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판에서 신극장판 까지
아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9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 계의 페러다임을 바꾼 작품입니다.
이 작품이 명작인지 아닌지나 관객 개개인의 호불호를 미뤄두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이 작품의 흥행과 서브컬쳐 역사에 미친 영향력은 드래곤볼과 건담 이후 최고 수준임에는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물론 흥행 만을 따지자면 슬램덩크라던지 다른 작품들을 떠올릴 수도 있고
장르시장의 영향력을 치자면 세일러문도 빼놓을 수 없겠지만,
단순히 단일 장르를 넘어 광범위하게 시장에 영향력을 끼친 작품으로 에반게리온에 비견될 만한 작품은 많지 않습니다.
특히나 90년대 이후의 작품이라면 사실상 에반게리온에 비빌 작품을 선정하기 쉽지 않죠.
아무튼 이토록 큰 영향력을 시장에 행사한 작품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 그림자에서 벗어난 작품이 드믈 정도의 작품인데다 메세지와 메타포의 디테일과 깊이가 남다른 작품이라 유튜브를 중심으로 발전한 1인 미디어 시장에서도 주기적으로 작품의 해설과 해석이 잇따르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소위 명작이라 불리우는 작품들이 대개 그러하듯 관객의 관점에 따라 작품의 해석은 천차만별로 변하기 마련인지라 오늘은 그동안 그 많은 리뷰에도 불구하고 제 입맛에 맞는 해석을 내놓은 영상이나 글을 보지 못하여 직접 타자를 쳐보기로 했습니다.
물론 본 리뷰는 이것이 옳다 라거나 이것만이 정답이다가 아닌 그저 이 작품을 이렇게 해석해 보는 사람도 있구나 정도의 느낌으로 너그럽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TV판 신세기 에반게리온
처음 이 작품이 방영되던 90년대의 TV판에서
비교적 이 작품의 메세지는 명확한 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인간의 모든 비극은 고독에서 시작된다. 였지요
상당히 철학적인 질문임과 동시에 시대상을 반영한 주제메세지였기 때문에
더욱더 이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란 작품은 흥행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성격과 코드의 집합체인 히로인상 부터
악마적인 외형의 메카닉까지 기존의 흥행코드나 클리셰를 박살내버리는 파격으로 점칠된 작품이기도 했지요.
물론 에반게리온을 로봇이라고 부르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만,
작품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 눈에는 영락없는 악마적인 로봇의 형상으로 비춰지기에 충분했기에 로봇이라는 단어를 차용했습니다만 사실 그조차도 기존 클리셰에서 벗어난 시도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옆길로 빠진 이야기를 되돌려 주제메세지의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TV판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모든 인물들은 저마다의 고독을 가지고 있으며 그로인해
저마다의 비틀림 즉 비극의 서사를 가지고 있지요.
주인공 신지부터 어머니를 잃고 매정한 아버지 밑에서 사랑을 갈구하던 끝에 스스로의 주체성과 능동성을 억누른 인물이며 이로 인해 더 큰 고독에 빠져 자기자신에 갇혀 침잠하는 10대로 그려집니다.
신지의 아버지인 이카리 겐도는 아내를 사고로 잃은 후 그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그릇된 신념과 선택으로 스스로의 고독과 비극을 이어나가는 인물로 나오죠.
그런 이카리 겐도를 사랑하는 리츠코나 리츠코를 동경하는 마야 같은 주변인물은 물론이고
신지를 이끌고 가족의 따듯함을 알려주던 미사토 역시도 사고로 부모를 잃고 홀로 남겨져 그 고독속에 유일한 구원이 되어줄 카지와 헤어지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를 망가뜨려가는 비련의 여성이었죠.
다른 주인공이자 히로인인 아야나미 레이나 소류 아스카랑그레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지의 엄마이자 겐도의 아내였던 유이의 클론으로 태생부터 고독한 만들어진 존재인 레이는 유일한 애정의 대상인 겐도가 자신을 통해 유이만을 바라보고 있어 결코 그 안에 레이라는 존재로서 비춰질 수 없어 고독하고 그외의 모든 사람을 거절하며 스스로 고독을 선택한 존재였고,
아스카 또한 정신적으로 취약한 어머니 밑에서 자라며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했지만 어머니의 자살로 큰 충격과 고독에 매몰되어 강인한 천재로서의 자신을 연기할 수 밖에 없는 외강내유의 여린 소녀로 그려집니다.
그 밖에도 토우지나 그를 짝사랑하는 반장등 모든 등장인물은 저마다의 고독의 원인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그려지며 작품의 주제메세지를 충실하게 뒷받침하는 메타포로 작품을 이끌어나갑니다.
허나 유감스럽게도 이런 일관된 주제 메세지와 충실한 메타포임에도 불구하고 엔딩은 많은 혹평을 들을 수 밖에 없었는데, 제작상의 예산부족같은 현실적인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작품 그 자체를 보자면 분명 안노 히데야키 감독이 하고자 하는 메세지에 충실한 엔딩이지만,
장편 에니메이션으로서 용납될 연출인지를 생각해보면
섣부르게 긍정이나 부정을 할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인류 보완계획이 결국 고독을 극복하는 서사가 작중 핍진성에 맞춰 수많은 상징(메타포)로 얽혀 방영되던 와중에 갑자기 현실로 돌아와 핍진성을 벗어나 현실의 서사로서 환기하는 것은 분명 창의적이고 기존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난 연출이기는 하나. 몰입해 작품을 감상하던 팬의 입장에서는 시쳇말로 ‘확 깨는 앤딩’일 뿐이며 극단적으로 평가하자면
감독이 작품으로서 말하지 못하고 제4의 벽을 넘어 직접 주제를 전달하려고 하는 넌센스
라고 평한다 해도 부정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이어진 극장판에서는 호불호가 극명했던 TV판의 앤딩을 덧씌우고자 보다 노골적으로 작품의 핍진성에서 벗어나지 않는 엔딩을 그리고자 했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그 작품은 시작부터 신지의 자위씬으로 시작하면서 파격적인 시작을 통해 엔딩까지 파격의 연속이었죠. 주제 메세지는 변하지 않았지만, 그 연출방식과 메타포의 활용은 훨씬 더 공격적이 되었습니다.
신지에 대한 다소 혐오적인 토입부의 연출은 한편으로는 주제메세지에 대입하자면 고독을 이겨내지 못하고 순간의 욕망 따위에 의지가 꺽여버리는 나약함 그 자체이자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타락 좌절을 묘사하는 연출로 당시엔 받아들였습니다.
의식불명의 아스카 또한 메세지에 대입해 보자면 결코 남들에게 들키기 싫은 자신의 내면을 들킴으로 인해 현실을 부정하고 내면으로 침잠해 스스로를 가두어버리는 심리를 표현했다고 보았구요.
반면 죽어버린 레이는 고독에서 벗어난 존재이자 유이의 대변인으로 어머니의 상징성과 고독을 끝내줄 도피처로서 이해했습니다.
실제로 작품내의 서드임팩트로 인해 온세상에 등장한 레이와 접촉한 모든 인간이 LCL용액으로 변해버리는 연출은 바꾸어 말하자면 LCL의 상징인 양수와 맞물려 시간을 되돌리고 인간이나 사회로 부터 상처받고 싶지 않은 어리광이 극대화 되어 고독으로부터의 해방은 죽음뿐이다 라는 안노감독의 메세지를 전달하는 듯 했으니까요.
사실 이 작품까지만 해도 저의 해석은 그저 인간의 모든 비극은 고독으로부터 시작된다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고 인물들의 결여가 고독으로 귀결되는 것 만에 집충해 작품을 해석하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 대부분의 작품리뷰들도 딱 그정도 레벨까지만 해석하고 마는 것이 이 글을 쓰게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사도의 존재는 우리의 마음을 참범하며 동시에 서로를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현실의 많은 요소들을 대변하는 것이라 보기도 했었죠.
극중인물에겐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시련이자 메타포나 메세지 적으로는 고독을 만드는 극복할 수 없는 원인들로 사도의 형태와 능력 에피소드를 해석하고 있었습니다.
역설적으로 사도이면서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었던 TV판의 나기사 카오루 같은 케릭터는 스스로가 인간이 아니며 현실이라면 존재할 수 없는 나(이카리 신지)의 절대적 이해자라는 형태로 등장한 것 역시 결코 이해받을 수 없고 고독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 역설적으로 나 자신의 고독을 해결해줄 수 있는 유일하고 가장 편리한 존재 라는 서브 메세지로도 받아들여지던 시기였으니까요.
그리고 이는 극장판의 엔딩에서 결국 인류보완계획이자 서드임팩트를 거부하고 아스카와 단 둘이 남은 신지의 모습으로 새로운 메세지를 던져주게 됩니다.
어찌보자면 서드 임팩트는 과오와 오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고독을 수용하지 못한 인간의 종착지가 결국 삶을 되돌리고 싶다는 극단적인 욕망으로 발현됨을 말하고, 작중 주인공이자 감독의 페르소나이고 관객 그 자체가 되어야 했던 신지라는 인물은 결국 그런 회귀와 전진사이에 망설이다. 현실에 고립되는 모습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정체되었을 지언정 현실에 남는 이상 마지막 현실과 미련의 상징인 아스카가 함께 남게 된 것은 필연이고 비참하지만 결국 누군가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고독을 견딜 수 없다는 다소 비관주의적인 해석으로만 비춰졌었더랬죠.
이것이 제가 그당시 구 극장판을 보며 느꼈던 작품의 주제 메세지였습니다.
구 극장판 조차 작품 팬에겐 다소 아쉬움이 남는 엔딩이었다고 한다면
신극장판에서는 진짜 안노감독이 하고 싶었던 에반게리온의 메세지와 메타포를
보다 디테일하게 혹은 시간이 지나 생각을 더 가다듬은 안노 감독이 기존의 메세지와
메타포를 훨씬 세련되게 가다듬어 결론을 내렸다 판단하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저 또한 보다 깊게 메세지를 음미할 수 있었던 작품이고
아쉬움이 있을 지언정 훌륭하게 에반게리온이란 작품의 이해를 완성시켰다고
개인적으로는 평가합니다.
덕분에 이 작품 서 파 Q 다카포 까지 감사하고나서야 비로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라는 사실을 말이죠.
그제서야 TV판과 이전 구 극장판의 해석도 새롭게 바뀜을 느꼈습니다.
고독에 사로잡혀 고통받는 한사람 한사람이 결국엔 ‘아이’였다는 사실을 말이죠.
그저 ‘아이’인채로 ‘몸만 커버린 아이’들만의 세상인 셈이죠.
‘진짜 어른’이 되지 못한 이들만 남은 세계야 말로 에반게리온의 세계이며
이 작품세계속에서 ‘어른이 되어버린 존재’는 ‘죽음’이란 형태로 작품 밖으로
퇴출되는 룰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먼저 ‘사고’를 통해 ‘죽음’에 이르게 된 ‘유이’는 그야말로
‘어머니’이자 ‘어른’이 되었기 때문에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들의 세계’ 즉
에반게리온의 세계관에서는 살아있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고
그것이 작중에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의 눈으로 보았을 때에는
‘죽음’과 다름 없게 보이는 것인 거라는 해석에 눈뜨게 되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다시 작품을 보자면
이카리 겐도는 유이를 되찾고 싶지만,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유이가 아이로 돌아올 수는 없으니
겐도가 아이인 상태로는 영원히 유이에게 닿을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같은 맥락에서 ‘아이의 시점에서의 어른’을 동경해 인류 보완 계획을 주도한 ‘제레’라는 집단이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그들이 생각한 ‘어른’이 되기 위해 서드임팩트를 일으키는 지 역시 설명이 됩니다.
한편으로는 작품내에서 신비주의적이고 드러나지 않은 권력으로서의 카리스마를 상징하는
제레의 [Sound Only]라는 연출이 스스로를 드러내지 못하고 입맛대로 자신의 정의를 관철하고자 하는
겁많은 아이의 잔혹함 그 자체를 상징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아무튼 이렇게 ‘아이’와 ‘어른’의 구도로 생각을 바꾸게 되면 ‘아야나미 레이’라는 케릭터가 왜 TV판에서는 그렇게 죽고 사라진 뒤에 다시 ‘아이’의 모습으로 재등장하여 신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는지 왜 극장판에서는 엔딩에 도달하기전 그렇게 사라질 수 밖에 없었는지가 모두 설명이 됩니다.
어른이 되어 사라진 레이를 보았는데 똑같은 모습일 뿐 여전히 아이인 레이가 나타났다면
당연히 혼란스럽고 같은 사람이지만 같은사람이 아닌. 아이가 바라보는 관점에서의 혼란을 상징하는 구도가 성립하게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레이와 카오루는 작품내에서 아직은 아이이지만 가장 어른에 가까운 인물이기도 하고요.
인간이 고독을 극복할 수 있고 어른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이기를 벗어던지고 이타의 마음으로 세상에 감사하고 타인에게 상냥해질 수 있는 것.
그 순간이야 말로 진정 우리가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시말해 상냥한 어른이 되는 것이야말로 ‘진짜 어른’이 되는 방법이고
에반게리온의 세계의 상냥한 어른은 아이의 시선에선 세계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
즉 죽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장 먼저 등장인물 중 어른이 되어버림으로 인해
에반게리온의 세계관에서는 ‘살아있을 수 없게’되어버린 것이죠.
반면 서드임팩트를 통해 강제로 어른이 되어버리는 경우는 다릅니다.
상냥한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이 상처 입음을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거든요
희생, 용서 같은 감정은 일단 내가 타인으로부터 상처입을 것을 상정해야 성립되니까요.
그런데 서드임팩트는 고독을 극복하고 어른이 되기 위한 방법으로 ‘상냥함’을 떼어내고
이기적으로 ‘상처받지 않는 어른’을 목표로 합니다.
아이의 시선에서 보면 똑같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리는 형태 입니다만,
안노 히데야키 감독이 말하고 싶은 ‘상냥한 어른’과 스스로 상처받지 않기 위해 ‘어른’을 가장하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었고, 더 이상 아이가 아닐 지라도 그런 어른은 누구도 바라지 않는 것을
세컨드 임팩트를 통해 서드임팩트를 견제하고 피하려는 등장인물들의 노력을 통해 보여주며
으로 서드임팩트를 매칭했다고 해석됩니다.
노동의 가치를 알고 타인을 위한 마음을 알고 개인의 이기심과 안녕보다 타인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을 배운 레이가 그렇게 마지막으로 신지에게 카세트를 전달하는 씬에서
TV판에서는 그저 현실로 부터 도피하고 스스로를 가두기 위한 방어기제 그 자체였던
카세트플레이어가 이제는 추억이란 이름의 상냥함으로 전달 되었을때.
그때야 비로서 신지는 상냥함을 이해하고 타인을 위하는 이타심을 끝내 거부하며 이기심과 고립에 갇혀 아집에 빠져있는 아버지 이카리 겐도에게 맞서 싸울 수 있는 힘 즉 어른의 관용과
용서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죠.
신극장판의 엔딩 역시 그러한 심상의 충돌을 비쥬얼 적인 연출로 그려냈음을 알 수 있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유일한 아쉬운 연출이기도 했습니다. 너무 비약이 많고 친절하지 못한 연출이라 메타포와 메세지의 이해 없이 보면 그냥 난해하고 몰입을 방해하며 구구절절 설명을 통해 하는 수준낮은 연출로 보였으니까요.
뭐 그런 아쉬움과 별개로 결과적으로 신지는 아버지인 이카리 겐도를 미워하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이해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고독으로 부터 구원하고 겐도 또한 자식을 통해 마침내 사랑하는 아내 유이를 만날 수 있는 어른이 될 수 있었던 것이겠죠.
그렇게 보면 극장판에서 신지의 목에 채워졌던 목걸이는 사춘기의 폭주를 막기위해 사회적으로 발생하는 제약의 상징이며 타인을 보지 않고 자기자신만을 바라보는 이기심을 제3자가 바라볼때 얼마나 위험하고 폭력적으로 느끼는지, 또한 그 위험성을 본인 스스로만 깨닫지 못하고 거절당하는 고통을 표현하기 위한 장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제안에서는 과거 TV판에서 멋대로 마음을 침범하고 항거할 수 없는 폭력으로 그려졌던 사도의 존재 또한 받아들이기 싫고 인정하기 싫은 자기 자신의 모습이라 해석이 바뀌게 되었죠.
그것은 언제 마주하게 될지 스스로 선택 할 수도 없고,
보통의 방법으로는 항거할 수 없으며,
아이인 채로 있는 마음에겐 너무도 치명적인 자기혐오를 낳는 것이지만,
사실은 그 또한 자기 자신의 일부인 셈이니 말입니다.
더구나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주해야 하는 것을 대상화 하여
적이자 괴수로 등장시겼다는 점이 아이다운 해석이라는 점에서 더욱
이 에반게리온의 작품성과 통일성에 감탄하게 됩니다.
과거 에반게리온을 움직이는 힘은 사랑이라 과거 밝혔던 안노 감독의 코멘트 역시도
단순히 사랑이 움직인다를 넘어 에반게리온에 어린 아이들만 탈 수 있었던 것은 현실과 괴리된 동심의 마지막인 청소년기였기에 가능한 결과로 다시 해석할 수 있게 됩니다.
에반게리온은 어떤 의미에서는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청소년이 의지하게 되는 자신만의 최후의 보루인 셈입니다.
알다시피 에바는 사도 아담과 리리스를 토대로 만들어진 병기이며
사도의 상징이 내면의 자신이라 한다면 어른을 앞둔 청소년이 마음에 두르는 갑옷이기도 합니다.
세계를 바라보는 아이의 관점이 나와 내 주변정도에 국한되어있다 더 넓은 세계와 더 많은 사람을 만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상처입을 수 밖에 없고 거절을 경험하며 상처가 쌓일 때
인간이라면 누구나 상처받지 않기 위한 방어기재가 발생하기 마련이고
그런의미에서 크고 강대한 힘을 가진 에바의 탑승은 방어기재속으로 숨어드는 자아를
애니메이션적인 표현으로 적절히 녹여낸 메타포라 볼 수 있죠.
또한 에바를 움직이는 동력이 사랑이고 그것이 싱크로율이라고 한다면 결국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야 용기의 근원이자 사람 내면의 가능성이라 볼 수 있겠지요.
그렇게 상처받지 않도록 마음에 갑옷을 두르고 강력한 힘으로 나 대신 상대방의 마음의 벽을 찢어버리는 행위는 AT필드를 찢어발기는 에반게리온을 표현됩니다.
그것은 나를 지키기위해 타인을 공격하고 상처입히는 공격성이며
때때로 그 마음을 지키기 위한 도구는 몹시 거칠기도 하고 마음대로 제어하기도 어렵습니다. (폭주) 자신의 내면을 다스리는 것은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요.
그 때문에 때떄로 두렵거나 싫게 느껴지기도 하겠지만(에바에 타기를 거부하는 신지),
결과적으론 스스로를 마주하는 용기(사도에 대항할 힘)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도구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에반게리온이 막대한 양의 전력을 필요로 하는 것은
스스로를 마음의 갑옷속에 감추기 위해서는 막대한 정신력이 필요하고 몹시 피로한 일인데다
상시 그렇게 고슴도치처럼 있을 수는 없는 법이죠.
그러니 에바는 막대한 전력 없이는 아주 잠시 밖에 사용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석하자면 스스로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주변에서 나의 가치를 인정하고 보듬어주는 것이 최고이듯 에바에 탑승하기 위해서 자신이 갈구하는 형태의 애정이 아닐지라도 자신에 대한 기대나 주변의 이해와 사랑이 있어야 비로서 에바에 탈 수 있는 것이고 이는 TV판 구 극장판 신극장판 모두 미사토라는 케릭터를 통해 신지에게 전달됩니다.
전력공급이 없을 때에도 신지를 위해 스스로 움직이는 애바는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동안 받아온 사랑(모성애)의 상징이기도 하며 더미플러그를 거부하는 것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타인을 연기하는 것으로는 결국 제대로 자신의 마음을 보호할 수 없음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죠.
그래서 미사토라는 케릭터의 대사를 통해 다음과 같은 메세지를 TV판, 구 극장판, 신극장판에서도 공통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대사상으로는 에반게리온 파일럿을 위해 네르프의 모두가 목숨을 걸고 있다는 것을
대사를 통해 전달하고 있습니다.
바꿔말하면 스스로를 사랑하는 행위조차 혼자 해낸다 착각하지만,
사실은 주변의 많은 사람의 관심과 도움 사랑으로 인해 가능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인간형태를 한 사도인 카오루 역시도 그 상징성의 해석이 새로워 집니다.
에바 안에서 신지를 대신해 희생한 카오루는 사실 신지가 생각한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이었다는 해석입니다.
어떤 신지의 모습도 사랑하고 품어줄 포용력과
신지의 속마음을 귀신처럼 캐치하는 이해심
100%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이해자…
당연히 그런 편리한 존재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춘기를 비롯해 어른이 되는 과정의 아이에게
쏟아지는 버거운 관심이나 제약을 상징하는 자폭 목걸이를 대신 짊어지고 사라짐으로서
신지는 자기 내면에서 스스로에게 갖던 헛된 기대 허구와 같은 이상적인 나에서
강제로 졸업하게 됩니다.
자연스러운 어른이 되는 과정이지요.
나는 사실 천재가 아니야
나는 사실 완벽하지 않아 같은 심리로부터 졸업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지는 괴로워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후 아야나미 레이를 통해 스스로를 온전히 마주보고
이상이나 환상의 나 자신을 꿈꾸는게 아닌 현실과 온전한 나 자신을 마주하고 수용하고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상냥함을 얻어낼 수 있었다고 봐야겠지요.
과거 TV시리즈에서 신지에게 그토록 헌신적이며 하나하나 신지가 무언가를 이루어가는(피아노) 모습이나 잔인하게 고양이를 죽이는 카오루의 모습은 이상적이고 냉철하지만 만능이기까지하고 그러면서 나를 제일 잘 이해해 줄 수 있는 존재가 결국 그게 꿈꾸던 자신의 이상향이었기 때문이라고 보면 납득이 갑니다.
카오루는 누구에게도 구속되지 않고 휘둘리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로 보입니다만,
결국 환상에만 존재하는 이상적 자신이므로 카오루는 신지가 필요하고 집착하고
오롯이 홀로 완벽한듯 하지만,
그래서 더 고독합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과오(다른 사도)로부터 눈을 돌리거나 도망쳐서는 안되고
마주하고 맞서 싸워야 비로서 조금이나마 자신이 가까운 이상에 다가설 수 있음을
피아노나 에반게리온을 통해 표현하고 있지요.
그런 의미에서 하얀피부에 하얀머리칼을 가진 눈이 빨간 사람이란 디자인적 메타포는
단순히 사도가 인간의 형태를 갖춘 것 뿐만이 아니라,
아이의 시점에서 기대하는 어떤 이상향이나 환상 기대하는 사람의 형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자세히 다루려면 ‘색상으로 표현된 에반게리온의 상징'에 대해서도 집어볼 필요가 있겠네요.
에반게리온이란 작품내에서 아담의 유체가 그러했고 릴리스가 그러하듯
‘흰색’이라는 것은 신이나 무결 혹은 죄 짓지 않은 순수를 상징합니다.
사도들은 공통적으로 표정을 알 수 없는 순수한 하얀 가면을 쓰고 있으며
그 몸이 검은 색으로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자 죄악이 사도의 몸에 혼재되어
마주하기 싫지만 순수한 나를 상징합니다.
더불어 고독의 근원인 상호 이해의 부재는 ‘표정을 읽을 수 없는 가면’의 형태로 표현되었죠.
에반게리온에서는 파랑의 상징인 바다가 붉게 오염되어있습니다.
붉게 변한 바다는 내면에서 상냥함을 상실한 고독함과 상처를 상징하며
죄악의 증표이자 은유적으로 상처로 인한 피로 가득한 세상을 의미합니다.
반면 빨강과 대비되는 파랑은 치유와 상냥함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카오루와 다르게 레이가 푸른색이 섞인 머리칼은 것은 모성 혹은 모성애를 기대하는 아이의 마음이 투영된 환상의 존재로서 겉은 차갑고 냉정하여 무감정해보이지만 결국 신지에게 큰 위안이 되는 존재로서 순수한 치유 순수한 상냥함을 색상으로 표현했다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온전히 이상적인 나의 모습은 아무 때묻지 않은 순수한 동심이자 아이의 치기의 상징으로 존재하기에 카오루는 머리칼마저 하얀것과 차이가 있지요.
조금 더 확장해보자면 붉은 색은 공격성, 저항 반항 같은 상징을 품고 있지만 투쟁의 의미가 가장 크게 드러나게 됩니다. 앞서 고독과 상처와 투쟁이 모두 한 색상에 혼재되어있고 연결되어있죠.
아스카의 플러그슈트, 미사토의 제복 같은 인물과도 연결해보면 붉음을 두르고 있을 떄와 아닐 때 표현되는 인물의 심리묘사와 연출에서도 재미있는 발견을 하실 수 있을 겁니다.
같은 맥락에서 파랑은 치유 상냥함이지만 포용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만약 여기서 더 확장해서 적용하게 될 때에 왜 푸른 머리칼을 가진 레이가 아스카와는 다르게 탑승하는 에바의 색이 푸른색이 아닌지에 대한 것도 에반게리온의 상징과 연결해서 깨닫게 되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역설적으론 이 모든것이 타인에게 상냥함을 갖고 어른이되는 성장에 내면의 환상은 방해가 되는 것이기도 하고 상처받은 마음의 증거이기도 하므로 이들의 눈은 붉은색으로 표현되어 현실적인 인간과의 이질감을 더욱 크게 자아냅니다.
실제로 서드임팩트(강제로 어른이 되는 것)은 현실에서 있기 어렵지만 그 조차도 신이라는 가상의 존재에 닿고자 사도(내면의 다양한 자신)을 이용 해야만 닿을 수 있는 것으로 그려진 치밀한 메타포 구성 또한 아이의 치기 어리고 비틀린 이상향이자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더라도 나만 좋으면 된다는 이기심을 가지고 되는 ‘가짜 어른’의 형태는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어머니의 양수를 상징하는 LCL은 에바에 탑승할때 필수적인 요소로 그안에서 편안함을 느낀다하지만, 바꾸어 말하면 태어난 이상 어머니의 뱃속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어리광은
성장과는 대척점에 있는 욕망입니다.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과거로 돌아가고 싶고 계속 아이이거나 태어나지조차 않고 상처받지 않고 싶어하는 어리석음을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하지요.그래서 LCL은 완전히 붉은 색이 아닌 주황색이나 노란색으로 표현됩니다.
작중 최강의 무기인 롱기누스의 창 역시도 새빨간 색으로 표현되는 것은 마찬가지로 가장 큰 죄악 다시 말하면 누군가를 상처입히는 가시같은 마음을 상징하는 셈이죠.
아시다 시피 롱기누스의 창은 AT필드를 무력화하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널리 알려진 해석과 같이 AT필드가 마음을 보호하기 위한 마음의 벽이라 서로간의 완벽한 이해를 방해한다 한다면 AT필드를 찢어내는 행위는 날카로운 말로 상처입히는 행동으로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짓밟는 이기심의 상징이기도 하죠.
아이러니 하게도 사도를 죽일때 핵을 파괴하면 대량의 붉은 피를 흘리는 것 역시도
결국 자기 자신을 부정하면 스스로를 상처입히는 것과 다름 없음을 은유적으로 대입해 묘사하는 연출이라고 생각됩니다.
제레라는 집단이 네르프와 이카리겐도를 통해 아담과 이브를 연구해 에반게리온을 만든 것은 궁극적으로 인류보완계획 즉 상처없이 어른이 되고자하는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마음의 발현이라고 봅니다.
네르프가 그토록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고 제레가 그토록 큰 권력을 가진 것 역시
혼란한 청소년의 마음속에 자신의 안위와 상처받지 않기 위한 마음이 커다래서 쉽게 뿌리칠 수 없는 바와 같이 그들의 힘이 에반게리온의 세계관에서 강력한것은 마음속의 갈등과 어리석음의 지분 좀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이기심이 우리가 고독을 극복하고 상냥한 어른이 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류보완계획으로 서드임팩트를 통해 어른이 되는 것은 바꾸어 말하자면
‘나만 상처받지 않는’ 어른이 되는 불완전한 어른이 되는 방법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상냥한 어른은 될 수 없는 것이죠.
애초에 ‘서로가 서로를 완벽히 이해해야 고독하지 않을 수 있기에 모두를 죽이고 하나로 합쳐서 고독을 극복한다’ 라는 인류보완계획의 논리 자체가 내가 이해할 수 있고 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하고만 어울리며 상처받지 않겠다는 21세기의 오타쿠나 히키코모리
이기적인 젊은 세대의 사회성 상실을 상징한다 보여집니다.
안노히데야키 감독이 에반게리온을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은 단순히 오타쿠여 세상으로 나와라가 아니라
그렇게 스스로 어른이 되었다는 착각에 빠진채로 아이로 남아버린 세대
이기심과 다름에 대한 배척만이 남아 스스로 고립되고 있는 세대들을 향한 외침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특히 구 극장판에서 신지의 자위씬이 가장 먼저 나온 것은 결국 입맛에 맞는 사람만을 곁에 두고 상처받지 않고 스스로를 안전하게 하려는 소극적인 태도가 결국 타인에 의해 상처받지 않을 지언정 너 스스로를 혐오하게 만들 것이다 라는 메세지를 초장부터 강력하게 때려 박은 것으로 보아야 겠지요.
오직 부모에 의존할 수 밖에 없던 아이시절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 나오게 되며 부모로부터 떨어진 것이 일종의 세컨드 임팩트라 한다면 서드임팩트는 일어나서도 안되고 동경해서도 안될 금단의 열매이자 스스로를 혐오하게 만들 뿐인 잘못된 선택이 된다는 것을 전달하고 싶었을 거라고 저는 해석됩니다.
그런 맥락에서 퍼스트임팩트는 처음 어머니의 양수를 벗어나 태어나는 탄생으로 해석하고
세컨드 임팩트는 어른이 되기전 맞이하는 사춘기의 시작으로 볼 수 있겠죠.
때문에 아직 부모의 사랑을 온전히 받고 나의 세상이 가족의 품 안에 있던 시절에는
푸르던 바다가 처음으로 부모의 품에서 일정수준 벗어나 학교를 비롯한 작은 사회의
일원이 되어 사람사이의 상처받는 경험과 기대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세상의 혹독함의 일부를 경험한 아이가 스스로를 보호하고 성장하기 위해 맞이하는 것이 세컨드 임팩트
즉 ‘사춘기’인 것입니다. 붉게 물든 바다는 여유를 상실하고 이기적이 되거나 상처받음에 침잠되는 위태로움 그 자체겠지요
독일어로는 의지라는 뜻을 가진 것은 그 자체로 뭘 상징하고 있는지를 대변합니다.
반쪽짜리 서드임팩트의 영향으로 늙지않는 상태라고 묘사가 되었습니다만.
상징성을 놓고 보자면 말 그대로 의지인것이죠.
자기 자신과 마주할 의지 세상과 마주할 의지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여기에 NERV는 직역하면 신경이지만 사실상 일종의 본능을 상징하죠
정확히는 방어기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본능적으로 혐오하게되는 자신의 추악함이나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거부하고 싶은 자신의 본모습을 상징하는 사도를 격퇴하는 것이
네르프의 사명(적어도 표면적으로는)이듯이 말이죠.
바꿔말하면 에반게리온이 신지의 내면세계라 가정한다면
NERV는 상냥한 어른이 되길 거부하는 겁쟁이이고 나약하며
이기적인 신지가 어른이 되기 위해 마주해야 하는 시련과 마주하고
포용하지 못하게 사도를 거절하고 분쇄하는 역할이라 자신을 속이게 만드는
방어기재입니다.
그 네르프를 움직이는 제레Seele는 영혼과 정신을 의미하는 단어지만
여기선 본능과 내제된 이기심 그 자체라 할 수 있죠.
이기심이 방어기재를 통해 자기 자신이나 세상과의 대면 객관성의 상실을 통해
스스로를 유지하고자 하고
의지가 그런 유약하고 나약한 이기심에 대항하여 진짜 어른이 되도록 돕는 구도인 셈입니다.
그래서 네르프의 겐도는 소통하지 않고 오직 명령하기위해 강압하지만
신지에겐 달콤한 거짓으로 유혹해 홀리곤 합니다.
반면 뷜레는 의지 그 자체를 상징하듯 강압적이고 폭력적이고 신지를 못살게 굴지만
우리가 어떤 목적을 위해 노력할때 늘 그렇듯 유혹을 뿌리치기 위해 감내하듯 쓴소리로 다가옵니다.
실제로 신지를 가장 위해주고 있음에도 처음엔 그저 모질고 고통스럽게만 구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신지와 겐도의 성인 이카리는 일본어로 분노를 뜻합니다.
사춘기에 쉽게 분노하듯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신지도 겐도도 아직 아이라서
에반게리온의 세계관 속에서 생존이 가능했던 인물들입니다.
고독함의 끝에서 끝내 분노하게 되는 마음을 상징하기도 하죠.
그리고 고독에 맞서는 가장 위험한 방법이 분노라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실제로 주제 메세지인
를 놓고 보자면
분노는 어른이 되는 가장 먼 방법이기도 합니다.
신지는 마침내 희생 양보 용서와 포용을 배워 어른이 될수 있었다면
겐도는 끝내 이기심을 놓치 못하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상처입혀
가장 자신이 바라지 않았던 모습을 상징하는 사도와 하나가 되어
억지로 어른이 되려고 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입니다.
겐도는 거부하던 자신의 모습이라고 해도 어쨌거나 받아들였으니
괴물이 되었을 지언정 아이보다는 강력한 힘을 행사할 수는 있지만,
결국 겐도는 자기 자신은 물론 타인을 상처입히는 괴물의 모습으로
반쪽짜리 어른 혹은 어른인채 하는 아이로 성장한 셈이 되어 버렸고
신지는 그것을 이해하고 용서함으로서
두 이카리 부자는 분노를 놓아주고 비로서 어른이 될 수 있었다.
라는 엔딩으로 해석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제 인생을 통채로 뒤흔들고 현재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두 착품에
망설임 없이 드래곤볼과 에반게리온을 꼽는 만큼
신극장판의 개봉 당시에도 크게 기대를 했었습니다.
그리고 과거 구 극장판과 다르게 이번 신 극장판에서는 어느정도 만족하기도 했고요
물론 아쉬움이 없다고는 하지 못합니다.
특히 마지막 다카포에서 신지의 각성과 이카리겐도와의 클라이막스는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였는지 지나치게 연출의 과정이 조잡하고 급하게 마무리 지은 느낌이라
못내 아쉬움이 남는게 사실입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직전까지의 메타포의 활용과 연출은 안노식 에바의 끝을 장식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것도 상징성을 보건데 충분히 납득이 가는 조합이라고도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를테면 레이는 모성애와 이상향을 상징하고 있었다 한다면
아스카는 첫사랑을 상징하는 케릭터로서 레이보다는 현실에 가깝지만
대다수의 현실에서는 가슴에 묻어두어야 하는 존재이고
서툴고 이기적인데다 어리석은 신지가 놓쳐버린 아쉬움이지만
결코 그것을 돌이키거나 집착하려 해서는 어른이 될 수 없기에
맺어질 수 없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죠.
그렇기에 머리카락의 색상은 어머니를 떠올리지만 전혀 다른 매력에
조금 하자가 있어 보이긴 할 지언정 보다 현실적이고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운명의 상대로 현실을 살아갈 파트너의 자리에 다소 요상 할 정도로
개성이 강하고 엉뚱한 마리라는 케릭터가 신지와 맺어지는 것은
주제에도 상징에도 충분히 부합하는 조합이었다는 생각에
엔딩에도 큰 불만이 없었습니다.
몇차례의 시행착오는 있었을지언정
감독으로서 안노히데야키는 성장하였고 신 극장판의 엔딩에서
과거처럼 작품을 뜬금없이 벗어나 전달하고 싶은 메세지를 폭력적으로 강압하지 않고
작품내의 상징과 메세지를 충분히 핍진성에 맞춰 녹여내 연출한 작품이었다고 평가하며
겐도씬의 아쉬움은 남을 지언정 제 유년시절부터 지금까지 평생의 영향력을 행사한 작품의
끝을 받아 들이기엔 충분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번쯤은 글로 이런 개인의 감상과 해석을 남겨보고 싶었는데
어떻게 보시는 분들의 입맛에 맞았을런진 모르겠네요.
모쪼록 해석이 다르다 노여워 하지 마시고 이런 해석도 재미있구나 정도로 좋게 읽어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