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함이 쏘아 올린 작은 공#3
많은 사람들이 아프리카 사람들과 일할 때 화를 참지 못하곤 합니다. 일처리가 느리고 느긋하다는 이유 때문이죠. 업무적인 관계가 아닌 친구로 만난다면 유쾌하고 재미있지만, 나와 아프리카 친구 사이에 일이라는 존재가 끼게 된다면 그들을 답답해하면서 짜증을 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개인마다 겪었던 경험도 다르고 관점도 다르니 이에 대해 하나하나 왈가왈부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익숙한 속도를 기대하는 것은 대체로 불가능한 게 사실입니다.
이들이 느린 이유를 단지 국민성에서만 찾는 것은 이들을 이해하는 올바른 방향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일을 할 때 업무가 늦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이메일을 보내줘야 하는데 정전 때문에 컴퓨터 전원을 켤 수 없어 보내지 못하는 경우, 비가 오고 길이 진창이 돼 출근이 늦어지는 경우와 같이 천재지변에 취약해 업무가 늦어지기도 합니다. 혹은 효율적인 시스템의 부재로 업무가 늦어지기도 하죠. 가령 은행에 번호표가 없어 아무렇게나 줄을 서고 이로 인해 순서가 뒤죽박죽 되는 것이나, 관공서 사무실에 안내판이 없어 고객을 담당 부서로 소개하느라 일을 처리하지 못하는 등 일이 늦어지는 이유는 수도 없이 다양합니다. 반면 일이 제시간에 끝날 수 있는 이유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일을 못하니 아프리카가 발전할 수가 없지'라는 생각은 현상을 단순하게 바라보는 관점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막상 업무로 이들과 부딪히면 이런 생각에 쉽게 균열이 가곤 합니다. 사회간접자본이 탄탄하지 못해 일처리가 느려지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제대로 바라보기가 힘듭니다. 답답할 수도 있겠지만 뭐가 됐든 이들과 일은 해야 하는데, 이들의 호흡과 흐름에 내가 녹아드는 수밖에 없죠.
하지만 기다림은 그 대상이 사람이든 연인이든 일이든 소식이든 어렵기 마련입니다. 제가 파견된 기관의 운동장 환경 개선 사업을 위해 총 세 군데의 시공 업체에 견적서를 요청했습니다. 현지인 브로커이자 친구를 통해(닦달해) 알아낸 시공 업체였고 제 기준에선 제법 확실한 포트폴리오를 보유하고 있는 업체들이었습니다. 업체와 미팅을 하고 운동장 실측을 위해 다 같이 모여 제 운동장 디자인을 보여줬습니다. 그러고는 실측을 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합리적인 견적서를 줄 업체를 선정하겠다고 말했고 그들은 결의를 다지며 저와의 악수를 마친 후 각자의 사무실로 돌아갔습니다.
그렇게 일주일이, 열흘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저는 일부러 세 업체를 공개경쟁시켜 이들이 빠르고 합리적으로 일을 할 수 있게 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조급한 사람은 업체가 아니라 저였습니다. 당연히 빠르고 합리적으로 좋은 견적서를 보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게 당연하지 않았습니다. 이 기다림은 제 의욕을 마구 깎아내렸습니다.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아 무기력해졌습니다. 그러니 처음 견적서를 받았을 때, 어찌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견적서가 잘 나와서가 아니라, 그래도 이들이 느리지만 본인들의 호흡대로 일을 해내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열흘이 지나고 겨우겨우 세 군데 중 두 곳의 견적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중 합리적인 금액을 제시한 업체를 최종 선정했습니다.
이제 이 프로젝트 예산에 맞춰 제 욕심을 하나하나 버려가며 업체와 가격을 맞춰나가는 지루한 미팅이 이어졌습니다. 3만 달러 안에 운동장을 평탄화하고, 새로 잔디를 깔고, 체육 시설을 들여오고, 휴게 공간을 만들자니 계속 업체를 쥐어짜야 했습니다. 사실 제 평생에 시공업체와 공사 견적에 대해 이야기를 할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해도 두려운 일인데 아무것도 모르는 곳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뭔가를 해내기 위해 이걸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아득했습니다.
끝내 견적서를 토대로 사업 계획서를 제출해 사무소 심의를 받았고 최종적으로 프로젝트에 착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사실 이 과정도 복잡했지만 지루하기 때문에 생략). 이제 프로젝트용 계좌를 따로 개설해 공사에 본격적으로 착수할 준비만 하면 되는 거죠. 어려웠던 시공 업체 선정, 복잡했던 사업 계획서 작성의 과정이 끝나서 이제는 프로젝트를 관리만 하면 되는 줄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우간다는 저에게 방심할 틈을 주지 않는 곳입니다. 매우 쉬울 줄 알았던 계좌 개설이 제 발목을 잡았습니다. 제가 다녀 본 은행이라곤 제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고는 주택청약계좌를 개설해준다거나, 펀드 계좌를 개설해주는 그런 곳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우간다는, 같은 은행임에도 자신들이 정확히 어떤 상품을 보유하고 있는지 지점별로 상이하게 아는 듯한 눈치였습니다. 계좌 개설이 안 된다고 했다가, 다른 종류의 계좌가 있다는 걸 확인하고 비로소 서류를 작성할 수 있었습니다. 공란 중에는 해당 은행을 추천한 사람의 서명란이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공란으로 두고 넘어가서 서류 작성을 완료했는데, 은행 직원이 은행 추천인 서명이 반드시 있어야 계좌 개설이 가능하다며 서명을 받아 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추천인이 다른 지역에 있는데 어떻게 서명을 받냐며 그냥 계좌를 개설해달라고 말했더니, 그렇다면 계좌를 개설해줄 수 없다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 말은 제 얼굴에 남아있는 마지막 온화함을 잃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어차피 진짜 추천인은 다른 지역에 있으니 서명을 받을 수도 없고 결국 아무나 데려와서 서명하게 되는 건데 이게 너네한테 무슨 소용이 있어?"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상태로 마구 쏘아붙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은행원은 그저 추천인 서명을 받아 오라는 대답으로 일관했습니다. 그 모습이 얄미워 시간 낭비(such a waste of time이라고 실제로 내뱉음)라며 은행 문을 박차고 나왔습니다.
어쩌다 한인 분을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드리게 됐습니다. 그분은 고생했다면서 화 내봐야 본인만 힘들다며 이런 이야기를 건네주셨습니다. "여기선 하루에 한 가지 일만 해내도 잘한 거야"
자네가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개가 아닐세. 그 사람은 분명 하나의 위장일세.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면 그의 모습 속에 우리 자신 속에 들어앉아 있는 그 무언가를 보고 미워하는 것이지.
- 헤르만 헤세 <데미안> 중
집에 와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이 사람들보다 조금 더 빠르다는 이유로 큰 소리 낸 게 좀 무안해졌습니다. 일처리가 느린 제각기의 사정이 존재하는 우간다 사람들처럼, 제 인생도 돌아보면 그렇게 빠르진 않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남들 다 하는 때에 해냈던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대학도 늦었고, 군대도 늦게 갔고, 그러니 졸업도 늦고, 취업은 아직까지 늦고 있는 중이죠. 그래서 저랑 닮은, 그러니까 뭘 제 때 못하는 이곳이 더 싫었나 봅니다. '하루에 한 가지 일만 해내도 잘한 거다'라는 칭찬을 들을 수 있는 이곳이, 어쩌면 답답하더라도 저랑 닮은 곳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