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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Jun 19. 2018

그럼에도 내가 스타트업에 다니는 이유

너무 당연해서 하지 않았던 이야기지만, 물어보신다면야!

  스타트업에서 일한 지 이제 3년이 다 되어 간다. 와...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신입 시절 겪었던 고난과 역경이 장마철 쏟아지는 비바람 수준이었다면 요 1년간은 가히 쓰나미였다. 정신이 좀 들라치면 파도가 덮치고, 다시 일어설라치면 지진이 우지끈. 어떻게든 버텨보고 있지만 나날이 터지는 극한 사건들을 더 마주했다간 몸도 마음도 병원 신세를 질 처지다. 확실해졌다. 이 회사는 불의 고리에 터를 잡고 있다. 더 있다간 내가 죽겠다. 이직 진짜 해야지. 포트폴리오를 정리하며 원티드를 둘러본다. 어디 괜찮은 스타트업이 있어야 할 텐데.


  그렇게 고생이라면서, 왜 또 스타트업에 가려고요?


  얼마 전 당황스런 질문을 받았다. 스타트업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그렇게 늘어놓으면서 대체 왜 스타트업에 계속 다니냐는 거다. 세상에. 나는 스타트업을 욕한 게 아니다. 내가 다녔던 스타트업에서 벌어진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을 욕한 거다. 스타트업이 이러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풀어나간 거다. 나는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게 좋다. 그나마 스타트업어서 지금까지 직장생활을 계속해 올 수 있었던 거다.


  술 억지로 마시기, 꼰대 상사 눈치 보며 일하기, 외부 미팅도 없는데 굳이 비즈니스 캐주얼 갖춰 입기, 왜 해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는 일을 까라면 까야지 식으로 처리하기, 상사에게 아부하기, 업무고과 몰아주기. 이런 것들이 어쩔 수 없는 당연한 일로 여겨지는 회사였다면 나는 한 달도 못 버티고 진작 뛰쳐나왔을 거다. 애초에 회사는 일을 하러 오는 것인데 왜 일과 상관 없는 것들에 신경 써야 하는 거지?


  일만 잘 하고 싶다. 그래서 스타트업에 다닌다.

  스타트업에서는 이런 것들을 원칙적으로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이 일을 한다'는 말, 스타트업 소개에 남용되고는 있지만 그만큼 스타트업의 본질을 꿰뚫는 말이다. 내가 사는 세상에 문제가 있고, 이걸 해결하면 나를 포함한 여러 사람이 더 행복해질 거고, 그렇게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는 논리다. 수익을 내며 그 문제 해결에 성공하는 게 모든 것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목표다. 당연히 이루기 어렵다. 능력 있는 팀원들이 비전을 공유하며 한마음 한뜻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 일 하나에만 매진해야 한다.


  그 덕에 에너지를 낭비할 겨를이 없다. 회식에 끌려다니며 과음할 필요 없고, 쓸데 없는 눈치 봐야 할 꼰대 없고, 꼭 필요한 자리가 아니라면 비주얼로 격식 차릴 필요도 없다. 앞만 보고 달리기도 바쁜데 옆으로 눈 돌릴 틈이 어딨나. 일이야 당연히 많다. 인력 부족으로 한 사람이 여러 역할을 맡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성장을 위한 일만 하기에 왜 해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는 일은 없다. 월급은 웬만하면 적다. 이제 막 도약 중인 회사에 돈이 없는 건 놀랍지도 않은 일이다. 그래도 회사와 내가 함께 성장하면 이 고생이 정당한 보상으로 돌아올 것을 믿을 수 있다. 스톡옵션이나 성과급이 끝내 없어도 어딜 가나 써먹을 실력은 남는다.


  웬일로 희망 넘치는 이야기를 있지만 이런 '원칙적'인 것들이 지켜지지 않는 스타트업도 널렸다. 하지만 괜찮다. 그건 그 스타트업이 잘못된 거다. 조용히 이직을 준비하건 대표랑 다이다이를 뜨건 팀원의 선택이지만 월급 받으니까 참고 견뎌야 할 당연한 일은 없다. 스타트업의 구성원 대부분이 스타트업은 이래야 하고,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어서다. 잘못된 걸 잘못되었다고 인지하고 있다면 그 잘못은 바로잡을 수 있으니 괜찮다.


  스타트업이 문제가 아니다. 내가 다니는 이 스타트업이 문제인 거다. 그래서 내가 이직 준비 중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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