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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조건들

조금의 노력

by 노연석

어떤 관문도 통과하기 위한 조건이 존재했다.

그 순간들 중 어떤 것도 순탄한 것은 없었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도 희망하는 상급 학교로 진학하기 위해 시험이라는 관문을 넘어야 했었으며 사회로 발을 내딛기 위해서도 스펙을 쌓아야 했고, 어렵게 들어간 직장에서도 고과, 승진이라는 좁은 관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살아야 했다.


그 수많은 관문들은 살아내기 위해 넘어야 할 목표였지만 목표를 향하는 과정에서 상처받기고 좌절하고 괴로워하며 술잔을 기울이기도 하며 어떤 땐 모든 걸 내려놓고 싶은 순간들이 찾아오기도 했었다.


나는 지지리도 공부를 못하는 학생이었다. 초등학교 때도 그랬고, 중학교 때에도 그랬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을 환경이 주는 영향일 수 있지만 공부에 전혀 관심이 없는 학생이었다. 공부가 미래에 가져다 줄 무언가가 있음도 인지하지 못했다. 더 정확하게는 아무런 생각이 없이 살았었다. 학교는 그냥 어쩔 수 없이 다녀야 하는 곳이었고 학교에서는 늘 형편없는 성적으로 창피함에 얼굴 붉혀야 할 때가 많았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다. 부모님들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을지 몰라도 크게 나무란 적도 없었다.


얼마나 공부를 못했는지 고등학교 진학도 남들 다 가는 학교로 가지 못했고, 면담에서 후순위 학교도 가지 못할 것 같다는 선생님의 한마디에 머릿속은 백지가 되고 갈길을 일은 사람이 되어 방황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아버지처럼 농사꾼이 되어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절대 농사꾼은 되기 싫었다. 대학은 가지 못하더라도 기술이라도 하나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 조차 기준 미달이라는 사실 앞에 선생님이 해줄 수 있는 최선은 없었고 스스로 헤쳐 나가야 했지만 한대 얻어맞아 멍한 것처럼 한동안 시간을 보냈었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처음으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오랜 앉아서 시간 공부를 하는 것도 익숙해지지 않았었고, 입력과 동시에 출력이 되어 버리는 지식들 앞에서 좌절해야 했었다. 그래도 끊을 놓지는 않은 덕분에 그래도 나름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대학 입시를 위한 진로를 준비할 때 나는 졸업 후 공장에라도 취직을 하려면 그리 쓸모는 없지만 먹고 살 기술이라도 배울 수 있는 학교로 진학을 해야 한다는 현실이 암담했지만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최선이었다. 그러나 그것 조차도 어려운 현실 앞에 평소보다 조금의 노력을 더 한 덕분에 간신히 문턱을 넘을 수 있었고 나는 공돌이가 되었다. 인문계를 다니는 학생들이 우리를 공돌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나에게 그것만으로도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고 죄책감을 덜어낼 수 있게 계기가 되었다. 기억하기로 가장 힘들게 넘어야 했던 첫 번째 관문이었다. 이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것은 약간의 노력이었다. 평소에 조금만 더 공부했었더라면 이런 상황을 만들지 않았을 텐데 후회는 늘 시간이 지난 후에 찾아오는 손님과 같다. 좋은 학교를 가는 것이 행복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은 알지만 그때는 그런 생각조차 못하던 때였기에 공돌이라도 된 것에 만족해야 했었다.


고등학교 진학 후의 삶도 순탄치 않았다. 공부와는 거리가 학생이었던 나에게 1학년 내내 배움의 터전인 학교는 공포의 공간이 되어 주었기에 공부와는 더 멀어졌다. 공부를 못해 나와 같은 처지로 그곳으로 갈 수밖에 없던 친구들은 타지로의 통학을 해야 했고 그곳의 텃새, 선배들의 군기, 각종 서클의 협박 아닌 협박 속에서 첫 1년은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하며 생활을 했었다. 어떤 날은 쉬는 시간에 슬리퍼를 끌고 나갔다가 질질 끌고 다닌다는 이유로 선배에게 끌려가 뺨을 맞기도 했었다. 공부를 하러 가는 것인지? 하루를 무사하게 보내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러 가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 공포의 한 학년도 세월의 흐름을 타고 자연스럽게 흘러서 지나갔다. 어렵게 들어간 관문 안에 기다리고 있을 공부와는 관련이 없는 자잘한 관문들을 지나느라 한 학년을 소비를 했고 기억에 남는 건 공포뿐이었다. 공부를 못해 이런 학교에 와 있는 시간들이 후회만 가득했었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그 문제들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더 이상 괴롭히는 사람도 없고, 그 몫은 새로 들어온 신입생들에게 넘어갔다. 환경이 바뀌었다고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지만, 정말 지지리도 공부를 하지 않는 학생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 그래도 조금의 노력으로 나름 상위 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욕심이 생겼었다. 조금만 더 하면 조금 더 위로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으로 공부의 재미를 느끼기 시작하는 계기였고 그런 욕심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아주 조금의 노력으로 10등 안에 들 수 있었고, 거기에 조금의 노력을 보태서 2학년 중간고사부터는 1등이라는 것을 태어나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그것도 전교 1등이었다. 그런 상황이 되다 보니 선생님의 관심 안에 들게 되었고 매일 자율 학습 시간에 친구들의 자격증 취득을 위한 문제 풀이를 해 주기도 했었다. 그러면서 친구들보다 내가 더 성장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그때다.


사실 난 좀 무식하게 공부를 했었다. 그 시절 만나야 하는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통째로 암기를 했다. 7번 정독을 해야 자기 것이 된다는 내용의 책들이 있는데 그런 책들이 알기 전이었지만 나는 무조건 책을 6번은 완독 하는 습관을 가졌었다. 그 어린 시절에는 엄청나게 흡수가 잘되던 때라 6번이면 정말 강제로 암기를 하지 않더라도 내 것이 되었다. 그를 통해 공업고등학교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자격증 시험이라는 관문을 한 번에 넘지 못한 적은 거의 없었다. 내 공부법이 맞는지 모르지만 그때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졸업할 때까지 4개의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그 과정 속에서도 언제나 내가 넘지 못하는 관문은 있었다. 나보다 더 공부를 못하는 친구들도 해 내는 일을 나는 하지 못하던 때는 나와 맞지 않는 길이라고 체념하고 포기하기도 했고 우습게도 그 잘하던 전공에서는 멀어졌으며 넘지 못했던 개발자로 평생을 밥벌이를 하며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다.


기회라는 것은 우연히 찾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공부를 하면서 3학년 2학기 중간고사까지 계속 그 자리를 내주지는 않았다. 그때는 자리를 빼앗 길가 봐 안절부절못하지 못하며 다시 내려가지 않기 위해 계속 공부를 했었다. 공업고등학교에서 공부를 잘해봐야 얼마나 잘했겠냐마는 그런 노력 때문에 미래가 달라졌다. 그때는 나는 단지 그 자리를 지키려는 노력을 했을 뿐 다른 욕심들은 생겨나지 않았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던 친구들은 그저 그런 회사로 실습이라는 것을 나가고 취직을 했다. 그리고 얼마 버티지 못하고 돌아와 다시 다른 직장으로 나가기를 반복했다. 학교는 100% 취업이라는 목적을 달성했지만 모두 좋은 회사에 취직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좋은 회사라고 해도 대부분 공장에서 일하는 다시 공돌이 생활을 계속해 나가야 했다. 그곳에서 일하고 계시는 분들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그 당시의 다 그렇게 스스로가 공돌이임을 인정하고 상황이 그렇게 만들어졌을 뿐이다.


대학도, 산업 전선으로의 첫발을 내딛는 관문도 좋은 학업 성적이 결정을 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시작만 그렇다. 좋은 성적을 달성한 사람에게 더 좋은 직장에 원서를 낼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지만 사실 도토리 키재기와 같은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위권에 있는 학생들에게 대기업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담임 선생님과 취업 면접을 하던 날, “저는 중소기업에 가서 열심히 일하며 성장을 하겠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렸지만 돌아오는 것은 꿀밤과 미친놈이 아니냐는 말이었다. 빛을 받으면 선글라스가 되는 안경을 쓰고 다니던 담임은 다가가기 어려운 분이었고 함부로 나는 아니라고 거역하기 어려운 분이었지만 누가 봐도 내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했을 거다. 왜 좋은 조건을 마다하고 어려운 길로 가려고 하는지 내 이야기를 들었다면 그렇게 이야기했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그때는 내가 다음으로 나가야 하는 관문의 높이를 계산해 본 적이 없고, 그냥 그렇게 하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가고자 했을 뿐이었다. 결국 선생님을 이길 수 없어 대기업 원서를 받고 작성해서 제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거부했다면 다른 회사도 알아봐 주지 않았을 것이 뻔하니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난 그저 빨리 시골을 떠나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기에 나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처음 적어보는 입사 원서의 내용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막막했다. 지금처럼 좋은 레퍼런스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 물어볼 때도 없고 그냥 있는 그대로 내가 가진 그대로로 작성을 해서 지원서를 제출했다. 큰 기대도 하지 않았다. 나라는 사람을 내가 잘 알기에 그 관문을 넘을 수 있는 조건을 충족하는지도 모르겠고 잘 될 것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안되면 친구들이 있는 곳 중 한 곳으로 가면 되니 부담도 없었다.


나에게 온 기회를 뻥 차버리려고 했었지만 차버리지 못했고 그 덕분에 남들이 보기에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었지만, 그 기회라는 것이 정말 그냥 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기회는 준비하고 노력하고 있어야 찾아온다. 모든 기회를 꼭 성공시킬 수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기회가 많아져야 문을 열고 들어가 그 안에 있는 것에 도전하고 누리고 실패하며 성장하고 다음 관문을 넘어설 수 있다.


기다림은 조금 지루 했다. 빨리 결과가 나와서 집을 떠나고 싶었다. 일을 하고 싶어서도 아니도 돈을 벌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난 내가 살고 있는 내가 살아왔던 환경이 너무나 싫었다. 그냥 벗어나고 싶었다. 그 대기업에 우리 학교에서 10명이 입사원서를 제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작은 시골학교라 원서를 10장 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이런 기회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닌데, 선생님께서는 얼마나 답답한 노릇이었을까?


두 달쯤 지나 합격자 명단이 학교로 전달이 되었고, 4명이 합격자가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합격자들은 교무실로 호출이 되었고 교무실에서 합격 소식 전해 들었다. 학교로서는 대단한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정말 산골 시골 학교에서 개천서 용이 난 것과 다름없는 성과이며 대학 진학을 목표로 운영하는 학교가 아니다 보니 대학에 입시를 잘 치른 친구들의 소식보다 어쩌면 더 기뻐했을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또 내가 원하지 않던 길을 가야만 했다. 내 주제에 대기업에 이라는 관문을 넘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면서 거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3개의 과가 있는 작은 학교 3학년 전체 200명 남직한 작은 학교. 우리 과에서만 4명이 합격을 하였고 다른 과의 친구들은 고배를 마셔야 했다.


나는 어쨌거나 생각지도 않게 그 관문을 넘어섰다. 그런 모습을 상상하며 공부를 했었던 것도 아니었다. 공부에 대한 동기 부여가 되었던 시점에 항상 1등을 하는 친구를 한 번쯤은 이겨보자는 욕심이 나를 이끌어 주었고 그 기회는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그 일로 인해 나와 그 친구는 묘한 관계가 되어 버렸다. 졸업 후 30년을 훌쩍 넘어선 지금까지 문제없이 잘 지내고 있지만 그때는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사이가 되었었다.


오랜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그랬다. 지금 당장 필요 없을지 몰라도 미리 준비를 하고 있으면 기회는 찾아왔다. 조금씩 위로 올라가야 하는 직장인의 숙명은 한 단계 한 단계 올라서기 위한 준비를 미리미리 해야 한다. 좋은 고과를 받기 위해 노력하고, 각종 자격증을 취득하고, 어학 등급을 취득하거나 높여야 하고, 주재원이라도 나가려면 더 많은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때로는 그런 준비들 중에 줄 잘 서기도 해야 한다. 이런 과정들은 사실 모두 고통의 순간들이었다.


1등이라는 자리에 올라보기는 했지만 다른 학교 학생들과 경쟁의 구도에서 본다면 부끄러운 1등이었을지도 모른다. 1등을 했다는 타이틀은 남들 보기에 좋아 보이지만 사회에 적응하는데 부족한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고비마다 느꼈다. 이 사회가 만들어 놓은 계단을 올라서야 할 때마다 늘 서툴고 힘겨웠다.


그 서투름은 항상 내가 할 수 있을까? 란 의문을 품고 살게 했지만 욕심은 없었다. 그냥 꾸역꾸역 부딪히는 현실의 관문 앞에 서면 등 떠밀려서 간신히 넘고는 했었다. 간신히 한 산을 넘으면 또 다른 산을 만나게 되고 그 산을 넘으면 또 다른 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직장인의 숙명이니 받아들이고 남들에게 패를 끼치지 않을 정도만 그렇게 길고 가늘게 삶을 살아왔었다.


고등학교 3학년, 6학기를 보내는 동안 나는 1등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제도를 이용했었다. 2학년부터는 기능경진대회 선수로 대회 준비를 해야 하기에 수업은 4시간 밖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성적이 좋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 점을 감안해 학교에서는 가점을 주었다. 얼마나 많이 주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조금의 노력에 가점이 더해져 1등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 정당하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가점을 제외하더라도 상위권은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삶의 앞에 놓인 관문들은 막연히 바라만 보고 있다고 넘을 수는 없다. 목표를 정하고 바라보고 그 길로 나아가는 행동이 수반되어야 기회가 찾아온다. 사실 뒤돌아 보니 그렇다. 많은 부분 등 떠밀려가며 살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들과 발을 맞춰 걸으려고 노력은 하며 살았다. 대기업에 근무를 할 수 있게 되어 수많은 시련과 고난의 비를 대기업이라는 우산 아래서 피할 수 있었다. 그 당시 대기업은 모진 풍파에도 견디어 낼 수 있기에 평생직장이라고들 말했었다. 그러나 세상이 변하면서 평생직장 같은 것은 사라졌다. 나는 미련하게도 아직도 한 직장을 다니며 평생직장으로 만들려 하고 있지만 수많은 시련들을 막아주는 대기업의 우산의 맛을 알아버려 떠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게 주어진 그 단 한 번의 기회, 간절히 바라지 않던 기회였지만 평생직장이 되어 주었고 평생직장으로 스스로가 만들어가고 얼마 남지 않은 정년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욕심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나 좀 제발 그대로 내버려 뒀으면 하는 생각들이 매 계단을 오를 때마다 생각이 들었었다. 그 순간순간들이 너무 숨 막히고 짜증이 나고 하기 싫었지만 나만 생각할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내 아래 있는 후배들을 잘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위치가 필요했고 그렇지 않으면 후배들이 휘둘릴 수 있기에 나 혼자 만을 위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아등바등거려도 임원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뻔한 일이었고 그럴 마음도 가지지 않고 살았다. 요즘은 직급은 모두 사라지고 호칭을 부르는 시대가 되었다. 내가 바라던 그런 시대가 왔다. 그러나 아직도 여전히 그 속에는 승진이라는 것이 자리 잡고 있어 고통받는 이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좋은 학교, 좋은 직장… 좋은 것들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은 인간의 숙명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좋은 조건들의 시간을 맞이하려면 노력 없이 가능한 것은 없다. 준비 없이 가능한 것은 없다. 대부분의 어떤 관문의 문턱 앞에서 넘지 못하고 좌절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 관문을 넘을 수 있는 방법은 지금보다 아주 조금의 노력이 필요하고 그 노력에 조금의 노력을 더해간다면 관문을 넘을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문을 하나 열고 들어가면 또 다른 문이 존재한다. 그때마다 조금의 노력이 필요하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 아닌가 싶다.


목적지를 정하는 것은 좋지만 그 목적지에 도달하게 하는 것은 출발이다. 출발은 계속 이야기해 왔던 조금의 노력이다.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 자체로 목적지에 가까워져 가는 것이고 그 순간순간이 이미 목적지에 와 있는 것과 다름없다.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 시작하고 조금의 노력을 더 하다 보면 우연처럼 목적지에 도달한다고 믿는다. 결국 목적지, 목표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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