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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에날린 Sep 27. 2018

내가 과연 이 일을 잘 해낼 수 있을까.

예과생 시절 나는 이렇게 생각했었다..

어느덧 날씨도 제법 쌀쌀해지고 우리는 본과 1학년이라는 레이스의 후반전에 접어들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해부도 겨우 끝이 났고 의사가 되기 위한 걸음마 수준의 지식을 미친듯이 쓸어담고 있지만, 가끔은 예과생으로 돌아가는 여유를 부리고 싶을 때도 있다. 공부를 하다 말고 한번 예과 때 쓴 글을 꺼내 보았다. 


누구나 그랬겠지만, 예과 1학년 시절의 나는 무늬만 의대생일 뿐 머릿속에 든 것은 길 가다 보이는 여느 사람과 같았다. 그 때의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하고 살지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을까?

2년 전 5월, 그러니까 갓 고등학생 티를 벗은 한 예과생이 의업 그리고 의사의 역할에 대해 했던 고민을 옮겨 본다.




2016. 05. 02.


그때 이후로 처음 생각이 난다. 중학교 때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한동안 학교를 나오지 않았다. 담임 선생님도 별 말씀을 안 하셨기에 나는 문자로 왜 학교에 나오지 않는지를 물어보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단다. 


그게 말이나 되는 얘기냐며, 나는 농담하지 말라고 했다. 


답장은 ‘진짜거든 ㅅㅂㅠ’. 


아뿔싸. 그 'ㅅㅂ'이라는 욕설에는 평소에 내가 듣던 욕설과는 전혀 다른 깊이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답장을 보는 순간 얼굴이 심하게 화끈거렸다. 스스로에게 욕이 나왔다. 이후로 내가 무어라 답장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때를 떠올려 보면 나는 아직도 심하게 부끄러움을 느낀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항상 이것이 어려웠다. 힘들어? 다 괜찮아질 거야. 이런 부류의, 어제 처음 만난 친구에게도 해 줄 수 있는 흔한 말들 말고는 금방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 때처럼, 당장 내일 내 제일 친한 친구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 세상을 떠난다 해도, 나는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그 친구에게 어떤 친구로 비쳐 보일지 불안하다. 겪어 보지 못했기에 나는 아직 배우지 못했다. 자잘하게 슬픈 일은 많았지만, 아직 내가 인생에서 커다란 시련을 겪어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아무도 바라지는 않겠지만 인생에는 상상하지 못한 불행들이 찾아오곤 한다. 그런 불행들을 비껴가게 하는 것이 의사가 할 일이지만 때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의사들은 사람이 나타낼 수 있는 감정들의 최전선에서 일하고 있는 구성원이 아닌가 한다. 


죽음, 그리고 그것을 접한 가족의 광기 사이에 의사가 서 있다. 슬픔을 직접 겪는 가족에 비할 바야 없겠지만, 그런 고통을 하루에도 몇 번씩 접하는 것 또한 절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죽은 환자와 그 가족을 매일같이 곁에서 지켜보면서도 버텨낸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뉴스는 건조하게 말하곤 한다. 


‘서울 구로구에서 어제 오후 2시 30분경, 5층 빌라에서 방충망이 뜯어져 남매인 10세 김 모 군과 8세 김 모 양이 추락했습니다. 오빠는 현장에서 즉사했고, 동생은 크게 다쳤습니다. 경찰은 이들이 장난을 치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뉴스의 일부이다. 뉴스에서는 이것을 내일 날씨만큼이나 가볍게 언급한다.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단순히 안타깝다는 것 외에 실제로 무엇을 뜻하는지 겪어 보기 전까지는 시청자는 절대 모를 것이다. 그렇지만 의사가 되어 인간이 만날 수 있는 모든 감정을 만나는 그곳에 혼자 남겨진다면, 나 스스로가 그것들을 제대로 수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감당하지 못하고 미쳐 버리는 사람도 있지 않았을까.




그 참담한 사건을 확정한다고 선고하는 것. 어머니가 애써 고개를 돌리려 했던 그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하는 그 차디찬 선언을 해야만 하는 사람이 되는 순간, 나는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그토록 매서운 결단을 나 같은 일개 소시민이 할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이다. 



의료는 서비스업이다. 손님을 들이고 원하는 것을 해 준다. 건강의 정의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단순히 신체적으로 고통이 없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합의하고 있다. 따라서 훌륭한 의사는 환부를 잘 치료해 낫게 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의료도 일종의 감정 노동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고객 응대직이 요구하는 친절함 위주의 감정 노동과는 다르다. 불치병에 걸린 환자에게 자신의 미래를 알려주는 것, 울부짖는 가족들 앞에서 인간이 나타낼 수 있는 모든 감정들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것. 게다가 진상 손님까지 견뎌내는 것. 그럼에도 오늘도 환자를 잘 고쳐서 보냈다는 보람, 그리고 퇴원하는 환자의 웃음을 위해 그런 힘듦을 이겨내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의사들은 그런 힘듦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학교에서 고객(환자)을 응대하는 법까지 배우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언젠간 누군가에겐 좀 배워야 할 것 같다. 위로하는 법을 아직 잘 모르는 나로서는 암을 선고받는 환자의 기분이 어떤지는 더더욱 모른다. 그런 환자에게 드라마에서 주인공에게 ‘암입니다.’라고 말하는 의사처럼 팩트만을 전달하는 것은 환자에게도, 또 의사 자신에게도 그다지 좋을 것이 없을 것이다. 


질병의 진단과 향후 경과를 환자에게 설명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거기서 그쳐서는 안 된다. 의학과 의료는 둘 다 환자의 치유를 목표로 하지만, 그 둘이 완전히 같은 것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의학은 객관성을 추구하는 학문이고, 의료는 환자의 만족을 최우선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사는 사실만을 보도하는 기자가 되기보다는 환자에게 호소할 줄 아는 정치인이 되어야 한다. 의사라면 객관적인 의학적 소견을 알려주는 것은 당연히 할 줄 알겠지만, 훌륭한 정치인이 되기는 어렵듯이 훌륭한 의사가 되는 것 또한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언젠간 그것을 배우든지 또는 스스로 깨닫든지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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