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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Nov 02. 2022

<수프와 이데올로기>, 박수 치느라 손이 아팠던 영화

인생 작품이란 뭘까. 어떤 책도 영화도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인생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배울 작품은 드물게나마 만난다. 이번에 본 <수프와 이데올로기>가 그런 영화였다. 아무 정보도 없이 본 영화가 마음에 파도를 몰고 왔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는, 내 마음 한구석 확고했던 믿음이 무너질 만큼 거대한 파도였다.

“몇 살 때 결혼했죠?”
“22살”
“22살? 대단하네, 난 52살인데.”

잠자리에 누워 엄마와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딸, 사위 될 사람을 위해 삼계탕을 끓이는 어머니,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짧은 예고편에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다큐멘터리 영화였다. 마침 명필름에서 감독과 함께하는 GV를 열기에 당장 예매했다.


<수프와 이데올로기> 1분 예고편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사상이 달라도 함께 수프를 먹는 가족의 이야기다. 억지 연출 없이 한 가족의 삶을 오랫동안 담은 다큐멘터리. 그 속에 웃음도 눈물도 사랑도 다 있었다. 다양한 관점을 나눌 수 있는 영화지만, 실컷 수다를 떨고 싶지만, 아직 보지 않은 분에게 괜한 스포일러를 하고 싶진 않다. 이번엔 영화 예매를 도울 짧은 감상만 남긴다.

나에게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타인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에 대한 영화였다. 재일한국인 2세인 양영희 감독의 부모는 평생 북한의 이데올로기를 추종하며 살았다. 남남이었다면 평생 대화할 일 없었을 만큼 다른 부모와 자식. 극단적으로는 인연을 끊고 살거나, 적당히라고 해도 명절에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로 타협하며 지낼 수 있었을 텐데. 감독은 부모에게 카메라를 들이민다. 그들을 제대로 알고 싶어서. 그런 딸이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누구도 그만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감독은 26년에 걸쳐 가족의 모습을 담았고, 이번 작품까지 총 3편의 가족 다큐멘터리를 찍었다.

<수프와 이데올로기>가 나에게 인상적인 영화가 된 건 감독의 남편 아라이 카오루 덕분이다. 새로운 가족의 등장 덕에 작품의 맛이 깊이 끓인 삼계탕처럼 진해졌다. 실제 가족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인데, 어떻게 이런 멋진 사람이 극적인 타이밍에 뿅 나타날 수 있지? 결혼 허락을 받기 위해 어머님을 만나야 한다며 한여름에 정장을 빼입고 찾아온 예의 바른 일본인. 땀을 뻘뻘 흘리다 결국 깜찍한 미키마우스 티로 갈아입은 그가 김일성과 김정일 액자 아래에서 어머님이 끓인 삼계탕을 먹는다. 기묘한 풍경 속에 예비 사위와 어머님의 대화는 더없이 다정하다. 사위로 일본인은 싫다던 아버지도 먼 데서 이 모습을 흐뭇하게 보셨겠지.

어머님의 새 아들로, 감독의 든든한 지원군으로 동분서주하는 카오루의 모습에서 다시금 사랑이 무엇인가 생각해볼 수 있었다. 잠시 반짝였다 타들어 가는 사랑이 아니라 상대의 다름까지도 지켜보며 끌어안는 사랑. 사랑이 가득한 새 가족의 등장이 자칫 지나치게 어둡기만 했을 장면들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 다정함이 작품을 빛냈다.

양영희 감독은 GV에서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건 거만한 것이다.” 라고 말했다. 어머니에 대해서도 이제야 겨우 이해하기 시작했다면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을 덮어 둔다는 쉬운 선택 대신 두 눈을 뜨고 직면하는 용기 있는 선택을 한 감독의 태도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바른 관점을 배웠다. 부모님은 답답해, 나는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거야, 그렇게 단정 지어 버리면 절대 알 수 없는 진짜 이야기. 듣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인내가, 깊은 사랑이 필요하다. 그 어려운 일을 해낸 양영희 감독과 그의 남편 카오루 프로듀서에게 실컷 박수 친 GV였다.

매 걸음이 무겁고 고통스러웠을 텐데, 끝내 관객까지 울린 진짜 이야기를 담은 감독에게 감사하다. 이 영화를 많은 사람들이 보면 좋겠다. 아득히 멀고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세상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을 알려 준 따뜻한 영화였다. 글을 읽은 당신이 이 영화를 꼭 보시면 좋겠다.


<수프와 이데올로기>가 무척 좋은 영화라 꼭 소개하고 싶었어요. 개봉한 지 얼마 안 된 지금 소개해야 편한 시간대에 예매해서 보실 수 있을 것 같아 서둘렀네요. 예고편만 보고 편견 없이 영화를 만나셨으면 해서 깊은 이야기는 일부러 다루지 않았어요. 스포일러 가득한 감상은 나중에 따로 써보려고요. 그때 자세한 감상을 나눌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영화 정말 좋았어요. 다시 한 번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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