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 작은 양보로 시작한다
어렸을 때 일이다. 막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였을 것이다. 가족, 친척과 함께 넓은 공원에 갔었다(공원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사촌들 6명과 함께 날 좋은 날 소풍을 간 거였는데 한창 '인라인' 유행이 전국을 강타하고 있을 때였다. 꼬맹이들은 각자 인라인을 챙겨서 답답한 아파트 단지에서 벗어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신나게 달릴 준비를 했다. 물론 나도 그 꼬맹이들 중 하나였기 때문에 인라인을 타고 공원 이곳저곳을 동생들과 함께 신나게 누볐다.
정신없이 인라인을 타다 보니까 어른들 시야에서 사라지는 일이 종종 생겼다. 그럴 때마다 어른들은 그 '탈영자'를 무섭게 야단쳤다. 그러나 이 꼬맹이들은 혼난다고 풀이 죽어서 가만히 있을 그런 애들이 아니었다. 짐짓 알아들은 척하고 어른들이 방심한 틈을 타서 다시 무섭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7살 꼬맹이의 희생정신
안타깝게도, 그런 '무모한' 질주로 인한 사달이 났다. 공원은 완전한 평지가 아니라 살짝 경사가 진 구도였다. 워낙 큰 공원이었기 때문에 한쪽은 평평하지만 다른 쪽은 경사가 있는 그런 구조였던 것이다. 신나게 타다 보니까 그 공원의 지리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나도 모르게 경사진 쪽으로 인라인을 타고 질주하게 되었다. 경사진 부분으로 접어드니 속도는 더 빨라지고 나는 겁이 나기 시작했다. 적당히 빨랐으면 그냥 주저앉았을 텐데 지금까지 냈던 속도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를 내며 내리막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냥 끝까지 내려가서 내리막 끝에 있는 돌담에 들이박았다간 갈비뼈 두대는 가뿐히 날아갈 그런 속도였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30m 밖에서 유모차를 끌고 올라오고 있는 한 부부가 보였다. 유모차와 부딪히면 아기는 물론, 아기의 부모님까지도 다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냥 앞으로 고꾸라졌다(3명에게 고통을 주느니 나 혼자서 고통을 감내하겠다는 일종의 '공리주의적' 태도를 어렸을 적부터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과장 없이 다섯 바퀴 정도를 앞으로 굴러서 멈췄는데, 딱 유모차가 내 발치에 있었다. 온몸이, 특히 오른쪽 다리가 부서진 듯이 아팠지만 생글생글 웃으면서 유모차를 타고 올라가는 아기의 모습을 보니까 정말 위험한 순간이었다는 사실이 다리의 고통만큼 실감이 났다.
나는 평범한 '탈영자'들과는 다른 더 엄한 꾸중을 들어야만 했다. 어른들의 시야로부터 더 멀리 벗어났을뿐더러 다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고 주장했으나 어른들은 오버한다며 핀잔을 주기만 했다. 오른쪽 다리의 부상은 생각보다 심해서 한 달간 깁스를 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것도 무더운 여름에.
점점 잃어가는 희생정신
내가 생각했을 땐 난 7살 아이치곤 꽤 훌륭한 희생정신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반적인 7살 아이라면 아이를 살린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당황해서 부딪혀버렸을 확률이 더 높았을 것이라 '감히' 생각해본다. 애초에 내가 내리막길로 무작정 내려간 것이 잘못이긴 하나, 유모차가 나타난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내린 내 결정은 충분히 '희생정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궁금한 것은, 그때의 희생정신을 발전시켰는지, 아니 남아 있는지의 여부이다. 난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기적'으로 변해갔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기 위해 바득바득 애를 쓰고, 내가 손해 보는 상황이라면 피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 남에게 행복을 주는 것보단 나 자신의 행복이 우선이었다. 고등학교 때 자주 했던 봉사활동도 봉사활동 시간을 벌 수 있다는 '이득'이 있었기 때문에 자주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하니 참 씁쓸하다.
작은 양보로 시작하는 희생
과연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지금의 나와 다르다 할 수 있을까. 조금의 손해에도 화가 머리 끝까지 차올라 '이불 킥'을 하면서 잠을 못 이룬 적이 혹시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에게 필요한 생각은, 내가 조금만 불편하면 남이 훨씬 더 편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남이 나에게 양보를 해줬을 땐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다. 역으로 남에게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줘야 공평하지 않을까. 희생이라는 거창한 말이 꼭 필요한 것이 아니다. 꼭 슈퍼맨, 배트맨 같은 '영웅'들만 희생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조그마한 '양보'로부터 시작한다면 이 역시 충분한 '희생'이라고 생각한다. 몸이 불편한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거나, 과자 한 조각이라도 못 먹어본 친구에게 내미는 것 하나하나가 따뜻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희생이다. '나만 양보하면 뭐하나, 남이 안 하는데'라고 단정 짓지 마라. 모든 일은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7살 꼬맹이도 아기가 다치지 않도록 몸을 던지는 마당에 당신이라고 못할게 뭐가 있는가?
모든 변화는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한다
점점 이기적으로 변하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데우기 위해서라면 '희생정신'이라는 장작을 넣어야 한다. 그리고 그 장작을 패는 것은 여러분의 몫이다. '양보'라는 이름의 도끼로 패는 '희생정신'은 따뜻한 사회를 만드는데 더없이 완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