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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또 Jan 26. 2019

출산, 죽음과 생명 그 사이에서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를 보고  

이 영화, <로마>를 보기 위해 나는 끊었던 넷플릭스를 다시 결제했다.
불과 며칠 지나진 않았지만,
작년에 마지막으로 잘한 일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알폰소 쿠아론의 과거 작품들을 모두 본 것은 아니지만, <칠드런 오브 맨>, <그래비티>는 내가 누군가에게 강력히 추천할 정도로 인생 작품 중 하나다.(안 보신 분들이 있다면 꼭 보기를 추천한다. 특히 <칠드런 오브 맨>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촬영 기법마저 보는 이를 완전히 매료한다) 그래선지 그의 새로운 영화가 넷플릭스에 올라왔을 때, 나는 아무 거리낌 없이 어렵게 끊어냈던 넷플릭스의 세계로 다시 접속해버렸다.


그리고 <로마>까지 보고 나니 확신이 든다. 그는 '생명의 탄생'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각별한 시선을 가지고 있는 감독이다. 특히나 죽음의 안개가 자욱한 상황에서 맞이하는 생명의 잉태와 출산, 그 역설적이고 극단적인 상황을 즐겨 연출하는데 기발하다. 거의 집착적이기까지 하다. 그는 이토록 위화감만이 충만한 상황에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걸까. 무엇을 보여주고 관객들로 하여금 무엇을 느끼게 하고 싶은 걸까.



<로마>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칠드런 오브 맨>의 후속작으로 기획한 지 어언 12년이 지난 지금에야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자세한 내막은 몰라도, 알폰소 쿠아론 감독 그 자신이 겪었던 실제의 일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영화였다고 한다. 특이하게도 대본도 없이 진행됐다고 하는데, 영화를 모두 본 후에 이런 후일담들을 보고 나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자연스러워도 너무 자연스러웠던 배우들의 표정, 말투, 소통. 흑백으로 담긴 영상만큼이나 담담한 그들의 연기 속에서도, 그들의 감정은 미약하게나마 분명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


생명의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클레오의 임신은 그다지 충격적이지도 않았다. 아는 언니뻘이라도 됐다면 아주 잔소리를 수십 시간을 늘어놔도 모자랄 만큼, 결과가 빤히 보이는 실수였으니까. 사실 임신이란 과정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를 긴장하게 한 것은, 클레오가 임신한 후 계속해서 찾아오는 '죽음'의 징조들이었다. 아니, 클레오의 존재 자체가 생명의 탄생과 죽음의 교차로가 됐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죽은 개들의 소름 끼치는 머리 박제들과 그걸 바라보는 클레오의 손을 핥는 또 다른 개.
마시려고 하자 갑자기 깨어져버린 술잔.
클레오가 아름다운 촛불이 둘러싸인 곳에서 바라보자 갑자기 불탄 숲.
새로 태어날 아기 침대를 보러 갔다가 목격한 다른 이의 죽음.


결국, 클레오가 잉태했던 아이마저 살지 못한 채 세상 밖으로 사산된다.


클레오의 임신 과정은, 마치 아이를 출산하지 말라는 것이나 진배없는 상황들의 연속이었다. 나였다면 그중 하나조차도 겪고 싶지 않은,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클레오는 그저 조용히 받아들였다. 단 한 번도 소리 내어 운 적도, 불평을 한 적도 없다. 자신을 임신시킨 바보 같은 남자를 딱 한 번 찾아갔을 뿐, 그를 원망하지도 책임을 묻지도 않았다. 그저, 남편에게 거의 버림받은 것이나 다름없는 여주인과 그녀의 아이들을 그저 아무 말 없이 돌보고 챙길 뿐이다.


여성과 어린이


알폰소 쿠아론은 왜 이런 여성을, 이런 좌절을, 이런 고통을 영화로 담았을까. 왜 하필 이런 극적인 상황을 색채 하나 없는 흑백의 긴- 스크린에 담은 걸까. 딱히 관객들에게 무슨 메시지를 주고 싶은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내 멋대로 곡해해 이 영화를 받아들이자면, 이 영화는 너무나 감동적이었으면서 너무나 화가 났다. 그녀에게 공감하고 동정하고 이해했지만, 동시에 경각심과 분노를 일으켰다. 죽음과 생명이 수없이 교차하고 부대꼈던 것처럼, 나의 감정 역시 이 영화 속에서 다양하게 교차했다.


이런 감정은 우스꽝스럽고 어리석은 형태로 등장하는 대부분의 남자 조연들로 인해 더욱 혼란이 가중됐다. 출장 간다던 남편은 다른 젊은 여자와 동네에서 바람을 피우고 있고, 클레오에게 아이가 생겨 기쁘다던 데이트 상대는 그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클레오의 삶으로부터 도망쳐 나간다. 불이 난 긴급한 상황에서 어떤 남자는 온몸에 웃긴 풀 장식을 두르고 불난 것은 남일인 양 헛소리를 하며 돌아다닌다. 이 남성들은 모두 그럴듯한 명분 혹은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그 명분들은 거짓 투성이이며 껍데기뿐이다. 자신들의 무능함을 감추기 위한 발버둥이었달까.


오히려 일상을 살고 있었던 여성과 어린이들이 더욱 빛을 발한다. 특히, 클레오를 임신시킨 남자가 수련을 한답시고 수백 명의 다른 수련생들과 함께 이상한 수련 자세를 섭렵하고자 낑낑대고 있을 때, 클레오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 자세를 성공해버리는 장면. 아. 이때 정말 나도 모르게 쾌재를 불렀다. 쓸데없는 이상한 수련 말고 자기 밥벌이나 제대로 하시길.이라고 따귀를 날려주는 느낌이었달까.

어쨌건, 여성과 어린이는 이 영화의 권력 구조 상으로는 바닥 중의 바닥에 위치하고 있다. 하지만 삶에 대한 진정성에 있어서, 여성과 어린이는, 약한 만큼 제대로 살고 있었다. 비겁하게 도망치지 않고 모든 불행을 정면으로 맞서고 받아들였다. 가지지 못한 것을 갖기 위해서는 몰래 빼앗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주먹싸움을 했으며, 일상을 지키기 위해 일분일초를 싸워나갔다.


조용히, 묵묵히 살아간다고 약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서로 의지하고, 돕고, 이야기할 줄 알며, 진짜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알 뿐이다. 죽음이라는 끔찍한 고통조차, 여린 아이의 손길에서 위로받을 줄 아는 이들이다.





위의 장면들이 가장 내 기억 속에 뚜렷이 박혀있는 장면들이다. 임신한 클레오를 데리고 멋진 차를 탄 채 병원에 데려가는 사모님이, 두 대의 큰 트럭 사이를 굳이 비집고 들어가는 장면이다. 차 전체에 기스가나고 문이 잘 안열릴 정도로 구겨진다. 어찌 보면, 이 여자 왜 운전을 이리해? 싶을 수도 있다. 나도 처음엔 그랬으니까.


하지만 자세히 보다 보니, 참 맘이 아프고 속상한 장면이다.


이 어머니는 그저 자신의 차로대로 전진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 차로를 아무렇지도 않게 조금씩 침범하고 서있는 두 대의 덩치 큰 트럭들. 남성들. 약자의 힘으로는 절대 밀려나가지 않을 이들.


그들 사이에서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머리부터 들이밀고, 차의 사이드미러 몇 개쯤 날려먹고, 차 문이 찍히고 너덜너덜해지는 것쯤은 감수해야 했을 뿐이다. 비집고 들어가고, 틈새를 벌려가며 살아야만 자신의 일상과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 테니까.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남아 만신창이가 되고도,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그 모습이 왠지 씁쓸한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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