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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자 치는 snoopy Feb 05. 2020

도미니언

인류와 지구의 2인 3각 달리기를 위하여

목적을 가지고 쓴 글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숭고한 목적이라도요. 글이 목적성을 갖는 순간, 그 글에서 강요와 권위의 냄새가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프로파간다는 양날의 칼입니다. 선명한 목적성은 확고한 존재 의미를 획득하기도 하지만, 그 글을 보이지 않는 틀 안에 가두기도 할 테니까요. 너무 거창하게 떠벌렸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글이 많은 이들에게 읽히길 바랍니다. 그런 기원을 담아, 간절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썼습니다. 그럴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 제 역량의 문제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여러분! 당신 곁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영화를 보시고 이런 목소리에 한 번 귀를 기울여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한번 더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심정으로 말입니다.


한참 모자란 솜씨지만, 훌륭한 문화 잡지 <해피투데이>에 제법 많은 영화 관련 글을 썼습니다. 그 글 중에 2019년 7월 원고로 보낸 이 글이 제겐 가장 '애틋한 자식' 같습니다. 요즘 저는 한 끼 밥상을 마주할 때마다 심각한 딜레마로 몸살을 앓습니다. 겉으로야 태평스러워 보이지만 제 안은 여러 가지 비명으로 소란스럽습니다. <도미니언>을 보고 난 후부터 생긴 증상입니다. 그 이전부터 가끔 생각은 했던 일입니다만, 이제는 그 생각의 단편들이 고민의 덩어리로 뭉쳐 덩치를 키워가고 있는 중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먹지 않을 수는 없겠죠. 인간도 생명체이니까요. 피치 못하게 다른 생명체를 먹어야 살 수 있다는 것이 생명의 숙명입니다. 그 피할 수 없는 굴레가 가끔 저를 슬프게 합니다. 


영화를 안 보셔도 좋고, 제 글을 안 읽으셔도 그만입니다. 그래도, 아래 두 문장 만큼은 꼭 읽어 보셨으면 합니다. 5초면 됩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는 6억 1,900만 명입니다.
우리는 사흘마다 그만큼의 동물을 죽입니다. 

- 다큐멘터리 영화 <도미니언> 中



이 글을 얼마나 많은 분들이 읽으실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읽더라도 이 글이 읽은 이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을 거라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적어도 한 사람에게는 제가 권한 영화와 제 모자란 글이 쓸모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인 한 분이 영화 <도미니언>을 보고 '생각을 고쳐 먹었'다고 알려주셨거든요. 너무나 기뻤습니다. 글이랍시고 되도 않는 것들을 끼적거리고 살면서 가장 보람찬 순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뿌듯했습니다. 고마웠고요. 당신은 제게 '작은 기적'을 선물해 주신 겁니다. 환경 문제의 키워드인 '모든 것은 연결돼 있다'라는 명제처럼, 당신의 변화가 또 다른 변화를 불러올 수 있을 테니까요.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https://blog.naver.com/66u/221564450801



요즘 저는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1) 공장식 축산 방식으로 생산된 육류 및 부산물 소비를 (될 수 있으면) 줄인다. 

2) 1회용 비닐봉지를 받는 대신 장바구니(가방)를 들고 장을 보러 간다.

3) 쓰레기 분리수거 절차와 방법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4) 1회 용품 사용을 자제한다.

5) 음료는 컵에, 플라스틱 빨대 및 나무젓가락은 받지 않는다.

6) 음식물 쓰레기(잔반 등)를 줄이려 노력한다.

7) 적게 사고, 오래 쓰고, 욕심을 줄이려 노력한다.

8) 세상의 모든 문제(환경 문제, 자본주의 시스템, 자연, 인류와 생물종의 생존, 인간 개인의 건강)는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해피투데이> 2019년 7월호 '부엉이 극장' 원고입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도미니언 (Dominion, 2018)>을 봤다.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참담하고 끔찍하고 처참했다. 영화는 호아킨 피닉스, 루니 마라, 시아 등 '비건의 삶을 지향하는 셀러브리티'들의 내레이션을 통해 호주에서 사육하고 도살하는 돼지, 닭, 오리, 소, 양, 염소, 말, 여우, 밍크 등 가축들의 생애(자연 수명보다 한참 짧은)를 압축해 보여준다. 영화에는 어떤 주장도 없다. 사육과 도축 과정의 객관적 사실을 메마른 화면과 건조한 내레이션 톤으로 전하는 서술과 묘사만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저 우리가 날마다 소비하는 고기가 어떻게 우리의 풍요로운 식탁에 오르는지를 보게 된다. 그러나 그 담담함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그토록 외면하고 싶었던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그 진실은 한없이 날카롭고 잔인하며 도축장의 어둠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동물들이 느끼는 감정처럼 극렬하게 공포스럽다.


영화를 본 나는 쉽게 바꿀 수 없을 것 같은 거대한 현실의 장벽을 마주하고 깊은 슬픔을 느꼈다. 인간이란 잡식동물에 대한 맹렬한 회의에 빠졌지만, 영화를 본 다음 날 아버지와 함께 돼지고기를 구워 먹었다. '고기를 좋아하는 아버지나 집사람에게 고기를 먹지 말자고 설득하거나 강제할 권리가 나에게 있는가?'라는 고민이 나의 비루한 핑곗거리였다.


효율성과 속도, 비용 대 효과, 성과주의. 신자유주의적 발상은 제어 불가능한 괴물(공장식 축산 시스템)을 만들었다. 대량생산 시스템 구축은 대량소비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필연적 결과물이다. 인류 식문화의 풍요로운 제국은 공장식 축산의 대학살 위에 세워졌고 기계적 시스템 안에서 온갖 가축들의 수난을 자양분 삼아 인간은 오늘도 차고 넘치는 풍요를 영위하고 있다.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다른 생명을 살 수 있는 시대, 우리는 깔끔하게 손질해 마트에 진열된 고기를 아무런 죄의식 없이 먹고 있다. 그 돈은 죄의식을 잊고, 먹는 즐거움과 도덕적 안위를 얻기 위해 지불하는 값이다. 영화를 보며 끔찍해하는 '나', 폭력적 사육과 대학살에 버금가는 도축 과정을 비판하는 '나',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나'와 연관 짓지 않고 천연덕스레 고기를 먹는 '나'가 분리되지 않고 뒤섞여 있다. 유체이탈도 이런 유체이탈이 없다. 공장식 축산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악행이라면 이 폭력의 가장 중요한 공범은 암묵적 동의, 의도적 망각, 침묵, 무시를 일삼으며 그렇게 생산된 고기를 '맛있게 먹는 나와 당신'일 것이다.


인간들의 오락을 위해 로데오 경기장으로 내몰린 채 카우보이들의 밧줄에 걸려 목이 꺾이는 송아지들과 비싸게 팔리는 털을 얻기 위해 산 채로 털이 뽑히거나 가죽이 벗겨지는 오리와 여우의 수난을 보며 '인간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항변하는 것은 야만이고 기만이다. 다른 이들에게 강제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그저 나 자신만이라도 공장식 축산으로 생산된 고기 섭취를 줄이겠다는 소극적 저항을 실천하려 해보지만, 그마저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구내식당에서 끼니때마다 육류나 달걀로 조리한 음식을 선택적으로 가려 먹는 것은 쉽지 않다. 포화도가 극한에 달한 사육장이나 몸을 옴짝달싹할 수도 없는 뜬장에서 성장호르몬과 항생제에 범벅이 된 채 자란 닭들이 낳은 계란은 빵 등 각종 2차 가공식품으로 둔갑해 우리 식탁에 오른다. 비건 식당을 찾아가 그곳에서 육식에 대한 죄의식 없이 한 끼 맛있는 식사를 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것 역시 차악(次惡)일 뿐 한계가 있다. 생선은 괜찮다 하지만 영화에서 소개하는 가두리 양식장의 실태를 보면 생선 섭취 역시 대안은 아닌 것 같다. 이도 저도 다 마음에 걸리면 내가 먹는 모든 음식 재료들을 직접 기르고 키우고 도축하는 수밖에 없다. 현대 사회에서 그것은 불가능한 염원에 가깝다. 이 딜레마를 극복하고 공장식 축산 시스템에 의해 생산된 고기 및 부산물(닭, 돼지, 소고기, 우유, 계란 등) 섭취를 거부하며 사는 것은 확고한 신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작업 속도를 저해한다는 이유로 가축들을 때리고 던지는 노동자들을 무조건 욕할 수도 없다. 아직 죽지 않은 동물들의 목을 따 회전 갈고리에 거는 도축업자들만 일방적으로 비난해선 안 된다. 그들은 우리 자신의 다른 얼굴이다. 나 대신 그들의 손에 피를 묻힐 뿐, 내가 먹고 있는 고기가 어떻게 생산됐는지 의도적으로 망각하고 편하게 고기를 먹는 나나, 작업 효율을 위해 도축하는 동물들을 학대하는 노동자들과 그들을 굴리는 시스템 모두 이 비극의 공범이다.



수전 손택이 <타인의 고통>에서 지적했듯, <도미니언>과 같은 환경 영화가 일반인들에게 선정적 포르노그래피로 작용하면서 '동물의 고통'이 연민의 대상임과 동시에 스펙터클한 '즐길 거리'로 자리매김하거나, 내가 하는 행위(육식의 대량소비)가 비인도적 공장식 축산 시스템이라는 현상의 원인이자 동력이라는 사실을 무시하거나 망각하는 일회성 자극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가 누리고 있는 식생활의 풍요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그 현실을 정확히 인지해야 한다. 한나 아렌트가 갈파한 '악의 평범성'은 유대인 대학살에만 적용되는 논점이 아니다. 그보다 더한 대학살이 우리가 볼 수 없지만 바로 우리 곁에서 날마다 아무렇지 않게 자행되고 있다는 것을, 다큐멘터리 영화 <도미니언>은 담담하게 고발하고 있다.


불변하는 것은 없다.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던 매장식 장례문화가 사회적 위기의식과 공감대 형성 과정을 거치며 화장식 문화로 바뀐 것처럼, 효율성만을 중시하는 공장식 축산의 폐해가 결국 우리 자신을 겨누는 칼끝이 되어 돌아올 것이라는 사회적 위기의식이 차근차근 쌓이면 언젠가는 인식의 전환이 시작될 것이라는 믿음을 놓고 싶지 않다. 봉준호 감독은 영화 <옥자>가 관객들의 악몽이 되기를 기대하며 영화를 만들었다고 했다. 우리가 괴로움과 참담함을 참으며 <도미니언> 같은 고발성 다큐를 봐야만 하는 이유다. 이 영화가 당신의 어두운 악몽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해 본다.



by 타자 치는 스누피




#도미니언, #공장식축산, #당신이먹는것이지구와인류와당신을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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