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걸
2014년 후반기에서 2015년 상반기 사이에 데뷔한 러블리즈, 여자친구, 오마이걸은 걸그룹의 영원한 테마, ‘소녀’를 다시 씬의 전면으로 불러냈다. 각각 세 번째 활동까지 보고 나니, 여자친구는 이기/용배와, 러블리즈는 원피스와 연작을 통해 자신들의 스토리를 차곡차곡 수직으로 쌓아 올린 느낌이다. 반면 오마이걸은 해외 작곡 팀과 협업을 통해 이미지를 수평으로 확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마이걸의 데뷔곡 ‘Cupid’ 무대를 보면서 눈보다 귀가 먼저 반응했던 이유는 마칭 밴드 스타일의 드럼 사운드 때문이었다. 치어리더 콘셉트와 멋진 대형으로 구사하는 퍼포먼스까지 하나로 어우러져, 마치 미국 하이틴 무비에서 금방 튀어나온 것 같은 이미지로 다가왔다.
두 번째 미니앨범 타이틀곡 ‘Closer’는 차가운 질감의 유로팝 비트 위에, 동화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소녀의 상실과 각성을 담아냈다. 그러나 ‘Cupid’의 아메리칸 하이스쿨과 ‘Closer’의 유럽 고성 사이 거리감은 꽤나 멀어서 개인적으로 데뷔만큼 큰 인상을 받지는 못했다. 정작 이 음반에서 귀를 잡아끈 곡은 ‘Say No More’였다. 리듬 파트의 엇박 브라스 섹션을 타고 순식간에 몇 살을 더 먹은 것처럼 성숙해진 멤버들의 목소리가 멋진 화음을 쌓아 올린다. 아이돌 씬에서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복잡하고 화려한 곡 전개는 금방 친숙해지기 어려웠지만 낯선 매혹을 선사했다.
세 번째 미니앨범 “Pink Ocean”까지 듣고 나니 어쩌면 이 팀의 음악적 정체성은 팝 음악을 가급적 본토의 느낌을 살려 재현함으로써 케이팝에서 ‘K’를 떼어내는 것이 아닐까 싶다. ‘Cupid’부터 함께 하고 있는 스웨덴 작곡 팀이 만든 타이틀곡 ‘Liar Liar’에는 저 옛날 에이스 오브 베이스(Ace of Base)나 아쿠아(Aqua)가 세계를 제패했던 시절의 북구 팝 사운드가 녹아있다. 신나게 달리다가 급작스럽게 멈춰서 잔상을 남기며 끝내는 전개도 일반적인 가요 작법과는 다르다.
네 번째 수록곡 ‘Knock Knock’은 소위 말하는 ‘빠다’스러운 세련미가 넘친다. 미드템포 비트에 꾹꾹 짚어 주는 신스와 기타 사운드를 타고 부드러운 멜로디와 멤버들의 코러스가 흘러든다. 최근 맥스 마틴(Max Martin)이 테일러 스위프트나 케이티 페리와 내놓은 일련의 작업들과도 비슷한 느낌이 난다. 한 번 들으면 꽂히는 훅까지 겸비한 이 곡을 왜 타이틀로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Knock Knock’의 가사는 친한 친구가 다른 사람과 친해지는 걸 질투하는 귀여운 내용이지만, 노래 전반에 흐르는 정서는 한 발 뒤에 물러서서 지켜보는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이 서늘한 기운은 ‘Liar Liar’ 뮤직비디오에서도 느낄 수 있다. 화사한 컬러의 세트를 배경으로 멤버들은 서로 거짓말을 하고 있는데 좋아하는 남자는 같다. 등으로만 잠시 출연했던 남자는 다시 나오지 않는다.
곳곳에 심어 놓은 일련의 스릴러 영화 컨벤션(바깥에서 잠겨 있는 문, 갑자기 눈을 뜨는 비니, 서늘하게 미소 짓는 지호,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이는 유아, 행동을 촉구하듯 식탁에서 랩을 하는 미미, 알듯 말듯 묘한 미소를 지으며 물러나는 효정)을 감지하면 거짓말쟁이(liar)의 운명이 어찌 됐을지 짐작할 수 있다.
‘Cupid’의 귀엽고 발랄했던 소녀는 ‘Closer’에서 세상의 비밀과 슬픔을 알게 됐고, ‘Liar Liar’에 와서는 바람피우고 거짓말한 남자를 응징한다. 밖에서 보면 마냥 예쁘고 아기자기할 것만 같은 소녀의 세계지만, 그 안에는 서늘함과 섬뜩함도 존재한다.
필자가 느끼기에 여자친구는 함께 말뚝박기도 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깝게 ‘다가오는 소녀’라면, 러블리즈는 자리에 앉아서 말을 걸어 주기를 ‘기다리는 소녀’다. 오마이걸은 더 알고 싶어서 다가가면 묘한 미소를 지으며 한 발 ‘물러서는 소녀’ 같다. 소녀가 아닌 사람들이 보기에는 모두 비슷해 보이지만 세 그룹이 그려내는 소녀의 세계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지금은 ‘청순’이라는 하나의 코르셋으로 ‘소녀’를 묶을 수 없는 시대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