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의 집 청소, 김완
처음 몇 장을 읽었을 땐 이게 그렇게까지 유명해질 만한 책인가 싶었다. 집에서 죽은 사람들의 자리를 정리해 주는 특수청소업자의 책. 그게 전부였다. 그저 작가가 생소한 직업을 가진 덕분에 죽음을 보다 가까이서 느꼈고, 그걸 잘 풀어낸 정도의 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의 중반부가 넘어갈 즈음부턴 첫인상과 달리 제법 괜찮은 책이 되었고, 마지막 장을 읽은 후엔 누군가 읽을만한 책을 찾는다면 이 책을 말해줘도 좋을 것 같았다.
이 책은 여느 이름난 작가들의 책처럼 생생한 문체로 쓰이진 않았다. 대신 작가의 사유가 문장의 마디마다 생생히 깃들어 있다. 아마 생경한 문체로 죽음을 묘사했다면 이토록 여러 사람에게 읽히진 못했을 테니, 오히려 이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죽은 자의 집 청소는 앞서 말했듯 고독사, 자살, 사고사 등 좋지 않은 이유로 죽은 사람들의 집을 청소해 주는 작가의 이야기다. 흔히들 죽은 사람의 몸은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려주고, 죽은 사람의 흔적은 그가 왜 죽었는지를 말해준다고 한다. 책의 저자인 김 완 작가는 그 흔적을 수도 없이 보며, 그 과정에서 느꼈던 감정들을 책으로 엮었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 사람은 작가보다 죽음을 많이 접하기는 어려울 테다. 그랬기에 내가 느끼는 죽음과 작가가 느끼는 죽음은 그 깊이가 달랐다. 김 완 작가가 느꼈던 안타까움은 보다 입체적이었다. 사람이 죽은 집이라는 꼬리표를 걱정하는 세상부터 온갖 체액이 끈적하게 눌어붙은 바닥과 매트리스까지. 작가는 죽음을 누구보다도 적나라하게 느끼고 있었다. 덕분에 책에 묘사된 작가의 세상은 잔인했고, 지독하게 현실적이었다.
고독사한 사람의 집에 나부끼는 각종 고지서와 빨간딱지라던가, 죽은 사람의 몸뚱이 아래 진득하게 밴 각종 체액과 구더기에 대한 것들이 그랬다. 내가 직접 봤다면 적잖이 충격받았을 모습을 너무 담담하게 그린 탓에 멋모르고 읽어 내렸다. 글을 쓰는 지금에서야 침대 위에 몸을 웅크리고 죽었을 누군가의 모습이 매트리스에 동그란 자국으로 남았다는 말을 이해하는 것만 같다.
내게 일을 맡긴 건물주가 통화를 하며 누누이 부탁한 말이 떠오른다.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알면 다 빠져나가요. 절대로 그 건물에 사는 누구도 알게 해선 안 됩니다.”
책의 첫 장에 나왔던 말이었다. 누가 안타까운 이야기 아니랄까 봐 시작부터 씁쓸함이 진득했다.
내가 보거나 전해 들은 몇 안 되는 임종은 전부 병원이었다. 누군가 곧 죽을 사람에게서 이상함을 느끼고 그를 병원으로 보내거나, 한참 전부터 병원에 입원한 채로 시간과 병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바깥에서 생을 마감하는 일도 내가 보지 못했을뿐더러 있었을 테다. 그리고 이런 죽음들과 달리 누군가 자택에서 홀로 죽고 그 집을 업자를 불러 치워야 할 상황이라면, 저 문장의 말마따나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있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건물주가 죽은 누군가보다 집값을 걱정하는 것도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 그렇게 머리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이해하는 척하면서도 혀가 썼다.
책을 읽는 내내 이런 씁쓸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자본주의 집 청소의 다음 이야기를 넘어 그다음 이야기도, 또 그다음 장도 쉽지 않았다. 특히나 자살하기로 마음먹고 번개탄과 부탄가스를 산 후, 그 부탄가스의 뚜껑까지 깔끔하게 분리수거를 했다던 이야기가 그랬다. 그 이야기에서 자꾸만 내가 보였다. 내가 자살하는 날이 온다면, 꼭 그 여자처럼 죽을 것 같았다.
이곳을 치우며 우연히 알게 된 당신의 이름과 출신 학교, 직장, 생년월일이 다 무슨 의미가 있는지요? 그것은 당신에 대한 어떤 진실도 말해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집을 치우면서 한 가지 뚜렷하게 알게 된 것이 있다면 당신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당신을 향한, 이곳에 남은 자들의 마음입니다.
나는 특히 이 구절이 좋았다. 당시의 나는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오는 순간에도 내가 곧 죽어버릴 것 같다는 생각에 시달리고 있었다. 멍하니 길을 걷다 차에 치여버릴 결심을 하게 될 것 같았고 종종 찾던 한강 둔치에서, 혹은 다리 위에서 금방이라도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안고 살았다.
그래서 매 순간 나를 삶에 붙잡을 미련을 갈구했다. 그러던 중 이 책이 눈에 띄었다. 전부터 유명하다고 들어서였는지, ‘죽은 자’라는 단어에 끌려서인지 나는 이것저것 잴 것 없이 선뜻 책을 빌렸고, 저 구절에서 하루라도 더 살 이유 미련 하나를 만들었다.
내가 죽으면 주위 사람들이 힘겨워진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는데도 그걸 온전한 문장으로 읽으니 느낌이 달랐다. 내 삶이 지겨워도 나를 가진 다른 사람들의 삶까지 지겹게 만들 수는 없겠구나 싶었다. ‘이곳에 남은 자들의 마음’이라는 단어가 나를 덜 죽고 싶게 만들진 못했지만, 적어도 살아야 할 이유를 만들기엔 충분했던 것 같다.
책을 많이 읽은 사람들은 대개 사람에 대한 애정이 담긴 책이 좋은 책이라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꽤 좋은 책이다. 옆집의 배달 음식이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의 안부를 걱정하는 사람이 쓴 책이니 더 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지 않을까. 그래서 이 책은 죽음이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읽다 보면 군데군데에서 따뜻함이 느껴진다. 책 몇 페이지와 몇 문단, 작게는 몇 줄을 손으로 만지면 다른 곳보다 금방 온도가 변할 것 같은 느낌이다. 특히나 이 구절이 그랬다.
자살을 결심하고 그 뒤에 수습할 일까지 염려한 남자. 자기 죽음에 드는 가격을 스스로 알아보겠다며 전화를 건 남자. 도대체 이 세상에는 어떤 피도 눈물도 없는 사연이 있기에 한 인간을 마지막 순간으로 밀어붙인 것만으로 모자라, 결국 살아 있는 자들이 짊어져야 할, 죽고 남겨진 것까지 미리 감당하려고 몰아세울까?
단순히 많이 힘들었구나 하는 걱정이 아니라, 그의 삶을 헤아리려는 마음에서 오는 안타까움이 죽으려는 누군가를 토닥이는 것 같았다. 세상에 이런 작가가 있으니까 아직 20 몇 년밖에 살지 않은 내 세상에도, 그리고 다른 누군가의 세상에도 언젠가 이런 사람이 하나쯤 찾아오지 않을까 싶었다.
죽은 자의 집 청소는 한 번 봤던 영화를 다른 시점에서 다시 보는 듯한 기분이 드는 책이었다. 자살이나 고독사, 죽음이라는 단어는 심심찮게 듣고 있어 익숙했지만, 한 번도 그것들을 자세히 그려본 적은 없었다. 그렇게 막연했던 것들이 책을 읽으며 새롭게 다가왔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포장되거나 과장된 이야기가 아닌 날 것 그대로의 죽음 이후를 누가 상상해 봤겠는가. 이 책엔 그런 상상보다 더 환상적인 이야기가 있다. 독하고 씁쓸한 게 잔뜩 담겨 마치 환상 같은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