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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 때문에 첫 마라톤 나간 썰.10km

산리오 큐티런에 바츠마루가 없어? 데리고 갔다

by 여름

오늘은 토요일인데 새벽부터 눈을 떴다. 지난밤 제법 굵게 떨어지던 빗방울이 가늘어졌다. 하는 건가? 진짜 하는 거야?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수를 하고, 위아래 옷이랑 모자를 챙기고, 러닝벨트에 배번호를 붙였다. 양 다리에 스포츠 테이핑까지 마쳤으니 이제 정말 하는 수밖에 없다. 버스를 타고 여의도공원을 향했다. 그러니까 이 도로가 30분 후에 통제되고, 내가 이 위를 달린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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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점: 이게 다 바츠마루 때문이다

올해 초부터 캐릭터 덕질을 시작하게 되었다. 헬로키티? 시나모롤? 포차코? 그런 메이저 캐릭터였다면 이름을 말했을 거다. 내 최애캐는 배드바츠마루. 펭귄 모티브로 만들어진 캐릭터인데 산리오 세계관에서 보기 드문 악동 콘셉트다. 장난기 많고 제멋대로인 성격인데, 락스타를 꿈꾸는 나에게 딱 맞는 취향이었다. 실제로 해피단브이라는 밴드 활동을 한다는 설정이기도 하고. 굿즈를 모으는 건 물론이고, 푹 빠져서 인스타 계정까지 만들었을 정도다.


평화로운 인스타 덕질 계정


바츠마루를 좋아하다 보니 바츠마루 친구들에게도 눈길이 갔다. 차애 한교동은 물론이고 포차코, 케로피 등등 바츠마루와 같이 활동하는 멤버들을 주시하던 찰나. 인스타에 올라온 올리브영 게시물을 발견한 것이다. 산리오 큐티런. 러닝 붐에 편승해 돈 좀 벌어보겠다는 목적이 투명한 대회였다. 비록 바츠마루는 없었지만, 바츠마루 친구들이 포스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귀엽잖아? 그럼 가야지! 생각이 짧다 못해 척수반사 수준이었다. 그렇게 이 10km짜리 마라톤에 참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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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교동, 포차코, 너무 귀여워! 정신없이 사진을 찍다 보니 카운트다운 소리가 들렸다.

3, 2, 1, 이제 출발한다!



1km: 나는 원래 1분 뛰면 헉헉대는 사람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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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로키티 핫핑크 모자를 쓴 사람들이 파도처럼 나아간다. 나도 그 사이 물방울 하나가 되었다. 1km 정도쯤 아무렇지 않게 달리는 내가 스스로 대단하다. 얼마 전까진 1km는커녕 1분을 쉬지 않고 달리는 것도 버거웠는데. 사람은 이 나이 먹고도 성장할 수 있구나. 그래도 분위기에 휩쓸려 속도를 내진 말자. 천천히, 천천히. 애플워치를 보며 페이스를 늦춘다. 10km를 뛰는 건 오늘이 처음이고, 내 목표는 회송차량을 타지 않고 완주하는 것뿐이다.



2km: 10km를 어떻게 1시간 30분 안에 들어와?

큐티런 상세페이지에는 작은 글씨로 ‘모든 주자는 1시간 30분 이내에 들어와야 한다’는 안내문이 있었다. 도로 통제가 해제되니까 안전상의 문제로 달릴 수 없다는 거였다. 아니, 산리오 캐릭터들이랑 하하호호 걷고 뛰며 느긋하게 들어오는 거 아니었냐구. 1시간 30분 안에 어떻게 10km를 달리지? 찾아보니 10km를 완주하지 못하면 회송차량을 탈 수 있다고 한다. 다행이긴 한데, 이왕 대회 신청도 했고 조금 준비를 해 볼까. 그렇게 달리기를 시작한 게 7월 15일이었다.


3km: 첫 3km를 뛰는 데 1달 반이 걸렸었지

처음 달리기를 시작했을 땐 1분 뛰면 3분을 걸어야 하는 수준이었다. 1km에 10분 걸렸고, 그마저도 숨이 차서 2km가 한계였다. 놀라울 건 없었다. 평생 달리기를 잘해본 적이 없으니까. 오히려 잘할 거라는 기대가 없으니 두 번째 달리기도 계속할 수 있었다. 7월 24일에는 2km를 18분에 들어왔다. 8월 4일에는 2.25km를 20분에, 8월 5일에는 2.33km를 21분에, 8월 9일에는 2.4km를 20분에. 대체 언제쯤 할만해지는 걸까, 때려칠까 싶은 생각이 들 때쯤 달리는 친구를 만났다.


4km: “안 쉬고 30분 뛰는 데 8주 걸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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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친구는 내가 아는 이들 중 가장 성실한 사람이다. 달리기를 시작한 지 1년 반이 넘었는데, 내 기준에서는 엄두도 못 낼 속도로 10km 마라톤을 완주하며 갓생 사는 중. 그는 쉬지 않고 30분을 뛰는 데 8주 걸렸다고 했다. 대체 어떻게 안 쉬고 뛰냐고 물어보니 일단 천천히 뛰어보라는 조언을 건네주었다. 천천히, 걷는 것보다 조금만 더 빠르게, 대신 멈추지 말고 계속 뛰어보라고. 친구를 믿고 조금 더 뛰어보기로 했다. 일주일에 3일, 한 번에 20분만.


5km: 천천히, 천천히 뛰면 계속 뛸 수 있지

내가 2km 연속 달리기에 성공한 건 11번째 달리기에서였다. 그날은 이상하게 심박수도 잘 오르지 않고, 4분 넘게 뛰었는데도 힘든 기색이 없었다. 이게 되네, 싶어 계속해보았더니 정말로 되더라. 그때부터 연속해서 달리는 거리가 계속 늘어났다. 대회 나흘 전 마지막으로 달렸을 때는 4.15km를 30분에 들어왔었다. 그 기록은 오늘 벌써 넘어섰다. 속도가 조금씩 빨라지는 걸 애써 누른다. 천천히, 천천히. 천천히 뛰어야 끝까지 뛸 수 있다. 앞질러 가는 사람들을 신경쓰지 않으려 앞만 보았다. 나는 내 속도로 달리자.


6km: 뛸 수 있다, 1km만 더 뛰자

대회를 1주일 앞둔 지난 주 토요일. 달리는 친구와 석촌호수에서 만났다. 맨날 동네 공원 앞을 혼자 달려보았지 누군가와 함께하는 건 처음이었다.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면서 아주 천천히 뛰었더니 오래 뛸 수 있었다. 58분 동안 7km를 달렸다. 천천히 달리니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오늘은 그때보다 페이스가 빨라서인지 제법 힘든데, 잠깐 걸을까 싶다가도 마음을 다잡았다. 그때 7km를 뛰었으면 이번에도 7km를 뛸 수 있는 거다. 걷고 싶어도 1km만 더 뛰고 걷자. 어제 친구가 응원 메시지를 보내준 것이 떠올랐다. 일부러 대회 날짜를 기억했다 안부를 물어봐주다니. 완주하고 기쁜 마음으로 연락해야지.


7km: 아직도 3km나 남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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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km까진 여유가 있는 거였다. 7km 들어가니, 아, 진짜 너무 힘들다. 그냥 걸을까. 하지만 지금부터가 내 개인 기록을 경신할 수 있는 기회다. 연속으로 몇 km까지 달릴 수 있을까. 조금만 더 해보자. 천천히, 천천히 달리면 계속 달릴 수 있다. 아마도.


8km: 어디가 힘든 거지?

힘들다. 숨이 찬 건 아니다. 다리가 아픈 것도 아니다. 그럼 대체 왜 힘들지?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자. 지금 도저히 못 뛸 상황인가? 아니다. 그럼 그냥 뛰자. 소프트플라스크에 물을 챙겨오길 잘했다. 호흡이 힘들 땐 목을 축이면 나아진다. 신기하게도 다리는 전혀 아프지 않다. 필라테스 선생님한테 테이핑을 배워두길 잘했다. 완주하면 감사 인사를 보내야겠다. 그동안 7분 초반대 페이스로 뛰었으니, 여기서부터는 조금 걸어도 1시간 30분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거다. 그런데 한번 걷기 시작하면 못 뛸 걸 안다. 속도를 좀 더 늦췄다. 천천히 오래 뛰자.


9km: 마지막, 진짜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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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잠깐 서서 인증샷이라도 찍고 싶었는데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주위를 맴돌고 있기에 그만두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쉬지 말고 뛰자. 마침 이어폰에서 좋아하는 노래가 나왔다. 몸이 무겁지만 이젠 멈출 수 없다. 여기서 멈추면 아까우니까.


10km: 덕질하다 마라톤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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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송차량만 타지 말자고 시작한 달리기였는데, 생각지도 못한 기록으로 완주 성공했다. 거대한 소금 덩어리가 되어 서걱거리는 피부가 느껴졌다. 야무지게 부스를 둘러보고 메달이랑 랜덤 기념품을 받아왔다. 챙겨온 바츠마루 스티커와 함께 사진도 찍었다. 사진을 남기자마자 마지막 힘을 짜내 빠르게 집으로 돌아왔다.


사람 사는 건 정말 알 수가 없다. 새까만 펭귄 캐릭터에 빠지게 될 줄, 그 캐릭터 때문에 10km 마라톤을 완주하게 될 줄, 작년까지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돌아오는 버스에선 터덜터덜 몸은 무거워도 마음만은 가뿐했다. 돈도 시간도 제법 들지만,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건 어쨌든 좋은 일이다. 최애 덕분에 세계가 넓어지는 건 멋진 일이다. 그게 생각지도 못한 방향이라서 더 재밌다. 앞으로도 내가 좋아하는 많은 것들이 나를 멋진 곳들로 이끌어주면 좋겠다. 돈과 시간은 내가 어떻게든 해 볼게.



* 인스타그램에서 더 가까이 만나요! > @summer_unoffi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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