키피디아는 AI가 생성한 내용을 걸러내느라 커뮤니티 전체가 골머리를 앓고 있죠. 누군가는 이걸 정보의 민주화라고 부를지 모르지만, 실상은 정보의 희석에 가깝습니다.
AI 슬롭의 문제는 단순히 품질이 낮다는 것이 아닙니다. 빠르게, 대량으로, 검증 없이 확산된다는 점입니다. 제작자는 키워드 몇 개만 입력하면 되고, 플랫폼 알고리즘은 조회수를 기준으로 콘텐츠를 추천합니다. 내용이 정확한지, 문화적으로 적절한지는 평가 기준이 아니죠.
제작자들은 여러 언어로 수십 개의 영상을 하루에 만들어 업로드합니다. 그 중 하나만 '히트'해도 수익이 발생하기 때문에 내용의 진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왜곡된 정보가 전 세계로 퍼져나갑니다.
앞서 본 한국 문화 쇼츠를 생각해 보세요. 그 영상을 본 외국인은 한국인이 제사와 같은 특별한 의식에 갓을 쓰고 다니며, 평소 인사할 때 합장을 한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다시 댓글과 공유를 통해 확산될 수 있습니다. 잘못된 이해가 '상식'이 되는 순간입니다.
소셜 미디어 연구자 다나 보이드는 '맥락 붕괴(context collapse)'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온라인 공간에서는 원래 서로 다른 맥락에 속해 있던 여러 청중이 하나의 공간에 모이고, 그 과정에서 의사소통의 섬세한 맥락이 무너진다는 것이죠.
AI 슬롭은 이 맥락 붕괴를 극단으로 밀어붙입니다. AI는 한복, 갓, 절, 한자, 제사상이라는 요소들을 조합할 때 맥락을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각 요소가 다른 시간, 다른 공간, 다른 상황에 속해 있지만 그저 하나의 장면에 뒤섞습니다. 결과는 '그럴싸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문화죠.
더 심각한 것은 이런 AI 생성 이미지가 다시 데이터로 학습된다는 점입니다. AI는 자신이 만든 왜곡된 이미지를 보고 다시 학습하고, 더 많은 왜곡된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틀린 그림이 점점 더 '정답'처럼 굳어지는 악순환입니다. 문화의 표상이 점점 더 실제 문화와 멀어지고 있습니다.
AI 슬롭에 대한 해법으로 '전문가의 검증'을 이야기합니다. 맞는 말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AI가 잘못된 이미지를 만들 때마다 하나씩 수정하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니까요.
AI에게 틀린 그림 찾기를 시키는 대신, AI가 문화를 이해하는 '눈' 자체를 교정해줘야 할 때입니다. 필요한 것은 AI가 문화를 이해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는 근본적인 접근입니다.
우리가 AI에게 가르쳐야 할 첫 번째는 '정답'이 아닙니다. '무엇이 어색한지를 느끼는 감각'입니다. 족자 앞에서 합장하는 장면을 보고 '이건 뭔가 이상해'라고 느끼는 그 감각 말이죠. 문화적 주체성은 정확한 지식보다 먼저, 부적절함을 감지하는 섬세한 감각에서 시작됩니다.
문화 전문가의 역할이 바뀌어야 합니다. '정답을 아는 사람'에서 '맥락의 뼈대를 설계하는 건축가'로 말입니다. 지금까지 암묵적으로만 존재했던 문화적 문법을, AI가 이해할 수 있는 '관계적 논리'로 번역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한복은 언제 입는가?'라는 질문에 단순히 '결혼식 등 아주 특별한 날에 입는다.'고 답하는 것이 아니라, 한복을 입는 상황과 입지 않는 상황, 어떤 스타일을 누가 어디서 입는지, 함께 나타나는 소품과 나타나지 않는 소품은 무엇인지 같은 관계의 그물망을 체계화하는 겁니다.
이것은 단순히 데이터를 더 많이 제공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데이터 사이의 '관계'를 명시하는 작업이죠. '제사라는 의례는 이런 요소들로 구성되며, 이 요소들은 서로 이런 관계를 맺는다'는 구조를 설계하는 것입니다.
마치 외국인에게 '은/는'과 '이/가'의 미묘한 차이를 상황으로 가르치듯, AI에게도 문화의 '상황 값'을 입력해 주는 설계자가 필요합니다. '이 맥락에서는 이것이 자연스럽고, 저 맥락에서는 저것이 어울린다'는 조건부 지식 말이죠.
중요한 것은 이 뼈대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문화는 살아 움직입니다. 현대 한국인은 명절에 한복을 입기도 하지만 일상복을 입고 차례를 지냅니다. 젊은 세대는 전통적인 큰절 대신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기도 하죠.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것은 박제된 전통이 아니라, 시간과 세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유연한 체계'입니다. '이것은 한국 문화다', '저것은 한국 문화가 아니다'라고 고정된 경계를 긋는 것이 아니라, '이런 맥락에서는 이것이 적절하고, 저런 맥락에서는 저것이 자연스럽다'는 조건적 지식을 구축하는 것이죠.
2010년대의 제사와 2020년대의 제사는 다릅니다. 도시 가정의 제사와 시골 가정의 제사도 다르죠. 이 다양성과 변화를 담아낼 수 있는 유연한 문법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AI라는 거대한 데이터 파도 속에서 고립된 섬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 파도가 우리 문화의 원형을 훼손하지 않도록 '의미의 물길'을 내는 것입니다.
앞으로 더 많은 콘텐츠를 AI가 만들게 될 것이고, 그 콘텐츠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칠 겁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AI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가 아니라 'AI와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입니다.
문화적 주체성을 지킨다는 것은 AI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AI가 표상하는 우리 문화가 맥락 속에 자리 잡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데이터의 양이 아닌 의미의 깊이를, 숫자가 아닌 삶의 맥락을, 그리고 통계가 아닌 우리만의 문법을 세우는 일입니다.
맥락의 건축가가 된다는 것은 결국, 우리 삶의 아주 사소한 풍경들—제사상의 병풍, 절을 할 때의 마음가짐—에 제대로 된 이름을 불러주는 일입니다.
이 이상한 영상들이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준비되어 있을까요? 패턴에 갇힌 한국을, 맥락 속에 살아 숨 쉬는 한국으로 되돌려 놓을 준비 말입니다.
납작해진 한국은 오늘도 생성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다시 입체적으로 세워낼 손길도,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지국크선'이 어쩌다가 튀어나온 말인지 도무지 모르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