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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에날린 Oct 11. 2018

본과 1학년의 공부법

조금은 늦게 깨달아버린 본1의 자세


우리 과의 학사관리는 Pass/Fail 제로 운영된다. 성적이 A+부터 F까지 학점으로 매겨지는 타 학교들과 달리, 우리 학교는 일부 유급자들을 제외하고는 전산상에 기록되는 성적이 P로 일정하다. 절대평가라는 말이다. 이 말은 내가 지금 과에서 1등을 해서 전액 장학금을 받거나, 아니면 공부를 전혀 안 해서 재교육을 받느라 학기의 방학화, 방학의 학기화가 이루어지더라도 이것이 인턴이나 전공의를 지원할 때 전혀(아마도)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신 등급에 따라 자신의 진로가 정해지는 다른 학교들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이다.


성적조회를 해 봐도 정말로 전산상에 Pass 또는 Honor로만 기록된다.


이렇게 (학생들에게) 좋은 제도를 왜 타 학교에서는 도입하지 않는 것인가? 인턴 뽑을 때 참고할 자료가 없어지기도 하겠지만, 당연히 학습 동기 저하가 우려되기 때문일 것이다. 모두 똑같은 성적을 받게 된다면 다같이 공부를 안 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라는 걱정은 실제로 절대평가제 도입 당시 교수님들이 가장 많이 우려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재교육 제도를 실시하고 상위 20% 내에서 Honor를 줌으로써 이를 보완하고 있다고 하지만, 일부 상위권 및 하위권을 제외하고는 재교육이나 아너 여부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 학생이 사실 많다. 

Pass/Fail 제도로 수업을 받은 첫 학번이 본 작년 국시의 성적분포가 이전 학년에 비해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으로 나와서 교수님들의 걱정은 기우였음이 드러나긴 했지만, 이 제도를 마주하는 개인으로서의 나의 자세는 어때야 할까? 

대한민국의 흔한 전공의. 절대평가제 하에서도 선발 기준은 따로 있다고 한다. 그것이 학부 성적이 아닐 뿐.


지금까지는 모든 공부에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었다. 공부 잘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누구라도 기분 좋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만으로 공부를 하는 건 아니겠지만 어쨌든 나는 열심히 하는 무리에 속하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보통 남들은 시험날 1주~1주 반 먼저 공부를 시작하지만 나는 늦어도 시험 후 첫 수업 때부터 꾸준히 자습실에 출석도장을 찍었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지는 못했다. 내 집중력의 최전성기는 이미 지난 지 오래다. 중3 때 과학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했을 때, 그리고 고3 때 대학입시를 준비하면서 모든 걸 불태워버렸던지 그 이후로는 줄곧 내리막이었다. 최근에는 친구한테 무슨 얘기를 한 적이 있는지도 깜박깜박하며, 방금 고개를 끄덕이며 읽은 글은 덮고 나면 잊어버린다. 수업 중에는 노트북으로 위키백과를 찾아보다 정신차려 보면 어느새 페북을 하고 있고, 강연 중에는 핸드폰을 보다 내용을 놓치게 된다. 이러다 보니 내가 치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렇다고 내가 공부할 생각 자체를 안 한 건 아니어서, 공부하기 위해 컴퓨터 앞에 연필을 들고 앉아있는 시간을 따지면 하루 열 시간도 넘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나의 공부효율이 정말로 낮다는 것이다. 컴퓨터를 펴놓는 시간의 절반 가까이는 딴 생각, 페이스북, 유튜브 등으로 보내버린다. 집중을 위해 컴퓨터에 비행기 모드를 켜면 핸드폰에 슬쩍 손이 가고, 핸드폰을 던져놓으면 괜히 아이튠즈에서 노래나 듣게 된다. 내가 써 놓고도 참 한심스럽다.




이런 문제에 대해 최근 며칠간 깊이 고민하다가 오늘 드디어 깨달음을 얻었다.
실제로 내가 부족한 집중력을 끌어안아 가면서 그나마 열심히 공부했던 지난 1학기에 배운 내용을 지금까지 다 기억하고 있는가? 답은 ‘절대 아니다’였다.


공부는 조금만 해도 Pass할 정도의 지식은 갖출 수 있다. 누구나 그 정도는 할 수 있기에 입학 허가를 받은 것이다. 그 이상의 공부는, 결국 디테일을 누가 더 많이 가져가냐의 싸움이다. 상위권과 중위권을 가르는 부분은 매우 지엽적인 내용이다. 지금까지는 열심히 공부해야만 시험에 쓸 수 있는 부분, 암기하지 않으면 모르는 부분을 일일이 공부했지만 한 학기가 지난 지금은 어차피 가물가물해져버린 느낌밖에 없다. 이런 걸 다 외우기 위해 다른 가치있는 일들을 할 시간을 포기해야 할까? 어차피 다음 학기가 되면 잊어버릴 예정인데 굳이 그래야 되는 것 같지는 않다. 그토록 외웠던 TGF-b의 신호전달 경로는 이제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어차피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공부를 잘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국시 볼 때 처음부터 새로 다시 공부해야 하는 내용들이라면 지금은 패스만 하고 다른 가치있는 일들에 시간을 쓰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Pass/Fail제의 도입 목적이 그것이기도 하고. 사 뒀던 책을 읽고 친구들을 만나는 데 소중한 시간을 써야겠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부터 실천하기로 했다! 오늘은 자율신경계에 반응하는 약물까지 공부하고 잠들 생각이었건만 이미 족보는 저 멀리 내던져 버렸다. 분기말 시험 때 보는 비뇨생식계통 공부는 언제 할지, 다음 주에 볼 기초면역학 공부를 미리 해 놓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도 싹 사라졌다.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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