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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Dec 17. 2019

내 2019년을 밝힌 소설과 산문 6권

믿고 읽어도 되는 책, 96권 중 딱 6권!

2019년이 거의 다 갔다. 그립지 않을 한 해가 이렇게 갔다. 몸과 마음이 성치 못한 날이 많았다. 그래서 책에 더 기댔다. 열심히 읽었다. 나무에게 대국민 사과를 해도 모자랄 책이 많았지만 두고두고 읽고 싶은 책도 많이 찾아 기뻤다. 책에 빠져 있는 동안만큼은 '책 한 권 사서 읽을 여유도 있고 그렇게 나쁘지 않은 인생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누그러지기도 했다. 내가 그럭저럭 밝게 사는 듯 보인다면 책 덕분이다.


여기서 소개하는 6권의 책은 내가 2019년 읽은 책 96권 중 가장 좋았던 것들이다. 올해 나오자마자 읽은 책, 이제야 만나 읽은 책이 섞여 있다. 제목을 들어 봤을 법한 베스트셀러도 있지만 출간한 지 10년이 넘었는데 여전히 1쇄가 팔리는 책도 있다. 모두 몇 번이고 꺼내 볼 좋은 책들이다. 책은 골고루 읽는 편인데 진짜 좋은 걸 고르다 보니 모두 소설과 산문이다.


좋은 건 같이 읽어야지! 언제라도 책이 읽고 싶을 때 참고하실 수 있도록 내 맘대로 소개를 덧붙인다. 기억에 남는 문장도 함께 써 두었으니 책마다 분위기를 금방 파악하실 것 같다. 이 중에서 어떤 게 가장 좋냐고 묻는 건 엄마가 좋냐 아빠가 좋냐랑 비슷한 질문이다. 먼저 읽은 순서대로 소개한다.



1.

소설을 한 권 고르라면 이것뿐

디디의 우산 | 황정은

2019년 1월 나옴, 3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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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하는 사람은 왜 함께 오지 않았나.

모르겠다고 d는 대답하려고 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말을 하려니 입에 힘이 들어가고 턱이 벌어지지 않았다. 아마도 웃는 얼굴이 되었을 거라고 d는 생각했다. (...) d는 폭소를 터뜨릴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모르겠다고 d는 대답할 수도 있었다. 모르겠는데 실은 모르지 않아서 모르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 왜 함께 오지 않았는가…왜냐하면 너무 하찮기 때문이라고. 나도 dd도 그리고 당신도. 우리가 너무 하찮아서, 충돌 한 번에 내동댕이쳐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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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에 잡아 단숨에 읽고는 새벽 늦도록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사랑하는 사람, 하찮다는 말의 대척점에 있을 그 사람 그리고 그 사람과의 관계가 언제고 내동댕이쳐질 수 있는 세상이다. 내가 그런 세상을 살고 있다는 걸 평생 모른 척 살았다. 디디의 우산을 읽은 이제는 그들의 사랑도 하찮음도 다 내 것과 같음을 안다. 이토록 깊게 소설에 빠진 건 처음이다. 이렇게 문장 하나하나 마음에 박히는 소설이 있던가. 최근 1년이 아니고 최근 10년을 찾아도 이런 책은 없었다.


만해문학상 수상작, 소설가 50인이 뽑은 올해의 소설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작품이다. 하지만 이런 건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그저 최고다.


2.

에세이가 이렇게 힘찰 수 있구나!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 김혼비

2018년 9월 나옴, 2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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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개인주의자'인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지만, 그렇다. 인간은 모일수록 좋은 것 같다. 적어도 축구공 앞에서, 특히 여자들은. 무엇보다 축구는 재미있으니까. 너무 재미있으니까. 뭐가 됐든 재미있으면 일단 된 것 아닌가. 정말이지, 이거, 기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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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글을 너무 재밌게 쓴다. 배꼽 잡고 쓰러지길 다반사, 유쾌하고 씩씩한 에너지가 문장마다 가득해 읽는 내내 즐거웠다. 김혼비 작가라면 축구가 아니라 농구, 배구, 하물며 십자수에 대한 글을 썼더래도 재밌었을 거다. 그래도 분명 축구라서 더 호쾌하고 멋있다. 여자 축구는커녕 스포츠 전반에 관심이 없는 나지만 기절하게 멋진 언니들의 걸크러시 터지는 에피소드에 반해버렸다.


에세이 하면 왠지 감성적이고 정적인 글이라는 편견이 있었는데 이번에 사라졌다. 여느 소설보다 기운찼다. 좋은 기운이 필요할 때 또 읽어야지!


3.

시끄럽고 재밌는데 외로운 소설

대도시의 사랑법 | 박상영

2019년 6월 나옴, 3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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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둘이 함께 누워 있던 밤에, 규호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카일리가 있음에도 그때 왜 선뜻 나와 사귀기로 했냐고.

-그러거나 말거나, 너였으니까.

그래서나 그러나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러거나 말거나, 너였다고. 나는 그 말이 좋아서 계속 입 안에 물을 머금듯이 되뇌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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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젊은작가상 수상집에 실린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로 팬이 된 다음부터 박상영 작가의 책은 일부러 찾아 읽는다. 읽고 아쉬웠던 작품이 없다. 이번 책 대도시의 사랑법도 시끌벅적하고 웃긴데 외롭고 쓸쓸해서 마음에 오래 남는 희한한 이야기들이 담겼다. 책에 실린 네 소설의 주인공은 모두 '영'이다.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고, 속 없이 즐거운 사람 같다가도 문득 외로운 듯 보이는 영이가 자꾸 눈에 밟힌다. 퀴어문학이라고 하면 낯설고 부담스러울 것 같지만 박상영 작가의 작품은 이상하게 친근하다. 겉으로는 나와 닮은 데가 하나도 없는 주인공들인데 공감이 가고 정이 간다. 사연은 다르겠지만 너도 나도 외로운 게 사람이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 주인공들이 어쩌면 나일 수도, 나였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소설을 읽은 건 처음이다.


2016년에 데뷔했다는 신인 작가가 이런 흠잡을 데 없는 소설을 쓰다니 문학은 역시 재능의 영역인가 싶다.


4.

17년에 한 권 나올까 말까 한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 | 김애란

2019년 6월 나옴, 3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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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사람들과 조촐한 축하 자리를 가졌다. 몇 안 되는 동기들이지만 그 자리에 모두 와주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장발에 수염을 기르고 다니던 동기 하나가 내게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사줬다. 평소 학교 과실에서 먹고 자며 기숙하던 사내였다. 2002년, 이문동엔 유명 프렌차이즈 제과점이 없었고, 그가 동네를 헤맨 끝에 들고 온 건 크림에 색소가 많이 들어가고 빵에서 쉰 행주 맛이 나는 ‘야매’ 아이스크림 케이크였다. 우리는 술집에서 머리를 맞대고 앉아 숟가락으로 곰돌이 모양의 아이스크림을 떠먹었다. 모두 열심히 파먹었지만 끝내 다 먹지는 못한 것으로 기억한다. 동기들이 여느 때처럼 시끌벅적 떠들며 잔을 기울이는 동안 그는 풀 죽은 채 ‘배스킨라빈스 걸 사 왔어야 했는데’라는 말을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곰돌이는 한쪽 눈과 코가 파인 채 빙그레 웃다 점점 울 것 같은 얼굴로 녹아내렸고, 한참 뒤 우리는 서로 익숙한 뒷모습을 보이며 휘적휘적 헤어졌다.


(...) 어느 날 오랜만에 이문동 제과점 앞을 지나다 그때 생각이 났다. 한 사내가 밤새 같은 말을 중얼거리던 겨울밤이.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듯 얼굴 여기저기가 움푹 파인 채 천천히 녹아 흘러내리며 미소 짓던 곰돌이도. 그제야 나는 ‘배스킨라빈스 걸 사 왔어야 했는데’가 얼마나 다정한 말인지 새삼 깨달았다. 강북의 후미진 부엌 어딘가에서 ‘진짜 아이스크림 케이크’와 ‘진짜 비슷한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만들기 위해 진짜 노력했을 제빵사처럼. 그 무렵 그렇게 조금씩 어딘가 모자라고 우스꽝스럽고 따사로운 무엇이 나를 키우고 가르친 건 아니었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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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등단한 김애란 작가는 신인 시절부터 중견 작가가 된 지금까지 계속 좋은 작품을 쓴다. 소설 좋아하는 사람이면 모를 수가 없다. 어떻게 이런 글을 쓰지? 싶을 만큼 엄청난 문장으로 엄청난 작품을 쓴다. 그런 작가의 첫 산문집인데 이 또한 엄청나다. 가족 이야기, 동료 작가 이야기, 본인이 마주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10년 넘는 시간 동안 차곡차곡 쌓였다. 읽는 동안 작가가 참 건강한 사람이구나, 주위에 좋은 사람 따뜻한 이야기가 많구나 생각했다. 다른 산문집도 내주길 바라지만 앞으로 17년은 걸릴 것 같다.


좋아하는 사람이 슬쩍 보여준 일기 같아서 읽는 내내 행복했다.


5.

이런 소설을 알게 되다니 운이 좋았지

보리밟기 쿠체 | 이시이 신지

2007년 9월 나옴, 4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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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밟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징검돌이 깔린 항구의 거리에서 자란 내 코에는 흙냄새보다는 기름기 도는 공장의 연기와 맥주가 섞인 아지랑이 쪽이 훨씬 익숙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은 때때로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읍내로 날라온다. 선원의 속옷, 유언장, 처음 보는 외국의 깃발, 그리고 밤에는 앞바다를 헤엄치는 귀신들의 으르렁대는 소리.

골목에서는 선원들이 자주 치고받곤 했다. 뱃사람의 싸움은 순식간에 승부가 난다. 무승부는 없다. 힘센 쪽이 거의 한 방에 상대를 때려눕히고 의기양양하게 술집으로 돌아간다. 아이들은 싸움에 진 선원을 부축하여 다른 술집으로 옮겨놓고 머리에 한 컵 가득 물을 붓는다. 그러면 그 선원은 코피 범벅이 된 동전을 한두 닢 주었다.


처음으로 쿠체를 만난 것은, 초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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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 작가가 나오는 서울국제작가축제 소설읽기 행사에 다녀왔다. 보리밟기 쿠체를 쓴 이시이 신지 작가도 참여했는데 작품을 재밌게 낭독하는 멋진 작가라 책을 샀다. 고양이가 나와서 그런가, 소년이 나와서 그런가, 해변의 카프카를 쓴 무라카미 하루키가 생각났다. 야한 건 하나도 안 나오는데도 그 이상으로 홀리는 소설이었다. 고양이라고 불리는 키 큰 소년이 주인공이고, 음악이 많은 이야기를 불러온다. 동화 같은 이야기와 환상적인 묘사, 읽는 내내 심심할 틈 없는 사건들이 모여 바다 냄새 나고 오케스트라 음악 들리는 이 소설이 나왔다.


이런 재밌는 책이 아직도 1쇄가 팔리고 있다는 게 아쉽다. 숨은 명작을 읽을 수 있어서 행운이었다.


6.

거를 작품이 없는 라인업, 그중에 납득되는 대상작

2019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 대상 윤성희

2019년 9월 나옴, 2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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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았다 떴다. 똑딱. 빛이 지구를 일곱 바퀴 돌았을 것이다. 또 눈을 감았다. 똑딱. 그건 딸이 어렸을 때 내게 알려준 거였다. 엄마, 눈 한 번 깜빡일 시간에 빛이 지구를 일곱 바퀴나 돈대. 딸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눈을 감았다 뜨곤 했다. 눈 깜빡할 시간. 그 시간에 빛이 지구를 몇 바퀴나 돈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고민은 하찮게 느껴진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불이 켜진 집이 하나 보였다. 불이 켜진 저 집에 누가 살까 상상해보았다. 처음으로 내 집을 마련한 사람들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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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상, 젊은작가상, 이효석문학상, 이상문학상... 우리나라 소설을 좋아해서 수상작품집을 종종 챙겨본다. 대상작은 대개 훌륭하지만 수록된 모든 작품이 맘에 들 수는 없다. 그게 보통이다. 그래서 이번 김승옥문학상이 특별하다. 올해부터 문학동네 주관으로, 심사 대상이 등단 10년 이상 작가들의 단편소설로 바뀐 덕에 이 라인업이 나왔다. 여기 실린 작품들은 어느 문학상에서 대상을 타도 부족함이 없을 것들이다. 믿고 읽는 작가들의 수작이 한가득. 그 와중에도 윤성희 작가의 '어느 밤'이 최고다. 윤성희 작가를 좋아하는 최측근과 나는 대상작이 윤성희 작가의 작품이라는 것만으로 이 책을 샀다. 예전에 한 낭독회에서 권여선 작가는 윤성희 작가가 풀어내는 이야기를 물결에 반짝이는 햇빛이나 달빛, 윤슬 같다고 표현했다. 거대한 사건 없이 그 반짝임만 따라가도 인물들의 감정에 빠져들게 되는 게 윤성희 작가 작품의 매력이다.


"모든 작가들이 자신만큼 잘해냈지만 윤성희는 윤성희보다 더 잘해냈다. 대상이 그에게 주어진 이유다." 라는 멋진 심사평까지 꼭 읽어봐야 한다. 어디에 실린 어떤 문장도 뺄 수 없는 책이다.



정리하며 되짚어 본 여섯 권은 다시 봐도 좋은 작품들이다. 다가오는 2020년에도 누구에게나 추천할 수 있는 좋은 책, 삶에 빛이 될 책을 많이 찾을 수 있다면 좋겠다. 열심히 벌어서 열심히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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