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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가 죄악이 되는 나라

주입식 교육이 만든 참혹함.

by 몽당연필

가 아직 어릴적.

학교가 끝나고 놀이터에 가면 늘 아이들이 있었다.

달리 친구와 약속을 잡을 필요도 없이 놀고싶은 순간에는 언제라도

그저 집근처 놀이터에 나가는 것 만으로도 나는 또래의 아이들과 어울려 즐겁게 놀 수 있었더랬다.


그러나 그런 노는 것이 당연하고 가장 중요했던 어린 시절 조차 어른들은 놀이보다 책과 공부와 시험을 앞세워 아이들을 가두려 드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그건 한살 한살 나이를 먹어 갈 수록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가 되어갔다.

학교의 성적은 그 무엇보다 '나'라는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는 최우선 수단이자 절대적인 가치였고 대부분의 학생들처럼 좋은 성적을 받으면 당당해지고 나쁜 성적을 받는 날엔 매서운 훈육과 질타가 기다리는 것 또한 점차 익숙하고 당연해져갔다.

대학에 입학하고 졸업하고 군대를 가고 전역을 하고 취업을 하고 이직을 하며 사회의 어엿한 일원이 되는 그 모든 순간에 마주하는 모든 사람들은 '논다'에 죄악감을 가졌음을 은연중에 표현하고 있었다.

직장생활에서 아내의 눈치를 보며 게임기를 사는 남편을 보는 것은 너무도 흔했고,
퇴근해 돌아오는길 골목에서 부모의 눈치를 보며 PC방을 찾는 아이들은 무의식중에 행위로 놀이에 대한 죄책감과 두려움을 증명하고 있었다.

얼마전 지나친 아파트단지에 휑하던 놀이터 만큼이나 어쩌면 우리 사회는 중요한 것을 잃어가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1.왜 놀이를 죄악시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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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그것은 참으로 단순한 논리에서 비롯되었다.

순위와 경쟁 바로 그것이다.

숫자로 이루어진 승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3년

고등학교3년

대학교 4년


도합 16년이다. 무려 16년에 걸쳐 보다 빨리 암기하고 보다 빨리 계산해서 보다 빨리 '정답'을 찾아

자신의 가치를 '점수'로 환산해 '순위를 매기는 행위 노출되어있던 거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숫자와 순위에 길들여져 버린 사람들의 사고방식 또한

짜여진 정답 이외의 대답을 정답으로 인정하기 어려워진 것 처럼 보인다.


어린시절 아이는 놀이를 통해 사회화를 하고 커뮤니케이션부터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소속감을 갖거나 역할을 찾거나 다양한 인간으로서의 기본을 다지곤 한다. 더불어 그런 학습활동은 스트레스받는 강압에 의함이 아닌 체험과 놀이라는 스트레스 해소의 수단으로 작용하며 자연스럽게 몸에 배기 마련인데, 그 과정을 학원과 교육으로 대체하여 주입받는 아이의 정서는 과연 어떤 인간으로 아이가 성장하게 할까?


훌륭한 사람 으로 정의되는 번듯한 직장과 높은 연봉을 갖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길 위에 행복을 찾기가 쉽지 않으리란 사실만은 명백하다.


오직 점수로 가치를 판정하고 순위를 매기며 사는 삶에 길들여진 인간에겐 매 순간이 경쟁의 연장선에 있을 수 밖에 없다. 항상 경쟁해야하고 투쟁해야하며 순위를 유지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삶이 행복할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심지어 그 방향성도 그 목표도 스스로 정했다기 보다는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주어진 나의 방향도 나의 목표도 아니라면 어쩌면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자학이자 고문이 될런지도 모른다.


결국 인간을 그냥 자원으로 보고 인간이 가진 가치와 가능성도 자원으로 분류를 해야 나올 수 있는 사고방식인 셈이다. 순위경쟁을 위해 시간과 노력이라는 자원을 투자해야 하고 욕구같은 변수는 최대한 억누르는 것. 단순히 숫자만 놓고 보자면 놀고자 하는 욕구는 시간의 낭비로 계산이 되는 것이고, 공부나 시험의 성적은 그만큼의 +요인이 되니 낭비를 줄이고 투자한다는 지극히 단순하고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이 그 근간인 것이다.


이 논리가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끔찍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차치하고서라도 비효율적이고 불합리한지에 대해서라도 이해를 할 필요가 있다.











2. 숫자 그리고 경쟁

과거 심리학에서 인간이 가장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 중에 목적 없는 반복행위에 대해 심도 깊은 연구가 이루어진 적이 있다. 정신적으로 인간은 지루함을 가장 견디기 힘들어하고 행위가 루틴화 되어 반복될 때에 발생하는 스트레스를 극복하기 위해서 인간은 목적성을 설정할 필요가 있으며 그러한 목적성 또한 스스로 납득하고 가능하면 스스로 원하는 방향으로 목적성을 설정하여 목적과 행위가 일치된 방향성을 갖고 있을때야 말로 인간은 간신히 지루함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한 맥락에서 보면 사회적 가치와 시선을 기준으로 세워 자신의 위치를 판단하고 다시 그 사회적 요구에 따라 목적을 설정해 맞춰야 할때 인간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게 되며 그것이 얼마나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지는 이견의 여지가 있기 어렵다.


그리고 그러한 개인의 영역을 넘어서 집단과 사회의 영역으로 생각을 확장해보자면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과정에 화합이나 조화 양보와 배려가 자리하기 쉬울까?
아니면 배제하고 짖밟고 무시하고 빼앗는 것이 자리하기 더 유리할까?
그 해답은 당장 우리 사회에서 배려와 양보, 조화와 화합이 찾기 어려워지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놀이대신 강요된 경쟁을 갖는 사회에서 사람의 생각하는 방법이 변화했다는 것이 과한 비약이 아니란 의미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진자가 없는 자를 짖밟고 사회의 정의 보다 가까운 이득을 앞세워 타인을 희생시키는 행태는 보통의 사람들이 진저리 치면서도 그런 인간들이 되기 가장 쉬운 주입식 교육과 과잉된 교육열은 식기는 커녕 점점 더 거세어진다는 점은 참 슬프고도 두려운 일이다.


말은 보통 네가 나중에 선택해야 할 순간에 원하는 선택지가 하나라도 더 늘어나기위해서 해야하는 경쟁이다 라고 말하겠지만, 결과적으로 그 경쟁 끝에 생각 할 수 있는 선택지라는 것은 결국 숫자와 순위에 놀아나는 선택일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발상 자체가 그쪽으로 가기 어려워질만큼 주입식교육과 경쟁에 찌들어 있을테니 말이다.


인간의 성장에서 환경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는 뭐 익히 알려진 사실이듯 실제로도 그러하다.

경쟁구도에서 한발 물러나서 '나의 생각'과 '나의 방향성'으로 세상을 볼 줄 아는 사람과 그저 경쟁에서의 승리만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은 일견 짧은 시간은 경쟁만을 생각하는 사람이 나아 보일 수 있겠지만 생각의 폭도 깊이도 경쟁안에서 꽉 막히기 마련이다.


물론 이미 과열된 경쟁사회가 된 현재 그것이 생존에 불리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다만 처음부터 말하고 싶었던 사실은 단 하나.


결코 그것이 더 행복하지는 않을 것이란 이야기이다.















3. 현실적인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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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현재 현실적인 이 나라 이 사회는 무척 잔인하고 만만치 않으며 또한 힘겨운 삶을 강요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암담한 현실에서 생존을 위한 출구 전략으로 그런 경쟁에 올인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그 방법 외에도 방법은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싶을 뿐이다.

유감스럽게도 주입식교육에서 주구 장창 풀었던 문제들이 갖는 '정답'이라는 것은 삶 속에서는 따로 정해지지 않았고 타인이 함부로 정할 수도 없는 부분이니까.


어차피 정답이 없다면 스스로 방법을 정하고 스스로 방향을 정해서 자기가 납득한 목표를 향해 삶을 살아가는 쪽이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스스로 정하고자 하는 것을 찾을때

결국 인간이 찾게 되는 재료는 경험과 믿음이다.

그리고 그 경험과 믿음은 스스로 겪은 성공에서 기인하고

가장 적은 리스크로 가장 다양한 성공의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것은

놀이만한 것이 없다.

일 예로 초고급교육 커리큘럼이나 과외 커리큘럼 중에는 대상이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놀이의 요소를 본따 놀이처럼 교육프로그램을 만드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결국 놀이를 통해 배우는 것은 비단 유아기 뿐만이 아니다.
청소년기에도 성인이 되어서도 놀이의 힘은 늘 유효하고 강력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놀이는 스스로 목적을 정하고 재미를 느끼는 부분도 누군가의 생각이 아닌 자신의 체감에 기반하여 결정된다.

맛있는 부분도 재미있는 부분도 오롯이 자신의 주관에 의해 형성된다는 이야기다. 설사 타인의 감상이나 개입이 영향을 끼쳤다 할 지라도 재미를 소화하는 방식은 오롯이 자신의 주관이 자리잡기 마련인 것이다.


스스로의 재미와 목적을 파악하게 된다면

공부의 이유와 목적이나 취업의 이유와 목적 이전에

공부하고 싶은 방향성이 먼저 자리잡을 수 있고

취업하고 싶은 방향성이 먼저 자리잡을 수 있게 될 것이며


놀이에서 실패는 시행착오가 되는 것 처럼

삶에서의 실패가 낙오가 아닌 하나의 과정으로 경험으로

넘어졌을때 의연히 일어서는 법을 배우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태어나서부터 암기력이 뛰어나고 수학적 연산능력이 뛰어날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그렇게 뛰어난 암기력도 뛰어난 연산능력도 갖추지 못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이나라 이 사회가 강제하는 주입식 교육이라는 것은 암기력과 연산능력의 우위를 판가름 하는 수준에서 대부분 끝나고 소위 말하는 '학벌'을 결정 짓는 수능이라는 수단 또한 그 영역에서 인간을 평가한다.

끔찍하게도 그 숫자놀음에 절망하는 아이들의 숫자는 무시 할 만한 수치가 아니다.


설사 무사히 그 시험을 치루어 냈다고 해서 끝이 날까? 오히려 시작에 불과하다. 그 결과 아이들은 실패를 두려워하게 되었고 그 아이들이 성장해 사회에 나가는 순간 그나마의 실패 조차 나누어 짊어질 보호자가 사라진 아이들은 낙오가 두려워 도전하지 못하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 아이들이 성장해 사회에 나오면 달라질까? 오히려 더 겁을 먹고 실패를 피해 안전한 길을 가려고 할까? 대답은 이미 이 나라의 공무원준비생들의 숫자가 대신 하고 있다.


당장 술자리에서 요즘 젊은이들이 패기가 없다고 내 또래들이 MZ세대를 비하 할 때면 오히려 요즘 젊은 세대가 얼마나 겁에 질려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이 없구나 실감케 된다. 그들이 지금 느끼는 실패에 대한 공포는 우리세대나 우리 윗세대가 느끼는 실패에 대한 공포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을 모른다.


거리에서 뛰놀며 자랐던 세대라서, 경쟁이 선택의 영역에 있던 시절에 자란 세대라서, 시대의 흐름을 타고 무난히 안주할 수 있었던 세대라서, 순쉬는 매순간이 경쟁이고 낭떨어지인 지금 세대의 절망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다.


인간은 늘 그렇듯 자신의 세대만이 가장 고되고 힘들 따름이다.


학교가 사람을 만들기 위해 학생을 가르친다고 한다면, 정말 학생에게 가르쳐야하는 것은 미적분이나 중력가속도 따위를 가르치기 이전에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 있을 무수한 넘어짐 속에서 스스로 몇번이고 일어설 수 있다는 믿음과 확신을 갖게 해주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16년간 학교에서 주입 된 가스라이팅은 일어서는 요령은 커녕 넘어짐 그 자체에 대한 히스테릭을 이 사회 깊숙히 남겼다. 순위에서 뒤쳐지고 성적에서 뒤쳐진 낙오자가 어떤 대우를 받는지 충분히 뼛속 깊이 느끼고도 남을 경험이 무려 16년 어치나 있는 셈이 아닌가?


아니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증거는 이미 사회에 만연해 있다.


급증하는 자살율, 금융범죄의 증가, 일확천금을 노리는 영끌족, 부동산과열 사소하게는 음식점을 대상으로 벌이는 갑질만행부터 우리 사회의 사소한 하나부터 열가지의 일 모두에 숫자로 밖에 판단하지 못하는 사고력의 상실 인간성의 상실이 무수한 방향성을 가지고 실체화 하는 중이다.












4. 놀이를 우습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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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사람은 애도 어른도 당연히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이고 인간이 아니라 생물이라면 이것은 당연한 자연의 섭리이자 진리이다.


같은 맥락에서 받은 스트레스는 충분히 해소해 주어야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도 건강해 질 수 있는 것이고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잃고 받는 교육이나 업무가 얼마나 비효율적인지는 굳이 자료를 들먹일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급격한 사회의 발전 때문일까?

세계 최빈국에서 GDP10위권에 들기까지의 경제적 성장에 비해 놀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며 자란 사람들은 쉽게 마음이 병들고 다 자란 몸에 비해 마음이 성장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은 것은 어쩌면 충분히 놀면서 크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놀이에서 양보나 이해는 더 큰 재미를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애초에 스트레스의 해소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도 혼자 즐기는 놀이도 좋지만 함께 즐길 수 있을때 보통 더 큰 시너지를 내는 효과가 있다. 자세한 것은 성취감의 메커니즘과 관련되어 있긴 한데 이 부분은 당장 중요한 것이 아니니 다음 기회에 성취감에 대한 글에서 다루기로 하고 넘어가자.


아무튼 예전엔 함께 어울려 놀기위해 잘 못하거나 어린 아이들에겐 깍두기라 부르며 기꺼히 패널티를 짊어지거나 한명의 아이를 위해 양보하는 행위가 당연했었다.

승리나 1등보다 어울려 함께라는 것을 배우기에 좋았던 것이다.
기계적인 공평보다 양보와 화합으로 얻는 진짜 가치를 배우는 것도 결국은 놀이에서 체험으로 익힐 수 있었던 것이다.


놀이에서는 결국 다름과 틀림을 구분할 줄 아는 지혜를 가장 먼저 배울 수 있는 진짜 교육의 장이었던 셈이고 이 사회는 그것을 아이들로 부터 어른까지 모두에게서 빼앗아왔다.


스스로 방향을 잡고 노력할 힘을 잃게되면 똑같은 경제적 어려움이 닥치고 똑같은 실패속에 있을때 다시 목표를 만들고 일어서기 보다 훨씬 쉽게 그대로 주저앉게 될 수 밖에 없다. 지금까지 따라왔던 사회적 시선에 따른 목표는 현실성없이 너무도 멀고 높아서 감히 시도 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패배감에 질식해 가기 쉽상이다.


논다는 행위는 그까짓 놀이 흔해 빠진 시간낭비 따위로 치부해도 될 만큼 가벼운 것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 삶을 구성하는 것중 진실로 시간낭비인 것은 하나도 없을지도 모른다.











5. 현대의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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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세상은 빠르게도 변화하여 아이들이 안심하고 뛰어놀 곳은 줄어들고 어울려 놀 시간조차 빠듯해져 현재에 이르러서 그 놀이의 문화가 현실에서 디지털 세상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학업에 짖눌린 아이들이 병적으로 게임을 찾는다고 게임중독이라는 망상을 퍼트리는 와중에도 그 원인이 결국 충분한 휴식과 놀이의 부재라는 사실을 외면한 채 익숙한 숫자놀음과 순위매기기 사고를 따라 성적을 떨어뜨리는 이상행위로 놀이를 간주하고 핍박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스크린 너머의 세상에서 놀이는 아이들을 성장시키고 있다.


오히려 과거 몸으로 하던 놀이에 비해 육체적으로 다칠 일은 줄어들고 장소의 제약도 훨씬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는 행위 자체를 비난하기 위해 사행성과 폭력성같이 자극적인 소재를 이유로 싸잡아 노는 행위를 겁박하는 것은 이제와 새삼스럽지도 않은 이야기가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 놀이를 즐기는 방식도 맹목적인 승리를 추구하며 협동보다는 욕설과 비난으로 양보 보다 이기심으로 그 자리를 채우고 게임을 즐기는 아이들은 결국 게임이라는 놀이에서조차 본인이 원하는 재미를 충분히 찾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라는 것도 부정할 생각은 아니다.


몇몇 유명 게임장르에서 한국 프로게이머나 한국의 게이머가 해외 게이머를 압살하는 실력을 뽐낼때 거기에 뒤따르는 숫자를 보고 그들에게 열광하고 자부심을 갖는 사람은 있지만 어째서 그렇게까지 게임을 치열하게 즐기는 문화가 국가적인 규모로 자리를 잡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사람은 흔치 않다.


실제로 국제경기에서 최상위권 성적을 갖는 두 나라는 서양이 아닌 아시아의 한국과 중국으로 이 두 나라는 과도한 교육열과 더불어 주입식교육을 오래 진행했던 나라라는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 조차도 아마 놀이나 게임에 비관적인 사람들에겐 중요하지 않은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오히려 그런 경쟁 게임이야말로 불특정 다수의 사람의 '다름'을 존중하고 '배려'하여 '협동'하고 '화합'과 양보를 미덕으로 해야 '승리'할 수 있는 구조로 들어져 있음은 게임 비관론자들이 이를 악물고 외면하는 사실이다.


때로는 성인을 위한 컨텐츠를 제공하고 때로는 잔혹해보이는 컨텐츠를 제공할 지언정 게임을 통해 범죄를 배우거나 준비한다는 망상은 어떠한 근거도 없다. 오히려 현실에서 받은 스트레스로 인해 발현한 후속효과로서 폭력성이 나오는 것을 해소시켜줬다고 한다면 모를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여전히 어려서는 정서발달에 악영향을 끼친다며 게임을 비난하고

학창시절엔 학업에 방해된다며 게임을 비난하고 나이먹어서는 나이먹고 게임을 한다고 비난을 하고 있다.


정작 한국 역사상 가장 큰 외화벌이를 한 문화컨텐츠는 영화도 드라마도 KPOP도 아닌 게임이었으며 하나의 게임은 그 자체로 현존하는 대부분의 미디어 아트의 총집합체이자 첨단기술의 집약체라는 사실조차도 사실 큰 관심을 갖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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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전력으로 집중력을 발휘해 온전히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적이며 충분한 휴식과 놀이 없이는 그 집중력도 능률도 점점 가역적으로 떨어지게 되어있다.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인간은 원래 그렇게 설계되어있다.


이 사실을 부정할 때 우리는 고통받을 수 밖에 없다.

어찌 사람이 세상의 섭리를 거부하면서 편안 할 수 있을까?


인간은 다른 짐승들 보다 망가짐이 덜 티나도록 위장하고 의태할 수 있을 뿐 충분한 놀이와 휴식없이 일하는 인간은 반드시 망가지게 되어있다.

한국의 알콜소비량과 자살율은 이미 이 사회가 일과 놀이 그리고 휴식의 벨런스가 크게 무너진 사회라는 것을 엄중히 그리고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다.


같은 의미로 개인에서 사회로 그리고 경제로 시아를 넓혀 보자면 한국의 경제적 성장과 문화컨텐츠의 성장 또한 우리 개개인이 휴식과 놀이에 대해 충분히 관대해지지 못하고서는 그 성장세를 결코 오래 지속시키지 못하게 될 것을 알아야 한다.


애초에

놀고 싶은 마음은 당연하고

쉬고 싶은 마음도 당연하다

오히려 놀이와 일과 휴식을 갈라둔 것은 당연하지 않다.

사람이 인식의 편의를 위해 인위적으로 나누어 두었을 뿐

사실은 놀이와 일은 하나의 덩어리로 보아야 한다.


놀아라 쉬어라 충분히 휴식하고 즐긴 뒤에 비로서 일하라

설사 현실적으로 그것이 불가능 할 지라도

최소한 당신이 놀고 즐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죄악으로 여기지도 말아야 한다.
그것은 분명 당신에게 필요한 일임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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