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영찬 밝은 달아
- 귀빠진 날에
시. 갈대의 철학[겸가蒹葭]
내일이 오면
장미 한 송이가 꽃을 피우려
꽃망울 대가 기지개를 켭니다
당신의 밤은
그래도
칠흑 같은
그믐달이 아니어서 좋습니다
사월에 피어나는
금계국보다
아름드리 꺾어놓은
안개꽃보다
망초대 꽃을 사랑한 그대
오늘도
야리야리한
그 꽃잎을 따다 데쳐
오봉상을 차려줍니다
님 그리는 보름달도 만삭이라
내님의 귀가 빠져나온 날 보다
하루가 더 지나가야 하는
하늘 바라보며
세월에 녹아든 마음은
수북이 쌓아 올린 밥 한 그릇에
김치 한 종지가 전부였지만
돈독한 사랑은 더욱 다부져 갔습니다
그 옛날
어머니 살아 계시던 겨울이 오면
뒷마당에 묻어두었던
고깔모 장독대 위에 내린 하얀 손자국은
어머니 손맛의 그리움을
그대가 대신하였고
추억이 어김없이 잊힐라치면
흰 눈 같은 그대였기에
더 한없이 내리며 녹아 사라지는
소중한 인연으로 다가서게 하였습니다
그대가 여태껏 살아온 인생살이에
하얗게 소박맞듯이 내린
흰 서리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대
한 줌의 햇살에 녹아내린
어느 사향의 눈 꽃송이로 다시 태어나도
행복한 마음이기를
늘 간절히 바라던 당신을 위한 기도가
비로소 나를 위한 기도가 되어 버렸을 때
그날은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세상이 함께 울어 지쳐
다시 태어나기를 기도드렸던 그대였습니다
훗날에 기억하려 하겠죠
나의 어머니의 마음처럼
봉분에 쌓아 올린 정을 마다하지 못해
쓰러져도 몇 번이 무너져도
다시 탑을 쌓아 올린 성채와 같은
그대 마음이 되어왔다는 것을요
불어오는 실바람에
수북한 빨래
털털털
오랜 세월 털어내듯
다 들어간 대못 박음질에
또다시
애석한 망치 소리가 요란하게
멀리 공허한 메아리치듯 들려옵니다
너울너울 춤추며
시위하는 빨랫줄에
살랑살랑 거리는
아직도
그해 겨울바람일 듯
치마가 한없이 나풀거립니다
당신이 있어
늘 배고픔을 잊지 않았지만
잠시 떠난
그리움의 한 조각에
사랑은 먹어도 배가 고프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얼굴에 주름살이
하나둘씩 비 온 날 땅이 파이듯
세월 지나 떠나온 유수한 마음이
그대 내 마음에 새겨둔 낙관 찍듯이
나만의 당신이 되어왔습니다
그래요
나는 지금껏
당신의 머슴
당신의 노예
당신의 사랑꾼
당신의 지게꾼
어쩌면
이 모든 게 나를 위한
그댈 향한
당신의 통발이 되어왔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렇게
배불리 먹지 않아도
저절로 배가 부르며 좋았었던 날들이
이제야 배가 고프지 않아도
배가 부른 것은
사랑이라는 오랜 텃새 탓에
정이라는 세월의 텃밭을
가꾸고 눌러앉아
내 오랜 정이
군더더기 마냥 붙어서
따라온 현실이 되어버렸습니다
나는 지금껏 그 한 마음을
오래 지키고
보듬고
가다듬고
미련의 잔정들을 털어버렸을 때
내 안에 그대를 받아들이고
돌이킬 수 없는 연정의 마음으로
지금껏 살아왔었는지도 모릅니다
2021.5.25 둔치에서