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직 일기
2018년은 한해 내내 일본의 P사와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우리와 협업하는 컨설팅 회사의 본사가 대만에 있어서 매월 한 번씩 서울, 대만, 도쿄에서 모였다 흩어지는 과정을 반복했다. 두 회사의 일하는 방식과 기대 결과물이 달랐고, 회의 때마다 보고서를 만들어야 했으므로 회의와 보고서를 반복하다 보면 한 달 한 달이 정말 빠르게 흘러갔다. P사의 본사가 있는 교토에서 회의를 하기로 했다. 도착하는 날 하늘이 유난히 높았고, 하루 일찍 도착한 우리 팀은 반나절 교토의 전자기기 매장과 라이프 스타일 매장 방문을 빙자한 반 관광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대만 담당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디냐고 물어서 이미 교토에 체크인을 마쳤다고 했더니, P사 측에서 내일 태풍으로 도쿄에서 내려오기 힘들 것 같다고 했다는 거다. 아니, 서울에서 세명이나 출장을 왔는데 고작 태풍으로 회의를 연기하자고? 나는 그럴 수 없다고, 우리는 이미 도착했고 이번에 회의를 연기하면 남은 일정을 맞추기 힘드니 회의 강행을 주장했다. 그때만 해도 ‘태풍’이 어떤 위협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경험이 전무한 상황이었다. 태풍이 와봤자 비바람 거센 정도겠지, 우리는 건물 안에서 회의하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람. 혹시 준비를 안 해서 발뺌하는 것 아냐? 온갖 억측과 비방의 생각이 머리를 휘저었다. 그때 나는 일에 미쳐있었나 보다. 무엇보다 다급한 일정이 중요했다.
그날 저녁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아침이 되니 빗줄기는 더 굵어지고 바람도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택시를 타고 회의장소로 갔더니, P사에서는 고베에 있던 대표 한 명만 참석하고 나머지는 화상으로 연결된 상태였다. 그때만 해도 나는 그들의 태도에 좀 화가 난 상태였다. 개인 관광도 아니고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허투르게 보여 실망도 많이 했다. 하지만 그런 마음도 잠시, 비와 바람은 점점 더 거세졌고, 오전 회의가 끝난 후 일기예보를 보더니 빨리 호텔과 집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처음 들어보는 바람 소리에 불안이 몰려왔다. 호텔로 돌아오며 비바람이 거세지는 게 저녁 먹기도 어렵겠다 싶어 일행과 호텔 바로 앞 역사에 있는 식당가에서 밥을 먹고 들어가기로 했다. 식당을 가기 위해 역사를 걸어가는 중에도 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었고, 역사 통로 가운데를 지나갈 즈음 등 뒤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본능적으로 앞으로 달렸다. 어디론가 들어가야겠다 싶어 역사 내 백화점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보니 출입문이 닫혀있었다. 순간 공포가 확 몰려왔는데, 몇 초 후 정신 차리고 보니 구석 문 하나를 열어놓고 사람들이 들어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얼른 뛰어들어가 살펴보니 등 뒤에서 난 소리는 역사의 가벽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였다. 자칫하면 무너지는 파편에 깔릴 뻔했다. 혼비백산 사람들이 뛰어가며 대피하고, 그 와중에 방재요원들이 신속하게 출동해서 수습하는 중이었다. 일본은 이런 재난 사항에 대한 대비가 잘 되어 있는 듯 보였다. 두 시간 정도 문 뒤에 갇혀있다가, 간단히 먹을거리를 사서 호텔로 돌아가던 길 작은 횡단보도 앞에서 또다시 쏟아지는 비바람에 걸음을 멈췄다. 건물 처마로 들어와 보니 엄청난 빗줄기가 더 엄청난 바람에 옆으로 쓰러지듯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바람이 약간 잠잠한 찰나의 순간에 흩날리는 나뭇잎과 쓰레기를 수습하는 환경미화원의 모습을 보았다. 아니, 이런 날씨에 낙엽을 쓰는 사람이 있다니! 세상 어디나 상상을 뛰어넘어 노력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겠지만, 이런 와중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일본이란 나라는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으면서도 한편으론 놀라운 순간이었다.
그 폭풍은 바로 2018년 일본을 강타한 슈퍼 태풍 제비였다. 제비의 경로가 오사카를 직통하며 간사이 공항이 물에 잠기고 사상자가 잇따랐다. 공항으로 가는 철도도 물에 잠겨서 공항으로 가는 철도 운항이 마비된 상태였다. 회의를 한 날이 태풍의 고비였는데, 호텔에서 TV를 켜고 나서야 어마어마한 재난 상황의 한가운데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고베로 돌아가는 P사의 멤버가 혹여 무슨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두려움에 휩싸였다. 내가 우겨서 회의를 강행했는데, 돌아가는 길에 만약 무슨 사고라도 일어난다면. 상상만 해도 미칠 것 같은 몇 시간이었다. 불안감에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메시지와 이메일을 보내 무사히 도착했는지 알려달라고 했다. 몇 시간 후 전화가 왔다. 고베에 무사히 도착한 P사측 대표는 오히려 우리가 무사히 호텔로 돌아왔는지를 먼저 물었다. 나는 이런 태풍을 겪어보지 않아 얼마나 위험한 상황이 닥칠지 상상하지 못했다고 미안하다고 사과를 거듭했다. 서로의 안위에 대해 걱정과 안부를 전하며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동료와 같은 묘한 전우애가 생기는 기분이 들었다.
그날 밤 업무 보고를 하면서, 폭풍으로 인한 회의 중단을 보고했더니, 무사하냐는 말 한마디 없이 업무 지연만 걱정하는 우리 회사 상사에게 무척 섭섭한 감정이 들었다. 다음날이 되어도 철도와 간사이 공항 이용은 불가능했고, 우리는 서울로 가는 비행 편이 있는 도시를 검색했다. 도쿄를 비롯 가까운 도시 출발 편은 모두 매진이라 우리는 돌아 돌아 서울로 돌아왔다. 신칸센을 타고 나고야로 가서 서울로 돌아오는 긴긴 일정이었다.
블랙홀을 설명할 때, 물리학에서는 사건의 지평선 Event Horizon이라는 개념을 얘기한다. 어떤 지점에서 일어난 사건이 어느 영역 바깥쪽에 있는 관찰자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치 못하는 시공간의 경계란 뜻이다. 서울의 내 상사에게 일본의 폭풍은 사건의 지평선 바깥의 일이었을 것이다. 나도 겪어보기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고, 상상하지 못했다. 미디어를 통해 아무리 전해 들어도 현장이 있지 않는 한 헤아리기 힘든 일들이 세상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이 태풍 사건을 계기로 나는 나의 지평선을 최대한 확장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