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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오아시스 콘서트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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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내가 오래 살긴 했나 보다’ 싶은 순간들이 있다. 좋아하는 음악이 추억의 명곡으로 나왔을 때, 락스타들의 얼굴에 주름이 보일 때, 대판 싸우고 갈라섰던 오아시스가 재결합했을 때.


뭐? 오아시스가 한국에 온다고? 떨리는 손으로 티켓팅에 성공한 게 벌써 1년 전이다. 언제 오나 싶던 공연날이 어느덧 오늘. 그동안 열심히 사 모은 굿즈를 온몸에 두르고 고양종합운동장을 향했다. 셋리스트를 들으며 자유로를 달리는 동안에도 얼떨떨했다. 내가 오아시스를 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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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의 신이 보우하사 멋진 공연을 많이 봤다. 그런데도 오아시스 공연은 살아생전 처음 가는 가는 공연처럼 떨렸다. 같은 공연장을 썼던 콜드플레이만 해도 ‘와! 이런 귀한 공연을 내 눈으로 보다니 행복하다!’ 정도였는데. 오아시스는 16년 만에 관뚜껑 열고 뚜벅뚜벅 걸어나오는 걸 내 눈으로 보다니 믿기지 않을 따름이다. 놀라서 눈만 껌벅거리고 있는데 껄렁하게 다가와서는 “야, 담배 있냐?” 어깨 툭 칠 것 같고.


분위기를 제대로 탄 덕분에 잘나가는 선배를 쫓아다니는 일진 지망생이 된 기분이었다. 나까지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표정이 삐딱해졌다. 둘러보니 나만 그러고 있는 게 아니었다. 오아시스가 로고가 박힌 티셔츠며 트랙탑을 입고 온 5만5천 명이 다 그러고 있었다. 도합 11만 개의 삐죽거리는 눈썹들.




오아시스 음악의 어디가 좋냐고 묻는다면, 모르겠다. 오래 만난 연인의 어떤 점에 반했는지 묻는 것만큼 새삼스럽다. 언젠가부터 그 사람이 이상형의 기준이 된 것처럼, 오아시스는 나에게 락의 기준이 되어버렸다. 심장박동처럼 우직하게 뛰는 4분의 4박자, 기교 없이 그 자체로 매력적인 멜로디, 흥얼거리게 되는 기타 리프,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유니크한 목소리까지. 나에겐 그들의 모든 것이 살아있는 락 그 자체다.



좌석과 스탠딩 모두 빈 자리 없이 가득 들어찼다. 설렘으로 웅성이는 지정석, 이미 신난 사람들이 뛰어다니는 스탠딩, 마침내 화려한 오프닝 영상으로 시작되는 공연. 대판 싸우고 헤어진 형과 동생은 꼭 잡은 손을 번쩍 들고 입장했다. 그러게 엄마 말 좀 잘 듣고 사이좋게 지내라니까.



첫 곡인 Hello가 나오는데 입이 쩍 벌어졌다. 입이 다물어지질 않아서 손으로 가렸다. ‘아, 이게 마음이 벅찰 때 나온다는 입틀막이구나’ 체험했다. 노엘의 하이 플라잉 버즈 공연을 재밌게 봤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완전체는 다르다. 눈물 한 방울 나올 뻔했다.


‘Acquiesce’


'Half the World Away’ 중 평화로운 서클핏


우주대스타의 유례없는 공연이니만큼 지정석에서도 모두 일어나 방방 뛰었다. 내 자리는 무대 전체가 보이는 정중앙 구역 1층 6열이었다. 공연 시작 3시간 전부터 대기해야 하는 스탠딩은 엄두가 안 났고, 수십 개 후기를 뒤지며 겨우 고른 자리였다. 노엘과 리암은 면봉보다 작게 보였지만 스크린이 커서 괜찮았다. 펜스가 시야를 가리지 않는데다 스탠딩 구역과 가까운 덕에 많은 풍경이 보였다. 저 멀리 보이는 서클핏도 반가웠다. 화제가 될 만한 키스캠이나 이벤트 연출은 없었지만 곡마다 다른 스크린 구성은 제법 멋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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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라도 화장실이 가고 싶을까 통로 옆자리를 잡았는데 그럴 필요 없었다. 20년 넘게 스피커로 듣던 음악이 눈앞에서 라이브로 연주되는데, 화장실? 감히 그런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좋아하는 곡 다음에 좋아하는 곡, 또 좋아하는 곡, 히트곡이 끝도 없는 밴드인 만큼 셋리스트도 알찼다. 내일이 지구 종말의 날인가 싶었다.


'Live forever'


Whatever


‘Don't Look Back In Anger’ (aka ‘So Sally can wait’)


노엘이야 말할 것도 없고, 리암의 컨디션도 최상이었다. 음향은 좀 아쉬웠지만 그런 걸 신경쓸 겨를은 없었다. 솔직히 나는 오아시스 공연은 저승에서나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콘서트를 못 본다는 차원에서는 비틀즈나 퀸이나 오아시스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었고. 그런데 어느 날 죽었던 밴드가 살아 돌아오고, 심지어는 한국에서 공연을 한다. 아무튼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Champaign Supernova'


리암의 “We fucking love you!”, 마지막 곡 Champaign Supernova를 끝으로 공연이 끝났다. 화려한 불꽃놀이를 뒤로 하고 스크린에서 석양이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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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표정이 삐딱한, 하지만 입꼬리가 한껏 올라간 팬들이 우르르 몰려 나갔다. 공연장 바깥은 아수라장이었다. 야차 같은 팬들이 현수막을 잡아 뜯고 있었다. “그거 뜯어가시면 안 돼요!” 절규하는 스텝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공연장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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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 공연이 내 인생 최고의 콘서트는 아닐 수도 있다. 더 멋진 무대, 더 화려한 이벤트는 앞으로도 많이 볼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오늘 내가 본 건 그냥 공연이 아니었다. 락이라는, 락스타라는 것의 원본이었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던 벅찬 마음은 아주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리고 다짐했다. 언젠가 깁슨 기타를 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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