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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욘 May 18. 2020

하늘은 하늘색이 아니다.

그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배경인 하늘을 칠해야 하는데 별다른 고민 없이 흔히 하늘색이라 부르는 밝은 파란색을 골라 한 가지 톤으로 전부 칠해버렸다. 선생님은 하늘이라고 무조건 파랗게 칠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붉은색일 수도 있고, 노란색일 수도 있고, 회색일 수도 있고, 보라색일 수도 있고, 주황색일 수도 있고, 사람마다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고 했다. 또 내 느낌에 따라 의도적으로 보이는 것과 완전히 다른 색으로 채색해도 좋으니 어떻게 표현하고 싶은지 고민해보라고 했다. 나는 느끼고 표현하는 방법을 몰라 그냥 익숙하고 무난한 하늘색으로 하늘을 칠했다. 개성 없이 익숙하고 무난한 풍경 그림이 되었다.


소설가 김영하는 한 강연에서 감성에도 근육이 필요하다고 했다. 근육이 많은 사람이 적은 사람보다 더 많이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감성 근육이 많은 사람이 더 많은 것을 배우고 깊게 느낄 수 있다고, 그러니 감성 근육을 키워서 우리에게 주어진 감각들을 최대한 활용하고 자기만의 내면을 구축하는 삶을 살자고 말했다. 나에게도 감성 근육이 필요했다.


시간을 내서 일부러 하늘을 관찰했다. 이른 새벽, 동이 틀 때, 한낮에, 해가 질 때, 한밤중, 흐릴 때, 맑을 때, 눈이 올 때 하늘은 언제나 다른 색을 보여줬다. 마음에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하늘도 안 올려다보고 살았던 것을 반성했다. 그러자 퇴근길 빌딩 숲 사이로 빛나는 보랏빛 노을은 오늘 하루 고생했다며 따사롭게 위로를 건네고 구름 한 점 없이 청량한 가을 하늘은 당장 어디라도 떠나라고 말했다.


어느 날은 비현실적인 바닐라 빛 하늘과 거대한 구름을 보고 혹시 내가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건 아닐까 싶을 만큼 황홀했다. 그리고 갑자기 넘치는 감성을 주체할 수가 없어 답답했다. 내가 느낀 감동과 경외심을 무엇으로라도 표현하고 싶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오래된 스마트폰을 꺼내 네모난 화면에 저장하는 것밖에 없었다. 아무리 셔터를 눌러도 그 느낌은 담기지 않았다. 바닐라 스카이는 눈 깜짝할 새 사라지고 마치 이것이 너의 미래라는 듯이 새카만 어둠이 되었다.


밟히지 않기 위해서는 밟고 올라가야 했다. 적당히 남들처럼 이란 것은 불가능했다. 수치화하고 비교해서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보다 높아야 흔히 말하는 보통의 남들처럼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정해진 목표량을 달성하려면 때로는 갑질도 서슴지 않아야 했다. 찌질한 감성은 걸리적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매일 네모난 화면만 내려다보며 처리해야 할 것이 있나 새로고침을 했다. 감성 대신 이성, 합리적이고 쿨한 것이 미덕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 놓치고 지나온 많은 것들이, 유난히 하늘이 예뻤던 그날 한꺼번에 솟아올랐다. 종지만큼 작은 내 마음에서 넘치다 이내 흘러가버리는 그것들을 붙잡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퇴화된 감성이 심한 근육통만 유발할 뿐이었다. 더 많은 것을 느끼고 표현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화면 밖에 있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놓치지 않고 더 오래 즐기며 살 수 있도록.


굳어버린 감성을 풀어주는 것은 쉽지 않다. 현실에서 처리해야 할 많은 문제들이 언제나 눈앞에 놓여 있기에, 돈이 되는 것도 아닌데 오늘은 미루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마음처럼 되지 않는 날에는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냐며 때려치고 싶어 진다. 전처럼 생각 없이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을까 합리화해본다. 하지만 근육을 키우려면 꾸준한 훈련과 근육통을 견뎌내야 하는 것처럼 감성 근육의 성장을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 다독이며 한 자 더 읽고, 한 자 더 쓰고, 한 장 더 그려본다.


제주도 월정리 @neoyusm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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