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걸스는 어떻게 꼰대의 취향을 저격했나
소녀시대 팬인 나에게 원더걸스라는 이름은 한때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이었으나 지금은 쇠락해 흔적만 남은 고대 유적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유례없는 걸그룹 대전이 벌어진 시기에 컴백 소식이 들려왔을 때 ‘타이밍 참 생뚱맞다’라고, 밴드 콘셉트라니 ‘이거야말로 무리수’라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작년에 솔로로 인상적인 커리어를 만들어낸 선미와 예은은 뒤늦게 악기까지 연습해가면서 이름만 남은 그룹으로 왜 다시 돌아왔을까.
뿅뿅거리는 신시사이저와 훵키한 드럼비트가 인도하는 타이틀트랙 ‘I Feel You’는 뉴웨이브가 저물고 뉴잭스윙이 싹트던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 어디쯤으로 청자를 소환한다. 생소한 프리스타일 장르라는 이름 아래 레퍼런스 아티스트로 제시된 익스포제(Exposé), 커버 걸스(Cover Girls)는, 리비도 왕성했던 시절 예쁜 언니들이 단체로 나오면 일단 찜하고 봤던 오래된 기억 속에서 되살아난다. 절정의 가창력이나 연주력은 없었지만 듣기 좋았던 스위트 센세이션(Sweet Sensation)의 ‘If Wishes Came True’나 뱅글스(Bangles)의 ‘Eternal Flame’도 떠오른다.
무엇보다 이번 앨범의 미덕은 싱글보다 앨범으로 일관된 콘셉트를 가지고 움직이는 점이다. 특히 ‘Baby Don’t Play’에서 시작해 ‘Candle’, ‘I Feel You’, ‘Rewind’까지 이어지는 4곡의 흐름은, 컨템퍼러리 R&B와 어반, 뉴잭스윙 등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을 주도했던 팝 음악에 보내는 오마주이자 그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팝 음악을 듣기 시작한 세대들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한다. 재닛 잭슨(Janet Jackson), 폴라 압둘(Paula Abdul), 바비 브라운(Bobby Brown)이라 쓰고 지미 잼 & 테리 루이스(Jimmy Jam & Terry Lewis), 엘에이 레이드 & 베이비페이스(L.A. Reid & Babyface), 그리고 테디 라일리(Teddy Riley)라 읽는.
그냥 볼 때는 맥락 없이 야한 것 같은데 볼수록 노리고 만들었다는 생각이 드는 뮤직비디오는 애드리안 린(Adrian Lyne, 중년 신사숙녀분들은 애드리안 ‘라인’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할)의 영화들을 연상시킨다. 그는〈플래쉬 댄스〉(1983), 〈나인 하프 위크〉(1986), 〈위험한 정사〉(1987), 〈야곱의 사다리〉(1990), 〈언페이스풀〉(2002) 등 주로 어른들을 위한 영화를 많이 만들었는데, 광고로 커리어를 시작한 양반이라 동시대 다른 영화들에 비해 화면이 굉장히 감각적이고 분위기 있게 야하기로 유명했다.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뜬금없는 얼음 장면은 〈나인 하프 위크〉를, 하이레그 스타일의 원피스 수영복은 미국 드라마〈Bay Watch〉(국내명 〈SOS 해상구조대〉)를 연상시킨다. 진한 색감의 레트로 메이크업과 스타일링까지 화면의 질감과 어우러지며 80년대의 적당히 촌티나면서 퇴폐적이고 나른했던 무드를 제대로 살려냈다.
메인 보컬도 비주얼 센터도 팀을 떠났지만 남은 멤버들은 똘똘 뭉쳐, 팀의 핵심 정체성은 유지하면서도 절묘한 시대 선정과 맞춤 콘셉트로 앨범 타이틀에 걸맞은 ‘REBOOT’를 이루어냈다. 악기도 아직은 연주보다 퍼포먼스를 돋보이게 만드는 데 방점이 찍혀있지만 자고로 악기를 들고 있는 여자들은 언제나 섹시했다. 아무도 기대하지 못했을 정도로 정말 멋지게 원더걸스가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