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 뭐예요, 라짜로?
지난겨울, kofa에서 집사람과 함께 <행복한 라짜로>를 보았습니다. 보자마자 라짜로와 사랑에 빠져버렸지 뭐예요.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선보인 이후 입소문을 타고 정식 개봉한 <행복한 라짜로>를 '무작위' 멤버들과 함께 다시 보기도 했지요.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 번에 그는 나에게 무슨 말을 해줄까? 라짜로의 얼굴에서 행복을 읽어낼 수 있을까?
당신들에게도 권하고 싶어요. 마술 같은 라짜로의 세상에 한 번 빠져보시라고.
<행복한 라짜로>를 봤다.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화를 내거나 슬퍼하지 않는 천치(天痴) 청년의 이야기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누가 봐도 착하게 생긴 라짜로(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는 이탈리아 깡촌 인비올라타의 농촌 공동체에 산다. 무지한 마을 사람들은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지만 자신들이 노예처럼 착취당하는 줄도 모른 채 살아간다. 그런 그들 역시 무지를 볼모로 착취를 일삼는 지주만큼이나 사악하다. 착취당하는 마을 사람들이 ‘착한 천치’ 라짜로를 함부로 부리는 모습은 (신선할 만큼) 경악스럽다. 인간 본성 때문에 무수히 상처를 받았을 법도 한데 이 백지장 같은 청년은 주위의 사람과 세상이 늘 고맙기만 하다. 그는 이상한 거울이다. 자신을 이용하고 착취하는 이들에게 조건 없는 호의와 선한 눈동자를 되돌려줄 뿐이다. 그런데 그 이상한 ‘라짜로의 거울’에 ‘우리 자신’의 일그러진 모습이 비친다.
‘라짜로는 행복한가?’ 그렇다면 ‘행복이란 무엇인가?’ 답을 찾고 싶어서 극장을 찾았는데 되레 묵직한 질문들만 한 아름 떠안고 극장을 나섰다. 라짜로와 함께 ‘인간이란 세계’의 어두운 밑바닥을 겪은 것 같아 처연하게 슬프면서도 그 속에 씨앗을 감추고 있는 희망을 언뜻 본 것 같아 조금은 기뻤다. 영화를 보는 내내 여러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머리는 복잡해지고 여운은 길게 남았다.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돌이켜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이 투박하지만 품위를 잃지 않는 이탈리아 영화에 숨어 있었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나를 가득 채웠던 질문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였다. 연민 때문에 차마 천사의 임무(인간의 목숨을 거두어들이는 일)를 완수하지 못한 천사 미하엘은 하느님의 명에 따라 날개를 잃은 알몸으로 지상에 유배된다. 톨스토이의 민화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구두 수선공이 된 미하엘이 인간의 무리에 섞여 살면서 신이 던진 세 가지 물음의 해답을 찾아가는 종교적 우화다. <행복한 라짜로>는 일상에 치어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그때 그 물음의 울림을 되살려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라짜로의 반문은 한 세기 전 톨스토이가 던진 질문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지를 묻고 있다. 라짜로가 겪는 종교적 수난극은 세계는 격변했지만 본질적인 문제들이 여전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원고를 쓰다가 PC가 갑자기 고장 났다. 쓰던 원고는 날아가 버렸고 어떻게 원고를 다시 써야 할지 난감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종이에 연필로 쓰고 있다. 손으로 글을 쓰는 것이 당연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무엇(도구)으로 쓰느냐’가 아니라 ‘무엇(내용)을 쓰는가’ 하는 것이다. 바야흐로 자기계발서의 전성시대다. 살아가는 방법과 기술을 가르쳐 주는 자기계발서도 필요하지만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소명과 목적)?’를 스스로 고민해 보는 시간이 아닐까? 처세술과 재테크 실용서가 베스트셀러 목록을 점령하고 지적 허영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는 이 시대에 역설적으로 소박한 철학이 필요한 것과 같은 이치다. 인류가 지나온 오래된 길 속에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있다. <행복한 라짜로>는 그 길을 찾으려 ‘길을 헤매는’ 영화다. ‘오래된 미래’를 돌아보며 인간의 본질을 성찰하고 잃어버린 삶의 지혜를 찾는 일, <행복한 라짜로>가 영화로 읽는 철학책이 되어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이유다.
제71회 칸국제영화제 각본상 수상작, 비전문 배우들의 신선한 연기, 마술적 리얼리즘, 현대사회의 병폐를 은유하는 타임머신 우화, 16mm 필름으로 찍은 자글거리는 화면의 질감, 계급과 자본의 자리바꿈, 종교의 양면성, 상징적 소재와 사건들의 의미, 역사적 진보와 혁명의 필연성을 역설하는 주제 의식 등 영화를 분석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순결한 라짜로’의 본성 앞에서 무의미해진다. 우리가 영화를 보고 진정으로 깨우치지 못한다면 이런 껍데기들이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 영화는 식물이 태어나는 것처럼 태어났다." <행복한 라짜로>를 만든 알리체 로르와커 감독의 말이다. 라짜로는 육식동물의 세계 한가운데에 태어나 그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나무 한 그루’ 같다. 갈등, 위협, 기만, 술수, 투쟁, 파괴가 이 땅을 가득 채울 때 라짜로의 선의(善意)는 다른 생명을 불러들이는 생명의 나무처럼 지상의 모든 것을 포용하려 한다. 라짜로의 세계는 본연의 선함으로 가득 차 있다. 인위가 아닌 무위의 세계. 가장 단순한 것이 오히려 급진적이듯 라짜로의 무조건적 선함은 이 세상 것이 아닌 것 같아서 낯설고 비현실적이다.
‘역사의 발전과 진보는 헛된 꿈이 아닐까?’ 하는 의심과 두려움의 끝에서 우리는 라짜로의 슬픈 대속(代贖)의 목격자가 된다. 이 세계에 우리가 꿈꾸는 구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속죄는 일회성으로 그쳐 금세 잊히고, 정작 죄를 지은 이들은 ‘먹고 사는 일’에 급급할 뿐 삶의 의미에 관심이 없다. 우리 곁에 성자가 살고 있다 해도 모르는 시대, 부활한 성인이 재림한다 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불모의 시대는 채울 수 없는 공허와 아물지 않는 상처의 비명만이 가득하다.
쉽게 답을 알려주지 않는 영화, 질문을 하되 관객들을 내치지 않고 가슴으로 끌어안으려는 영화, 영화 속 이야기에 뿌리를 댄 상상력이 스크린 밖으로 뻗어 나와 현실에 가지를 치고 잎을 만들어 그늘을 드리우는 슬픈 우화(寓話). 그 짙고 깊은 이야기의 그늘 아래 누워 우리가 누구인지,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오랫동안 사색하게 만드는 <행복한 라짜로>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뭇 생명을 행복하게 하는 한 그루 나무처럼 보는 이들의 마음을 맑게 정화해 주는 공기청정기 같은 영화다.
by 타자 치는 스누피
#행복한라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