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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름 없는 자 Jul 12. 2020

선구적인 사람

나의 실패는 아버지의 실패였다

아버지는 오늘도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유는 모른다. 누군가 새로운 연애 상대를 만나고 있을 수도 있고, 하고 있는 사업에 열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를 볼 수 없는 나는 그저 추론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아버지는 가정의 책임을 방기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증오했다. 아버지와는 다른 인생을 살고 싶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아버지는 역마살이 낀 떠돌이였다. 끊임없이 떠돌아다녔다. 결혼을 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거의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머니와 결혼을 한 과정도 갑작스러웠다. 30살이 되어가던 아버지는 종종 집안과 사회의 압력이 내내 부담이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혼기가 찼을 때 결혼하지 않으면 어딘가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취급한다는 사회적 통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급했던 아버지는 어머니와 선을 보고 얼마 안 되어 결혼에 골인했다. 하지만 자유로웠던 아버지의 성격에 결혼 생활은 그다지 맞지 않았다. 보수적이었던 어머니와 성격 차이도 컸다. 종종 마찰을 빚던 둘은 결혼한 지 10년 만에 이혼 도장을 찍었다.


이후 나는 할머니와 같이 살았다. 문서상 아버지와 같이 사는 것으로 되어있었지만 별 의미는 없었다. 주말에 잠깐 들어와서 할머니에게 화를 내는 게 다였으니까. 어린 마음에 왜 집에 들어오지 않는지 너무 궁금해서 물어본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사업을 한다고만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내게 큰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사업 말고는 없다. 남들에게 뒤처지기 싫으면 사업해야 한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말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사업을 해야만 부자가 된다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걸 보면 참 선구적인 사람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금융위기 이후 사업이 확 기울어진 이후에도 아이템을 바꿔 사업을 반복할 뿐이었다. 다단계에 빠지기도 했다. 지금 상황을 역전할 수 있는 방법은 사업 말고는 없다면서. 점점 빚이 늘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빨간딱지가 집 곳곳에 덕지덕지 붙었다. 난생처음 보는 타인이 눈앞에서 컴퓨터를 압류해가던 모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나는 사업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아버지를 보며 치를 떨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나의 도전은 아버지와는 다른 삶을 사는 것이었다. 열심히 공부를 하고 이름난 직장에 다니면서 성실하게 돈을 모으겠다고 다짐했다. 일확천금이라는 말은 그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백일몽이라 믿으면서.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시작했던 도전은 기자 준비였다. 거창한 사회적 신념 같은 건 없었다. 우선 글쓰기를 좋아하는 나와 통하는 점이 있었고, 여기저기 현장을 누비고 다니는 점이 자유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일을 하다 대학을 늦게 들어간 탓에 30살에 준비를 시작했다. 1년 차에는 모든 언론사 필기전형에서 떨어졌다. 붙을만한 실력이 아니었다. 핑계 댈 건 없었다. 처음부터 2년을 잡고 시작했고, 첫해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으니까.


왜 내 글은 떨어질까. 합격 글과 내 글의 차이는 무엇일까. 첫 해에 썼던 모든 글을 읽고 분석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논술은 차별화된 글을 쓴답시고 여기저기에서 찾아온 자료를 갖다 붙여놓기만 한 글, 논지와 논거가 하나도 논리적으로 이어지지 않고 따로 놀았다. 글의 논리적 일관성은 무너지고 내 주장과 타인의 주장이 한데 섞여 불협화음을 냈다. 자료를 찾았으면 충분히 자료를 이해할 시간을 갖고 퇴고를 통해 소화하는 작업을 거쳐야 하는데 게을렀던 것이다. 작문은 더욱 가관이었다. 아무도 생각 못할 글을 쓴답시고 판타지나 만화에서 볼법한 설정을 차용했다. 설정을 차용한 것까지는 좋으나 글의 개연성, 논리적 완결성 같은 건 제대로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그저 눈에 띄면 좋은 글이라고 생각했다. 괜히 떨어진 게 아니었다.


나는 글의 구조를 잡는 연습부터 다시 했다. 한 문단에 중심 문장 하나, 주장은 두괄식에 주장 - 이유 - 근거. 이런 식으로. 이전보다는 좀 더 정돈된 글을 썼다.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기보다는 기본에 충실한 글을 쓰도록 연습했다. 정형화된 글이라 해서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무난한 글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기가 쉽다는 장점이 있다. 평범하지만 끝까지 논리적 일관성을 지킨 글을 쓰자 겨우 필기를 붙기 시작했다. 하지만 필기를 붙는다고 다가 아니었다. 필기를 뚫고 나서도 실기라는 난관이 있었고 마지막 최종면접이라는 벽은 무경력의 30대 수험생이 뚫기에는 너무나 견고했다.


3년 차가 됐다. 주변에 같이 하던 사람들은 하나둘씩 현직이 되거나 언론고시판을 떠났다. 스터디는 해체됐고 남은 사람은 나 말고 없었다. 사실 나 또한 포기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보통 2년을 잡는다고 하는 데다가 나이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련이 남았다. 최종에서 나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것 같다는 후회가 컸다. 실패가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을 것 같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무엇보다 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계속했다. 또 떨어졌다. 이유가 뭘까. 분명 실력은 이전보다 늘었다. 공모전에서 입상도 했다. 느낌이 아니라 객관적 지표도 내 실력이 늘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하지만 실력과 합격이 꼭 비례하는 건 아니었다. 결국 3년 차에도 지원했던 모든 언론사 전형에서 낙방했다.


독립하여 집을 나간 친동생과 만났다. 떨어진 이후라 기분이 좋지 않아서였을까. 만나서 술이 조금 들어가자 두서없는 신세한탄을 했다. 들어주던 동생은 참다가 못 들어주겠는지 한 마디를 던졌다.


"형이 너무 높은 데만 넣어서 그런 거 아냐? 서류만 넣어도 들어가는 마이너 매체들 있을 거 아냐?"


맞는 말이었다. 정말 기자가 하고 싶다면 꼭 메이저에 갈 이유는 없었다. 작은 매체에 가서 일단 부딪혀보는 선택지도 있었다. 내 친구들도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은근히 그런 권유를 하곤 했었다. 하지만 안 썼다. 그놈의 자존심이 문제였다. 지원하려 할 때마다 '내가 공부를 한 짬이 있는데 아무 데나 갈 수는 없다. 지금도 늦었는데 마이너에서 시작하면 남들에게 더욱 뒤처지는 게 아니냐.'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상황에서 동생의 일침은 내 폐부를 찔렀다. 그대로 나는 정신적 낭떠러지로 떨어지고야 말았다. 낭떠러지의 바닥은 보이지도 않을 만큼 깊고 어두웠다.


그 뒤로 제법 술을 마셨음에도 취하지 못했다. 취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집에 와서 동생의 발언을 생각했다. 그러자 내가 미워하다 못해 증오하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평생 가난뱅이이자 월급쟁이로 살기 싫다면서 사업에 열중했던 아버지, 알량한 자존심 하나 때문에 마이너 매체에 지원하지 않고 메이저만 썼던 나. 남에게 뒤처진 삶, 열등감 속에서 살기 싫다면서 어떻게든 상황을 뒤집으려 노력했던 아버지와 나. 과거의 아버지는 현재의 나였다.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겪었던 일련의 과정은 아버지가 걸어온 길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역설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자유로워 보였을 뿐, 실제로는 자유롭지 않았다. 수십 년 전부터 나와 동일한 인생을 걸어온 아버지는 정말로 선구적인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버지와 내게 박혀있던 열등감은 스스로를 찢어발겼다. 자신도 모르게 자아를 소진하며 자신을 착취하는 인생을 살았다. 그것은 일종의 폭력이었다. 폭력은 외부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내면에도 있었다. 무한히 가해지는 내면의 폭력에 의해 자존감은 지표면을 뚫고 내핵까지 처박혔다. 깡패의 서슬 퍼런 ‘주먹’은 그나마 경찰의 ‘곤봉’으로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스스로를 찌르는 내면의 ‘칼날’은 그 누구도 개입할 수 없다는 점에서 외부의 주먹보다 더욱 강한 폭력성을 띤다. 심하면 스스로의 목숨을 빼앗을 정도다. 내면의 폭력을 극복하기 위해 나와 아버지는 사회적 성공만을 갈구했다. 열등감의 포로가 되어 하고 싶은 일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돈, 신체, 정신, 교우관계 등 모든 걸 잃었다. 30대 중반을 향해가는 지금, 나는 실패를 통해 내면에서 나를 갉아먹던 폭력의 정체를 깨달았다. 이윽고 아버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몇 년 만이었는지 모르겠다. 아버지와 술을 마셨다. 얼음장과도 같았던 아버지와의 관계에 봄이 오는 순간이었다. 같이 술을 마시며 나는 아버지에게 느낀 바를 그대로 말했다. 그간 폐를 끼쳐서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웃으셨다. 나는 과하게 취하여 횡설수설했다. 필름이 끊기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아버지는 온데간데없었다. 고요한 옥탑방 한 켠에는 아침을 알리는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공백 포함 4185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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